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지팡이로 바닥 두드리며 가던 출근길이 반가워진 사연

신순규 시각장애인·BBH 시니어 애널리스트 2022. 12. 31.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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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신순규의 월가에서 온 편지]
오십 넘은 인생에 필요한 것?
돈 아닌, 마음 터놓을 친구들

크리스마스 예배를 드리기 위해 모처럼 온 가족이 교회에 갔다. 나와 아내, 대학 3학년 1학기를 마치고 집에 온 딸 예진이와 고3 아들 데이비드, 그리고 할아버지·할머니까지. 예배가 끝나고 오랜만에 보는 많은 이들과 인사를 하고 대화를 나눈 뒤, 교회 문을 나섰다. 그런데 왜 선물을 건네는 이들은 다 아내에게 주는 걸까? 차 안에서 내가 왜 내게 선물 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느냐며 불평하자, 아내 왈, “그러니까 인간관계를 잘했어야지.”

작년 여름 어느 날이었던 것 같다. 출근하는 꿈을 꿨다. 지하철 문이 열리자, 흰 지팡이로 플랫폼 바닥을 쳤다. 시각장애인이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는 방법이다. 1994년부터 이용했던 월가 역이다. 아주 익숙한 곳, 마치 고향에 온 것 같은 감정이 마음을 들뜨게 했다. 지하철에서 내려 왼쪽으로 돌면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나온다. 첫 계단에 올라서는 순간, 잠이 깼다. “아, 꿈이었네!”

이 꿈에 대한 나의 반응이 사실 놀라웠다. 2020년 3월 9일부터 전일 재택근무를 했다. 출근하는 날이면 3시간 반 정도를 길에 버리고 지냈던 터라, 재택근무가 싫지 않았다. 그런데 왜 출근하는 꿈에서 깨면서 그렇게 큰 실망의 말을 내뱉었을까?

일러스트=한상엽

올해 8월 중순부터 드디어 출근하기 시작했다. 회사에서는 출근 여부를 자발적으로 선택할 수 있도록 정했다. 우선 일주일에 하루만 사무실에 가기로 했다. 아침 일찍 북뉴저지에 있는 집을 떠나 바깥 세상으로 향하는 일상이 다시 시작됐다. 6시25분 기차 시간에 맞춰 아내가 나를 차로 역까지 바래다 준다. 역 문 앞에 정확하게 차를 세워 주는 아내에게 손을 흔들고 돌아서서 더듬지도 않고, 정확하게 문고리를 잡아 문을 연다. 그리고 통근 기차를 한 번 갈아타고 뉴욕시로 들어간다. 그 후 지하철을 이용해 월가로 향한다.

누가 봐도 나는 외향적인 사람이다. 그래서 그랬을까? 첫 출근을 하던 날 뉴욕행 기차 플랫폼에서 새 친구를 만나게 됐다. 우리 분야에서는 누구나 아는 자산운용 기관에서 일하는 S는 한국에서 이민 온 나와 비슷한 1.5세 한국계 미국인이었다. 언제 한 번 만나서 식사하자는 말을 하고 헤어졌는데, 그는 정말 곧 연락해서 나와 점심식사 일정을 잡았다. 그에게 내 책 2권을 선물했고, 그는 바로 책을 다 읽었다고 연락을 줬다. 또 소셜미디어 링크드인에 내 책을 읽고 느낀 것들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 후, 부부 동반으로도 두 번이나 만나 식사를 했다. 10월 초부터 일주일에 이틀 출근을 하기 시작하면서 S를 더 자주 만나곤 한다. 긴 시간을 길거리에 버리고 다니는 생활이 다시 시작되었지만 나는 벌써 오래 갈 친구를 한 명 얻었다.

언젠가 한 동료가 말했듯 나의 외향성 제곱인 EE(E:MBTI 검사에서 외향성을 뜻함) 성격 때문이었을까? 나는 사무실 근무도 새 동료들과 관계를 만드는 기회로 쓰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전 직원 중 약 96%가 재택근무를 했기 때문에 그동안 새로 고용된 동료들과는 직접 만난 적이 없었다. 줌으로 인터뷰하고, 전화로 환영 인사를 나누고, 이메일, 채팅 등을 통해 일을 같이 해왔지만, 한 번도 커피를 같이 마시거나 식사를 하며 개인적인 대화를 해본 적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첫 출근을 하던 날부터 매일 점심과 커피 약속을 만들어갔다. 나와 같이 일하는 애널리스트 동료들과는 점심 식사를, 부서는 다르지만(예를 들어 마케팅부) 함께 일을 해온 직원들과는 커피와 간식을 같이 먹으며 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했다. 원래 우리 회사에는 새 직원의 첫날에 그를 외부 식당에 데리고 나가 식사를 대접하는 풍습이 있었는데, 팬데믹 동안에는 그런 환영을 받은 직원이 아주 드물었을 거라 생각된다. 그래서 나와 같은 팀에 들어온 애널리스트들은 내가 각각 초대해서 점심 식사를 사주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알게 된 지인들 중에 직접 만남을 요청하는 분들과는 만나려고 노력했다. 한 TV 프로그램에서 내가 했던 말, 베이글에는 크림 치즈와 딸기 잼을 둘 다 발라 먹는 거란 말을 기억하신 한 분은 베이글을 사 들고 찾아오셨다. 금융을 공부하는 학생들도 몇 명 만났고, 줌을 통해 대화하기도 했다. 8월에는 한 교회에서 요청한 간증집회를 하기 위해 여섯 시간 비행기를 타고 남캘리포니아에 갔는데, 역시 SNS를 통해 지인이 된 분이 나를 만나기 위해 교회로 찾아오셨다. LG전자에서 가전제품의 접근성을 위해 노력하는 직원들은 아예 미국 출장 중 나를 찾아와 대화를 나눴다. 그 만남이 인연이 되어 지난달 한국에 갔을 때 본사에 초청받아 경영진과의 간담회와 디자이너들을 위한 강연까지 하게 되었다.

사실 이렇게 만나 짧은 시간을 보낸 분들 중 몇 명이나 관계를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유지해 갈 친구가 될까? 나이 50이 넘은 사람이 새로운 친구를 만나게 되는 것은 극히 힘든 일이 아니던가? 하지만 평생 같이 갈 친구는 언제나 우리 일상으로 찾아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 삶을 뒤돌아보면 예고 없이 들이닥친 해프닝으로 인해 소중한 친구를 얻기도 했다. 2003년 여름, 뉴욕시와 근교에 갑자기 정전이 되면서 걸어서 퇴근해야 하는 상황이 생겼다. 그때 같이 걸어준 동료 G는 그 후 나와 16년간 약 2400㎞를 함께 걷는 친구가 되었다. 3년 전 퇴직을 했지만, 아직도 자주 통화하고 가끔 만나기도 한다.

올해 내가 만난 사람들 중 S를 포함해 두 명만이라도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가 된다면 나는 인간관계를 잘한 한 해로 2022년을 기억할 것이다.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점점 살기 어려워져 가는 세상을 잘 견뎌내고 외로워질 수 있는 여생을 의미 있고 즐겁게 보내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우정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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