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신주기식 ‘SNS 폭로’ 성평등 도움 안 돼… ‘좋은 법’이 우선”
교만의 요새
마사 누스바움 지음|박선아 옮김|민음사|440쪽|2만4000원
“보복 없는 저항의 한 가지 예가 있다. 마틴 루서 킹 주니어의 신념이다. 킹은 사람들이 절망에 빠져 포기하는 대신 저항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분노가 어느 정도는 유용하다고 했지만, 그 분노는 정제되어 올바른 방향을 향해야 한다고 했다. 저항 정신을 유지하되 보복하고자 하는 마음은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보복보다 정의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 필요하다.”
이민자와 내국인의 갈등, 인종 차별, 성적 소수자와 무슬림에 대한 혐오...2016년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 당선 이후 타인에 대한 두려움과 분노가 심화됐던 미국. 법철학자이자 미국 시카고대 등에서 30여 년간 여성학을 강의해 온 마사 누스바움(75)은 전작 ‘타인에 대한 연민’(알에이치코리아)에 이렇게 썼다. 기득권과 소수자로 나뉘어 혐오와 차별이 만연했던 사회에 전달하는 위로이자 조언이었다.
‘정치적 감정’(글항아리) ‘혐오에서 인류애로’(뿌리와이파리) 등의 저서로 차별과 혐오 문제를 다뤄온 그가 최근 페미니즘 운동의 성과와 한계를 짚고, 성평등 사회를 위한 제언을 담은 책 ‘교만의 요새’(민음사)를 냈다. 성별로 젊은 세대의 표심이 갈라졌던 지난 대선 결과에서도 드러나듯, ‘젠더’를 두고 벌어지는 우리 사회의 분쟁은 유례없는 수준. 사회 제도와 법에서도 ‘감정(感情)’의 중요성을 강조해온 그는 성평등 사회를 위한 해법이 무엇이라고 보고 있을까. 현대 여성학 이론에서 교과서적 지위에 올라 있는 그의 생각을 서면 인터뷰를 통해 들었다.
“문제는 타인을 동등한 인간 존재로 존중하지 않는 교만과 대상화(對象化∙Objectification)다. 남성들 또한 권력 있는 남성들에 의한 성폭력 피해자였다.” 누스바움은 성폭력과 성차별 문제를 남녀 사이의 일이 아닌 ‘권력’ 문제로 파악한다. 사람을 주체성이 없는 사물로 인식하는 것을 의미하는 대상화는 자신이 남들보다 우월한 지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교만’ 때문이라는 것이 누스바움의 분석이다. 그는 “교만 감정은 경쟁적이고 지위에 예민한 사회일수록 더 두드러지게 번성한다”고 책에 썼다. 교만은 스포츠, 문화 예술계 등 상급자가 많은 권한을 갖고 있는 분야에서 특히 쉽게 증폭된다.
하지만 그동안 성폭력의 대상이 됐던 것은 주로 여성이었고, 교만에 대한 저항 역시 페미니즘 운동을 중심으로 전개됐다. 2017년 할리우드 영화 제작자 하비 와인스틴의 성폭력을 폭로하는 데서 시작된 미투(Me Too) 운동은 성평등에 크게 기여했지만, 그는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말했다. “미투 운동은 이런 일들이 얼마나 흔하게 벌어지는 것인지 대중의 각성을 일으키는 데 효용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성폭력을 다루는 관련 법이 부재하고, 성폭력에 관한 법을 적절히 해석하는 판사들이 없다면, 미투 운동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누스바움은 “성폭력에 대응할 수 있는 사법 제도가 우선시되어야 한다”고 말하며 성폭력 사건에 대한 미국 사법부의 판결 변화를 예시로 든다. 불과 50여 년 전 미국의 법원은 “심각한 신체적 상해나 죽음에 가까운” 위협을 받았을 때에만 강간 행위를 인정했고, ‘성희롱’은 받아들여지지 않는 개념이었다는 것. “남녀 문제에 관해선 대부분 사회에서 큰 변화가 있었죠. 오늘날의 법은 여성이 성행위를 “싫다”고 말했는데도 계속한다는 건 범죄로 보는 개념(노 민스 노∙No means NO)을 포함하고 있어요. 물론 숙제도 많습니다. 한 예로 부부 사이 강간 사건은 보통 모르는 사람에 의한 강간보다 가볍게 처리됩니다. 어떤 국가에서는 범죄로 인식되고 있지 않기도 하고요.” 사법 제도와 사회를 변화시킨 것은 “1970~80년대 미국 형법에 이의를 제기해 온 여성주의 운동가들의 노력”이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누스바움은 현 시대를 “일부 여성들은 공개적 망신과 보복에서 희열을 찾고, 일부 남성들은 이에 분노로 응답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미투 운동 이후 일부 페미니스트의 보복적 분노, 특히 소셜미디어를 중심으로 일어나는 ‘콜 아웃’(특정 인물을 향한 지적과 비난)은 성평등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목표가 되어야 하는 것은 모두에게 적용되는, ‘좋은 법’을 만드는 것입니다.”
한국 사회의 ‘젠더 분쟁’에 대해서도 조언을 건넸다. “가장 중요한 것은 상대방이 맞닥뜨리고 있는 어려움이 무엇인지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일이에요. 제가 공교육에서 연극이나 예술 교육이 큰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아이들은 어떤 문제를 주제로 연극을 할 때, 자신의 모습과는 다른 배역들을 연기해보며 유연한 의식을 갖게 되거든요.”
그는 “법에도 분명 절차상 결함은 존재한다”는 단서를 달면서도, 비폭력 저항을 주장했던 마틴 루서 킹의 말을 인용하며 보복 감정에 의해 추동된 ‘장외투쟁’이 아닌 법치주의를 통한 정의를 다시금 강조했다. “도덕의 세계가 그리는 궤적은 길지만, 결국 그 길은 정의를 향해 기울어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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