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백호 "긴 겨울 같던 청춘보다 나이 든 지금이 좋아"

고경석 2022. 12. 31.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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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코, 타이거JK, 콜드, 죠지 등과 새 앨범 '찰나' 발표
일렉트로 팝, 힙합 등 새로운 장르 시도
"내년엔 지코, 개코와 '3코' 힙합 앨범 낼 것"
가수 최백호는 라디오 DJ로 활동하면서 화가로도 여러 차례 전시회를 열었다. 26일 서울 영등포구 작업실에서 만난 그는 "아직 화가라는 명칭을 쓰긴 부끄럽다"면서 "전문 화가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긴 하지만 전시회를 열다 보니 내게 부족한 면을 알게 됐고 내년엔 좀 더 전문적으로 공부를 해보려고 한다"고 말했다. 홍인기 기자

최백호의 목소리엔 깊이 파인 주름이 있다. 일흔둘의 나이테가 빼곡히 담긴 주름으로 그는 이렇게 노래한다.

‘빛나던 순간 / 희미한 순간 / 그 모든 찰나들이 / 나의 삶을 가득히 수놓았음을 / 지금 이 순간도 / 나의 빛나던 찰나여 / 이미 지나버린 찰나여 / 나의 영원한 찰나여 / 지금 빛나는 순간이여’

지난달 발표한 새 앨범 ‘찰나’의 동명 타이틀 곡이다. 그가 멘토로 참여하고 있는 CJ ENM의 신인 작곡가 육성·발굴 프로젝트인 오펜뮤직 출신 헨(Hen)이 가사를 쓰고 선율까지 입혔다. 앨범 수록곡 중 최백호의 자작곡 ‘책’을 제외한 나머지 6곡 역시 오펜뮤직과 콘텐츠 크리에이터 그룹 피앤피 출신의 젊은 음악가들이 작사, 작곡했다.

26일 서울 여의도의 작업실에서 만난 최백호는 새 앨범에 대해 “저는 완전히 빠지고 젊은 작곡가들이 저를 두고 곡을 썼다”며 “화가 앞의 누드모델처럼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고 설명했다. 앨범에는 젊은 작곡가들이 그린 최백호의 20대부터 현재의 모습이 담겼다. 젊은 시절의 최백호를 대신해 래퍼 지코가 짧은 내레이션으로 만든 첫 트랙 ‘찰나의 순간’, 현재의 최백호가 지난날을 되돌아본 ‘찰나’에 이어 ‘덧칠’, ‘개화’, ‘변화’, ‘그 사람’, ‘나를 떠나가는 것들’이 차례로 20대부터 60대를 노래한다.

신진 작곡가들의 곡인 만큼 일렉트로 팝, 힙합 등 평소 시도하지 않던 장르에도 도전했다. 타이거 JK, 콜드, 죠지, 정승환 등 후배들과 선배 정미조가 기꺼이 목소리를 보탰다. 그는 “처음엔 곡이 너무 어려워서 부르기가 까다로웠고 왜 이렇게 만들었는지 이해를 못 했다”며 “완성하고 들어 보니 왜 그랬는지 이해할 수 있었고 공부가 많이 됐다”고 말했다.

최백호의 새 앨범 '찰나' 커버 이미지. 그가 직접 그린 그림으로 제작됐다. CJ ENM 제공

앨범 녹음 과정에선 폐질환으로 건강이 악화해 고생도 했지만 이후 건강을 회복하고 쭉 빠졌던 체중도 회복했다. ‘찰나’ CD에 ‘이 세상은 억만 겁의 찰나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문구를 써 넣은 그는 나이 든 지금이 좋다며 젊은 시절은 “긴 겨울 같고 어둡게 느껴졌다”고 회고했다. 70여 년의 삶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찰나의 순간도 어머니를 떠나보내던 순간이다.

“(제가 태어난 지 5개월 만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저 스무 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효도 한 번 못해 드렸고, 고생만 하시다 돌아가셨죠. 어머니와 마지막 이별의 순간, 관이 화장로에 들어가는 순간 너무나도 힘들어 무너져 내렸어요. 제 첫 노래 ‘내 마음 갈 곳을 잃어’에서 ‘거리엔 어둠이 내리고 / 안개 속에 가로등 하나’라는 가사는 제가 상복을 입고 부산 부둣가를 걸었던 이야기입니다.”

미대 진학을 꿈꾸다 돈을 벌기 위해 라이브 클럽 무대에 선 이후 데뷔곡 ‘내 마음 갈 곳을 잃어’(1976)로 크게 성공하고 ‘영일만 친구’(1979)를 히트시키기도 했지만 1980년대 이후 긴 슬럼프를 겪었다. 1998년 새 삶을 찾아 가족과 미국으로 떠났다 돌아오기도 했다. “군 제대 후 3년간 이루 말할 수 없이 힘든 생활을 했어요. 우연히 가수가 돼 처음엔 잘 풀렸지만 30대에 무너졌죠. 방황도 많이 하고 음악을 그만둘 생각도 했어요.”

가수 최백호. CJ ENM 제공

그를 기사회생하게 해준 건 1994년 발표한 곡 ‘낭만에 대하여’다. 발표 당시 별 반응이 없던 이 곡은 이듬해 김수현 작가가 쓴 KBS 드라마 ‘목욕탕집 남자들’에 나오면서 ‘역주행’ 히트곡이 됐다. “노래의 힘이란 게 정말 무서워요. ‘낭만에 대하여’ 한 곡으로 20여 년을 버티고 있잖아요. 서울 목동 아파트 거실에서 아내를 생각하며 기타로 곡을 만들던 순간이 아직도 기억나요. 아내의 제안 덕에 탱고 리듬을 입히게 됐죠. 곡이 히트한 이후 한 번도 김수현 선생님을 못 뵙다가 1년 전쯤 강부자 선생님이 다리를 놔주셔서 두 분 모시고 식사를 했어요. 그때 ‘제 생명의 은인이십니다’라고 말씀드렸죠.”

26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의 작업실에서 만난 가수 최백호는 "매일 오전 작업실에 나와 2시간 이상 그림을 그린다"면서 "그림을 그릴 때면 모든 잡념이 사라지게 되고 집중하게 된다"고 말했다. 작업실 창가에 그가 그린 그림들이 걸려 있다. 홍인기 기자

‘낭만에 대하여’의 히트로 ‘낭만가객’이란 별명을 얻게 된 그는 2008년부터 15년째 SBS 라디오 ‘최백호의 낭만시대’를 진행하고 있다. 10여 년 전부터 뒤늦게 다시 미술에 뛰어들어 여러 차례 전시회도 열었다. 내년엔 그간 신문 등에 기고한 칼럼 등을 모아 책을 한 권 낼 계획이다.

지코, 다이나믹 듀오의 개코와 함께 ‘가요계 3대 코(최배코)’로 힙합 앨범도 기획하고 있다. “일단 해보자고 말만 한 상태입니다. 이번엔 랩도 한번 해볼까 해요. 저는 정말 운이 좋은 가수 같아요. 가수왕 같은 건 못해봤지만 이것저것 다 해봤잖아요. 제 모토가 3등으로 사는 거예요. '낭만에 대하여' 같은 히트곡을 가졌으니 더 이상 욕심도 없습니다.(웃음)”

고경석 기자 kav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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