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감학원 진실 밝혔지만…尹정부 '국가 책임'은 외면
10월 진실규명 권고사항 부처별 전달
사과 권고에도 정부 부처들 '묵묵부답'
행안부 "부처별 세부 조치사항 있어야"
김광동 위원장 '역사인식' 논란도 확산
특별법 기다리던 피해자들 '소송' 돌입
전문가 "정부 역할 중요…의지 문제"
유사 사건 묶어 배·보상법 추진 의견도
공권력에 의해 잔혹한 인권 유린이 자행된 경기도 '선감학원 사건'의 진실이 40년 만에 규명됐지만, 국가의 공식 사과는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다.
정부의 소극적 태도로 인해 피해 회복을 위한 사후 조치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서 피해자들과 유가족들 원성만 커지고 있다는 지적이다.
40년 만의 진실규명, 부랑아 단속 주체는 '국가'
31일 CBS노컷뉴스 취재를 종합하면, 2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가 지난 10월 20일 선감학원 사건의 '진실규명' 결정을 하면서 국가를 상대로 공식 사과를 권고했지만 여태 이행한 정부 부처는 단 한 곳도 없다.
이런 중앙정부의 미온적 대응은 지방자치 이전 관선 도지사 시대 사건임에도 김동연 지사가 직접 사과와 피해지원에 나서는 등 경기도가 과거사 정리에 적극 행보를 보인 것과 대비된다.
애초 선감학원 사건 당시 가해자이던 공권력의 중심축은 이른바 '윗선'으로 불리는 국가였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군인 양성을 위해 설립한 선감학원은 해방 이후 1946년부터 1982년 폐쇄되기까지 경기도의 부랑아 수용소로 쓰였는데, 이때 부랑인 문제 해소와 도시환경 정화를 명분으로 아동들의 신병 확보에 나선 주체가 정부였기 때문이다.
실제 1956년 국무회의에 오른 '부랑아 근절책 확립의 건'에는 법무부, 내무부, 보건사회부 등 정부 부처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에 진실화해위는 "권위주의 시기 위헌, 위법적인 부랑아 정책 시행으로 아동 인권침해가 초래됐다"는 취지로 국가의 책임임을 분명히 하며, 행정안전부·법무부·교육부·보건복지부 장관 등에게 공식 사과와 소관 부처별 후속 조치에 대한 권고사항을 통지한 상태다.
권고사항은 부랑아로 날조된 피해아동들을 강제노역과 폭력 등 가혹행위를 당하게 만든 데 대해 각 부처가 사과하고, 회복을 위한 특별법 제정 등의 조치를 해야 된다는 게 핵심이다.
정부 사과 '밍기적'…김광동 위원장 '역사인식' 논란까지
하지만 행안부와 법무부 등 정부 부처들은 공식 사과 권고에도 두 달 넘도록 묵묵부답이다.
이는 관련 법에도 어긋난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 34조를 보면 '권고사항을 소관으로 하는 국가기관은 해당 권고사항을 존중하고 이행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규정돼 있다. 부처별 담당 업무를 확인해 권고사항을 적극 실천할 의무가 있다는 얘기다.
이상민 행안부 장관의 경우 10월 국회 국정감사에서 "진실화해위의 권고를 받아들여 사과와 지원책을 마련할 계획이 있느냐"는 야당 의원 질의에 "국감이 끝나는대로 바로 진실화해위의 권고문을 검토해 필요한 부분이 있으면 당연히 그렇게 하겠다"며 긍정적 답변을 한 바 있다. 그럼에도 아직 사과 발언이 나오지 않아, 이 장관의 약속도 지켜지지 않고 있는 셈이다.
행안부 관계자는 "전체적인 진실규명 결정문과 권고사항만 받았지, 부처별로 어떤 사항을 이행해야 하는지 별도 통보를 받진 못했다"며 "후속 통보를 기다리는 중"이라고 말했다. 부처에 따른 세부 역할을 명시하지 않아 권고 이행에 적극 나설 수 없다는 의미다.
이에 최근 진실화해위는 정부의 전향적 태도를 이끌기 위해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 개정에 나서기도 했다. 권고 이행 관리의 주체를 행안부 장관으로 법률에 명시하고 세부 계획 수립과 조치 결과까지 관리하도록 해 국가기관의 실질적 행동을 도모하려는 취지다.
그러나 이마저도 지난 27일 여당인 국민의힘 소속 의원의 반대로 개정안이 법제사법위원회 문턱을 넘지 못해 국회 본회의 상정조차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더욱이 이달 취임한 김광동 진실화해위 위원장이 과거 '역사 왜곡' 논란에 휩싸인 것도 걸림돌이다. 김 위원장은 군부독재를 찬양하고 4.19 시민혁명을 폄훼하는가 하면, 5.18 북한 개입설을 가능성 있는 의혹이라고 하는 등 편향되고 왜곡된 역사인식을 보여온 인물이다.
진실화해위의 조사 대상 사건 대부분이 국가 공권력에 의한 인권유린 사건들인 만큼, 위원회 수장으로서 국가의 진정성 있는 사과를 받아내는 데 제 역할을 할지 의문이 드는 대목이다.
진실화해위 관계자는 "수십 년 만에 국가 차원에서 진실을 밝혀냈는데 정작 정부가 권고를 따르지 않고, 이를 개선하기 위한 법 개정도 뜻대로 되지 않아 안타깝다"며 "새로 부임한 위원장이 어떤 방향으로 위원회를 운영할지를 놓고도 내부의 걱정이 깊어지는 분위기"라고 했다.
