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를 예술로 만들었다… “20세기 최고의 운동선수”

김민기 기자 2022. 12. 31.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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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황제 펠레, 82세에 암으로 숨져… 브라질 사흘간 애도기간
나비처럼 날아올라 벌처럼 쏘다 - 펠레는 축구라는 스포츠의 수준을 예술적 단계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펠레가 그라운드에서 선보인 드리블, 패스, 움직임, 골 결정력 모두 당대 최고 수준이었다. 사진은 펠레가 1968년 바이시클 킥으로 슈팅하는 모습. 어느 경기장이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AP 연합뉴스

‘축구 황제’가 세상을 떠났다. 펠레(82·브라질)가 치료를 받고 있던 브라질 상파울루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병원 측은 펠레가 30일 사망했다고 밝혔다. 지난해부터 대장암으로 투병해온 펠레는 한 달 전 병세가 나빠져 입원해 있었다. 최근 코로나에 감염된 이후로 호흡기 질환도 겪었다.

생전에 펠레는 늘 사랑을 강조했다. 마지막 순간에도 “사랑하고, 사랑하고, 사랑하라. 영원히”라는 말을 모든 이에게 남겼다. 그의 소셜 미디어에는 “황제 펠레의 여정에는 영감과 사랑이 있었다. 그는 천재성으로 세계를 매료했고, 전쟁을 멈추게 했고, 사랑을 퍼뜨렸다”는 글이 올라왔다. 1969년 나이지리아 내전 당시 펠레의 경기를 보기 위해 총성이 멈췄을 정도로 축구 황제는 전 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스포츠에서 가장 위대한 이름

펠레의 본명은 이드송 아란치스 두나시멘투다. 이드송(Edson)은 미국의 발명가 토머스 에디슨(Edison)에서 딴 이름이다. 부모는 펠레가 천재 발명왕처럼 훌륭한 사람이 되길 바랐다. 펠레는 과학자가 되지는 않았지만, 그라운드에서 가장 창의적인 사람이었고 예술가이자 지휘자였다.

어린 시절 가난했던 이드송의 낙은 헌 양말 뭉치로 만든 공을 맨발로 차며 노는 것이었다. 재능이 뛰어났던 이드송이 골목을 휘저을 때면 꼬마들은 ‘펠레!’라고 연호했다. 유명 축구 선수의 이름에서 딴 것이라는 등 다양한 설이 있지만, 정작 본인도 “펠레라는 별명의 뜻을 정확히 알지 못한다”고 했다. 의미도, 출처도 제대로 모르는 이 별명은 축구를 넘어 스포츠에서 가장 위대한 이름이 됐다.

◇전무후무한 월드컵 3회 우승

펠레가 세운 FIFA(국제축구연맹) 월드컵 기록은 압도적이다. 그는 만 17세였던 1958년 스웨덴 월드컵에 화려하게 등장했다. 이때 세운 최연소 골(17세 239일), 해트트릭(17세 244일), 결승전 골·우승 기록(17세 249일)은 깨지지 않고 있다. 이 대회에서 6골을 퍼부은 소년을 사람들은 ‘왕’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펠레는 1962 칠레, 1970 멕시코 월드컵에서 브라질을 다시 우승으로 이끌었다. 3번 월드컵 트로피를 들어 올린 전무후무한 선수가 됐다. 그는 월드컵 12골을 포함해 1957년부터 1971년까지 브라질에 77골을 안겼다. 브라질 역대 A매치(국가대항전) 최다 골 기록이다.

만델라와 펠레 - 펠레(오른쪽)가 1995년 만델라 당시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을 만나 웃는 모습. /로이터 연합뉴스

펠레는 1956년부터 1977년까지 선수 생활을 했다. 미국 뉴욕 코스모스에서 뛴 마지막 3시즌을 제외하고 그는 줄곧 브라질 명문 산투스FC 소속이었다. 그는 산투스에 리그 우승을 6번 안겼고, 남미 클럽대항전인 코파 리베르타도레스를 2연패했다. 그는 현역으로 뛰는 동안 공식전에서만 757골을 넣었다. 비공식 경기 등이 있어 정확한 집계는 어려우나, 펠레는 자신이 총 1283골을 넣었다고 말했다.

1999년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펠레를 ‘20세기 최고의 운동선수’로 선정했다. 하지만 그는 현역 시절 최고의 축구 선수에게 주는 상인 발롱도르를 받지 못했다. 과거에는 발롱도르가 유럽 선수들에게만 돌아갔기 때문이다. 이 같은 국적 제한이 폐지된 후 펠레는 2013년 발롱도르 명예상을 받았다. 펠레는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도 나를 기억해줘 감동했다”며 눈물을 훔쳤다. 은퇴 후에는 브라질 체육부 장관을 맡아 선수 권익 보호에 앞장서는 등 브라질 축구 선진화에 힘썼다는 평가를 받았다.

◇”펠레는 이미 불멸의 존재”

그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브라질은 슬픔에 휩싸였다. 브라질 시민들은 거리에서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눈물을 흘렸다. 브라질은 사흘간 국가 애도 기간을 선포했고, 사람들은 ‘우리의 왕 펠레’라고 적힌 대형 인쇄물을 곳곳에 내걸었다.

천국서 만난 두 축구 영웅 - 펠레(오른쪽)가 1995년 아르헨티나의 축구 영웅 디에고 마라도나와 만난 모습. /로이터 뉴스1

전 세계에서 추모도 잇따랐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축구는 다른 스포츠와 달리 세계를 하나로 모은다. 초라한 곳에서 시작한 펠레가 전설에 오른 것은 어떤 일이 가능한지 보여준다”며 유가족을 위로했다. 잔니 인판티노 FIFA 회장은 “그는 오래전에 불멸의 존재가 됐고, 우리와 영원히 함께할 것”이라고 했다.

브라질을 대표하는 스타로, 펠레처럼 등번호 10번을 달고 뛰는 네이마르는 “펠레 이전에 축구는 단순한 스포츠였고, 10번은 하나의 번호에 불과했다”며 “펠레는 축구를 예술로 만들었다”고 애도했다. 프랑스 공격수 킬리안 음바페는 “축구 황제는 우리를 떠났지만, 그의 유산은 절대 잊히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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