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백호 "긴 겨울 같던 청춘보다 나이 든 지금이 좋아"
일렉트로 팝, 힙합 등 새로운 장르 시도
"내년엔 지코, 개코와 '3코' 힙합 앨범 낼 것"
최백호의 목소리엔 깊이 파인 주름이 있다. 일흔둘의 나이테가 빼곡히 담긴 주름으로 그는 이렇게 노래한다.
‘빛나던 순간 / 희미한 순간 / 그 모든 찰나들이 / 나의 삶을 가득히 수놓았음을 / 지금 이 순간도 / 나의 빛나던 찰나여 / 이미 지나버린 찰나여 / 나의 영원한 찰나여 / 지금 빛나는 순간이여’
지난달 발표한 새 앨범 ‘찰나’의 동명 타이틀 곡이다. 그가 멘토로 참여하고 있는 CJ ENM의 신인 작곡가 육성·발굴 프로젝트인 오펜뮤직 출신 헨(Hen)이 가사를 쓰고 선율까지 입혔다. 앨범 수록곡 중 최백호의 자작곡 ‘책’을 제외한 나머지 6곡 역시 오펜뮤직과 콘텐츠 크리에이터 그룹 피앤피 출신의 젊은 음악가들이 작사, 작곡했다.
26일 서울 여의도의 작업실에서 만난 최백호는 새 앨범에 대해 “저는 완전히 빠지고 젊은 작곡가들이 저를 두고 곡을 썼다”며 “화가 앞의 누드모델처럼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고 설명했다. 앨범에는 젊은 작곡가들이 그린 최백호의 20대부터 현재의 모습이 담겼다. 젊은 시절의 최백호를 대신해 래퍼 지코가 짧은 내레이션으로 만든 첫 트랙 ‘찰나의 순간’, 현재의 최백호가 지난날을 되돌아본 ‘찰나’에 이어 ‘덧칠’, ‘개화’, ‘변화’, ‘그 사람’, ‘나를 떠나가는 것들’이 차례로 20대부터 60대를 노래한다.
신진 작곡가들의 곡인 만큼 일렉트로 팝, 힙합 등 평소 시도하지 않던 장르에도 도전했다. 타이거 JK, 콜드, 죠지, 정승환 등 후배들과 선배 정미조가 기꺼이 목소리를 보탰다. 그는 “처음엔 곡이 너무 어려워서 부르기가 까다로웠고 왜 이렇게 만들었는지 이해를 못 했다”며 “완성하고 들어 보니 왜 그랬는지 이해할 수 있었고 공부가 많이 됐다”고 말했다.
앨범 녹음 과정에선 폐질환으로 건강이 악화해 고생도 했지만 이후 건강을 회복하고 쭉 빠졌던 체중도 회복했다. ‘찰나’ CD에 ‘이 세상은 억만 겁의 찰나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문구를 써 넣은 그는 나이 든 지금이 좋다며 젊은 시절은 “긴 겨울 같고 어둡게 느껴졌다”고 회고했다. 70여 년의 삶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찰나의 순간도 어머니를 떠나보내던 순간이다.
“(제가 태어난 지 5개월 만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저 스무 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효도 한 번 못해 드렸고, 고생만 하시다 돌아가셨죠. 어머니와 마지막 이별의 순간, 관이 화장로에 들어가는 순간 너무나도 힘들어 무너져 내렸어요. 제 첫 노래 ‘내 마음 갈 곳을 잃어’에서 ‘거리엔 어둠이 내리고 / 안개 속에 가로등 하나’라는 가사는 제가 상복을 입고 부산 부둣가를 걸었던 이야기입니다.”
미대 진학을 꿈꾸다 돈을 벌기 위해 라이브 클럽 무대에 선 이후 데뷔곡 ‘내 마음 갈 곳을 잃어’(1976)로 크게 성공하고 ‘영일만 친구’(1979)를 히트시키기도 했지만 1980년대 이후 긴 슬럼프를 겪었다. 1998년 새 삶을 찾아 가족과 미국으로 떠났다 돌아오기도 했다. “군 제대 후 3년간 이루 말할 수 없이 힘든 생활을 했어요. 우연히 가수가 돼 처음엔 잘 풀렸지만 30대에 무너졌죠. 방황도 많이 하고 음악을 그만둘 생각도 했어요.”
그를 기사회생하게 해준 건 1994년 발표한 곡 ‘낭만에 대하여’다. 발표 당시 별 반응이 없던 이 곡은 이듬해 김수현 작가가 쓴 KBS 드라마 ‘목욕탕집 남자들’에 나오면서 ‘역주행’ 히트곡이 됐다. “노래의 힘이란 게 정말 무서워요. ‘낭만에 대하여’ 한 곡으로 20여 년을 버티고 있잖아요. 서울 목동 아파트 거실에서 아내를 생각하며 기타로 곡을 만들던 순간이 아직도 기억나요. 아내의 제안 덕에 탱고 리듬을 입히게 됐죠. 곡이 히트한 이후 한 번도 김수현 선생님을 못 뵙다가 1년 전쯤 강부자 선생님이 다리를 놔주셔서 두 분 모시고 식사를 했어요. 그때 ‘제 생명의 은인이십니다’라고 말씀드렸죠.”
‘낭만에 대하여’의 히트로 ‘낭만가객’이란 별명을 얻게 된 그는 2008년부터 15년째 SBS 라디오 ‘최백호의 낭만시대’를 진행하고 있다. 10여 년 전부터 뒤늦게 다시 미술에 뛰어들어 여러 차례 전시회도 열었다. 내년엔 그간 신문 등에 기고한 칼럼 등을 모아 책을 한 권 낼 계획이다.
지코, 다이나믹 듀오의 개코와 함께 ‘가요계 3대 코(최배코)’로 힙합 앨범도 기획하고 있다. “일단 해보자고 말만 한 상태입니다. 이번엔 랩도 한번 해볼까 해요. 저는 정말 운이 좋은 가수 같아요. 가수왕 같은 건 못해봤지만 이것저것 다 해봤잖아요. 제 모토가 3등으로 사는 거예요. '낭만에 대하여' 같은 히트곡을 가졌으니 더 이상 욕심도 없습니다.(웃음)”
고경석 기자 kav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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