'특별법' 기다리다…직접 소송 나선 피해자들
정부가 소극적 태도로 일관하면서 금전적 배·보상과 신체·심리 치료 지원 등 국가 차원의 후속 조치가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것도 문제다.
당초 진상규명 결정으로 선감학원 원생들이 피해자로서 법적 지위를 인정받게 됨으로써, 고령의 생존자와 유족들이 복잡한 소송 절차 없이 보상·지원을 받을 수 있는 특별법 제정도 탄력을 받을 것으로 기대되기도 했으나 현실은 달랐다.
이 특별법 제정을 위해서는 정치권은 물론 정부도 함께 뜻을 모아야 하는데, 사과마저 망설이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정부가 의지를 갖고 법 제정을 추진할 여지는 그리 많지 않아 보인다.
3년 전 민주당과 정의당 의원들이 '선감학원 피해사건의 진상규명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안'을 발의한 적은 있지만, 이듬해 20대 국회 임기만료로 자동폐기 돼 빛을 보지 못했다.
결국 특별법을 기다리다 지친 피해자·유족들은 이달 29일 국가를 상대로 직접 소송을 제기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을 통해 '선감학원 피해자 변호단'을 꾸려 1차 소송에 들어간 뒤, 소송을 이어가겠다는 구상이다. 진상규명 신청인 166명을 비롯해 신청하지 않은 유족 등을 헤아리면 소송 인원은 계속해서 늘어날 전망이다.
이 같은 '셀프 소송전'에 대해 유엔 인권 특별조사관 측은 "독립된 국가기구에서 규명한 사건에 대해 왜 개별 소송으로 구제받아야 하느냐"는 취지로 의문을 제기한 것으로도 전해졌다.
이에 대해 법무부는 선감학원 사건 등에 대한 특별법 제정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계획이 없다는 취지의 입장을 내세웠다.
법무부 관계자는 "배보상 등을 위한 특별법 제정은 주체가 행안부인 것으로 안다"며 "여러 관련 부처가 함께 논의해 볼 수는 있겠지만, 공식 사과를 비롯한 (진실화해위의) 권고사항 전반에 대해 아직 내부 검토 중일 뿐 정해진 것은 없다"고 밝혔다.
피해자 "우린 힘이 없다"…전문가 "정부 역사인식 걱정"
정부의 태도에 대해 선감학원에서 온갖 가혹행위에 시달렸던 피해자들은 분통을 터뜨렸다.
피해 생존자인 김영배 선감학원아동피해대책협의회 회장은 "이상민 장관이 사과할 수 있다고 말했는데 지켜지지 않고 유야무야됐다"며 "피해 입은 사람이 아무리 요구해봐야 사과에 무슨 진정성이 있겠는가"라고 따져 물었다.
그러면서 "진실을 밝힌 뒤에는 특별법으로 모든 것을 제 자리에 돌려놔야하는데 우리들은 나서봐야 힘도, 권한도 없는 나약한 존재"라며 "1기 진실화해위 때 배·보상 규정이 있었는데 2기로 넘어오는 과정에 국민의힘 쪽에서 이 규정을 빼라고 했던 것도 문제다"라고 강조했다.
정부 지침에 따른 피해였던 만큼 사과와 지원도 중앙정부 주도로 이뤄져야 하는데, 현 정권의 역사인식과 위원회 인사 조치 등이 이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이와 함께 특별법 제정의 경우, 선감학원과 같은 특정 사건에 국한하지 말고 유사 사건들을 연계해 법 적용 대상을 넓혀 추진하는 게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의견도 뒤따른다.
김민환 한신대학교 평화교양대학(사회학) 교수는 "경기도와 함께 정부도 보다 적극적으로 사과하고 피해 회복에 노력해야 한다"면서도 "그러기에는 신임 진실화해위 위원장에 문제의 인물을 앉히는 등 이번 정부의 의지가 보이지 않고, 철학과 정체성 등도 걱정된다"고 판단했다.
이어 "형제복지원 사건 등 내무부 고시 사건으로 분류되는 비슷한 건들이 많은데 사건마다 특별법을 따로 만드는 게 쉽지 않은 현실"이라며 "공권력으로부터 피해를 입은 유사 요소를 지닌 사건들을 묶어서 배·보상 등에 대한 특별법을 만드는 게 효과적일 것"이라고 조언했다.
한편, 선감학원은 과거 국가가 부랑인 문제 해소와 도시환경 정화 등을 명분으로 신고단속체계를 구축해 아동들의 신병을 확보 후 수용하던 시설이다. 1956년 '부랑아 근절책 확립의 건'에는 '부랑아 조기발견, 수용보호, 본적지 송환, 부랑행위 방지'가 목적으로 명시됐지만, 실제로는 부모와 주거지가 있고 범법행위를 저지르지 않았음에도 복장이 남루하거나 주소를 모른다는 이유 등으로 끌려가는 사례가 잇따랐다.
진실화해위 조사에서 원생들은 염전, 농사, 축산, 양잠, 석화 양식 등 강제노역에 동원되는 것을 비롯해 급식 양이 부족해 열매, 들풀, 곤충, 뱀, 쥐 등을 잡아먹다 불의의 사고를 당하거나 시설 내 가혹행위로 심각한 신체·정신적 후유증을 앓았던 사실이 확인됐다.
또한 아동들의 인적 사항을 임의로 변경해 실종자가 발생하거나 가족관계와 원적을 회복하지 못한 사례들도 조사됐다. 이는 CBS노컷뉴스를 통해서도 피해자들의 인터뷰와 관련 문서 등을 통해 보도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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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BS노컷뉴스 박창주 기자 pcj@c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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