[박진영의 사회심리학] 타인을 끌어내리지 않고 자존감 올리기
수학 성적이 좋았던 것은 오로지 나의 영민함과 노력 덕분이지만, 영어 성적이 좋지 않은 것은 선생님이 잘못 가르쳤던가 아니면 시험이 이상했기 때문이라고 하는 A, 남몰래 작가가 되기를 꿈꾸고 있었지만 우연히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가 작가로 등단을 하게 되었다는 소식에 왠지 글에 대한 애정이 예전과 같지 않아진 B, 자신이 아는 사람이 저어기 높은 자리에 있는 누구라거나 유명한 사람과의 친분을 과시하길 좋아하는 C.
다들 한 두 번쯤 이와 같은 행동을 겪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A의 행동처럼 긍정적인 자아상을 유지하는 데 유리한 사실들을 골라서 믿는 자기고양적 믿음(self-serving belief), B의 행동처럼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영역에서만큼은 친한 친구라고 할지라도 보다 앞서고 싶은, 비교를 통해 자존감을 유지하려는 모습(flattering social comparison), C처럼 잘 나가는 사람과의 친분을 통해 자신도 비슷하게 잘 나가는 사람임을 과시하고자 하는 투사된 영광 누리기(basking in reflected glory)는 흔하게 나타나는 자존감 유지 전략들이다. 여기에 한 가지 더 추가하면 자기 확인(self-affirmation), 자신에게 중요한 가치들을 통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재확인하는 과정이 있다.
사람들이 자존감을 유지하는 전략들에 대한 연구로 유명한 심리학자 에이브러햄 테서(Abraham Tesser)에 따르면 이들 전략들은 서로 보완적이고 호환이 가능하다. 그러니까 친구가 나보다 더 잘 나간다는 사실을 확인해서 긍정적인 내용의 사회적 비교를 유지하는 것이 어려워졌을 경우, 친구의 성공은 순전히 “운”이라고 믿는 자기고양적 믿음을 보이거나 또는 자신의 삶에는 여전히 중요한 다른 여러 가치들이 존재함을 떠올림으로써(자기 확인) 자존감에 대한 위협을 달래는 식의 상황들이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다.
이렇게 서로 돌려막기(?)가 가능한 자존감 유지 전략의 모습을 잘 보여준 실험이 있다. 친구 둘둘 씩 짝을 지어 총 네 명이 실험에 참가하도록 한다. 참가자 모두에게 네 명 중 친구가 한 명 있고, 낯선 사람이 둘인 상황이다. 네 명이 함께 단어 맞추기 게임을 하도록 하는데, 세 명이 힌트를 주면 나머지 한 사람이 정답을 맞추는 식의 게임이다. 이 때 미리 연습게임을 통해 친구 둘 중 한 명에게 단어 맞추기 게임을 잘 못하는 편이라는 부정적인 피드백을 준다.
여기에 한 가지 조건을 더 추가해서 어떤 사람들에게는 단어 맞추기 게임이 성공에서 중요한 능력을 알려준다고 이야기한다. 이 경우 단어 맞추기 실력이 낮은 사람들은 중요한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이 되므로 자존감에 타격이 가는 상황이다.
그러고 나서 게임을 관찰해 보면 자존감에 타격을 입은 사람들, 단어 맞추기 게임이 중요한 능력을 반영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또 자신의 실력이 부족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이 단순히 게임 실력이 부족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에 비해 낯선 사람들보다 친한 친구에게 더 “어려운” 힌트를 주는 현상이 나타난다.
자신에게 중요한 무엇을 친구가 나보다 더 잘 하게 되면 이미 타격이 간 자존감에 더 큰 타격이 가므로 친구의 성과를 끌어내려서라도 긍정적인 내용의 사회적 비교를 유지하려고 한다는 것이 연구자들의 설명이다.
반대로 자존감에 타격을 입지 않은 참가자들, 단순히 별 거 아닌 게임 실력이 부족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참가자들은 낯선 사람들보다 친구에게 더 쉬운 힌트를 주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이 때 한 가지 조건을 더 추가해서 자기 확인을 한 참가자들, 다시 말해 자신의 삶에서 중요한 가치들이 무엇인지 떠올려본 참가자들은 굳이 자신을 끌어올리기 위해 친구를 끌어내리는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
나 자신이 가치 없는 인간이기보다는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믿고 싶은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고작 내가 나에 대해 생각하는 주관적 믿음일 뿐이지만 우리는 이 믿음의 내용을 긍정적으로 포장하기 위해 (위에서도 확인한) 다양한 방법들을 사용한다.
하지만 가능하다면 나를 끌어올리기 위해 누군가를 끌어내리는 방법보다는 자기 확인 같이 상황에 의해 흔들리지 않는 나만의 중요한 가치관을 찾는 것이 정신건강과 행복에 비교적 더 이로울 것이다. 내 친구의 성공에 대해 기죽기보다는 “내 친구가 이렇게나 대단한 사람이다!”라며 투사된 영광을 누려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내 친구들의 멋진 점을 떠올려보고 이렇게나 대단한 사람들이 내 친구라니! 하고 생각해봤을 때 느껴지는 기쁨도 분명 작지 않다.
성숙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일면 어떤 식으로 자기 가치감을 유지하는가의 문제에서 비교적 '덜' 파괴적인 방법을 알게 되는 과정인 것 같다. 나의 경우 예전에는 사람들이 나의 대단함을 알아주지 않는다며 열등감을 뿜어냈지만 지금은 나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에 그다지 충격받지 않게 된 것 같다. 내가 뭐라도 하나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그것이 너무 다행이고 단 한 명이라도 나에게 사랑을 보여준다면 그것이 기적이라는 비교적 현실적인 생각을 갖게 된 것 같다.
네가 무엇을 좀 못 한다고 해서 너라는 사람 전체가 가치 없는 인간이 되지 않고 너의 사랑스러움 또한 변치 않는 것처럼, 사람의 가치란 상황에 따라 변하지 않는 것임을 안다. 나와 너 안의 변치 않는 무엇들을 찾아내는 횟수가 많아질수록 우리는 좀 더 단단한 마음을 갖게 될 수 있지 않을까.
Tesser, A. (2001). On the plasticity of self-defense. Current Directions in Psychological Science, 10(2), 66-69.
※필자소개
박진영. 《나, 지금 이대로 괜찮은 사람》, 《나를 사랑하지 않는 나에게》를 썼다. 삶에 도움이 되는 심리학 연구를 알기 쉽고 공감 가도록 풀어낸 책을 통해 독자와 꾸준히 소통하고 있다. 온라인에서 '지뇽뇽'이라는 필명으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미국 듀크대에서 사회심리학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
[박진영 심리학 칼럼니스트 parkjy021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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