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종소리
종소리에 관해 생각하게 된 건 이 문장을 읽은 뒤부터였다. 음악 연구자 이희경의 책 <작곡가 강석희와의 대화>에 기록된 강석희의 말이다. “종이 울리면 낮은 소리는 내려가고, 높은 소리는 위로 올라가서 만나거든요. 흔히 소리에는 ‘멸(滅)한다’는 말을 쓰는데, 이 말은 진행형이에요. 우리말로 번역하면 ‘사라진다’인데, 없어진다는 뜻이 아니라 사라진다는 뜻이에요. 계속 사라져가는 거지, 없어지지를 않는다는 거죠. ‘멸’은 한번 울린 소리는 우주에 존재한다는 현대물리학 이론과도 맞는 거예요.” 계속해서 사라져가는 과정 중에 있을 뿐, 우리 귀에는 들리지 않게 되었더라도 소리는 끝끝내 존재할 것이라는 그의 이야기는 유독 기억에 오래 남았다.
내가 종소리를 가장 주의 깊게 듣는 순간은 새해를 맞이할 때다. 12월31일 23시59분59초를 지나, 1월1일 0시0분0초가 되는 찰나에 울려 퍼지기 시작하는 ‘제야의 종소리’를 듣는 것으로 한 해를 시작하는 것이다. 물론 새해를 아주 고요히 맞이할 수도 있다. 달력 한 장을 넘기거나 고심 끝에 고른 새 다이어리를 펼치고, 휴대폰 스크린을 바라보며 숫자들이 한번에 가장 많이 바뀌는 순간을 목격하는 정도로. 하지만 나는 시간이 조용히 흘러가게 내버려두기보다는 그 연속성을 잠시나마 깨뜨려 그 변화를 똑똑히 체험하는 쪽을 택한다.
새해의 시작점부터 서른세 번 울려 퍼지는 그 종소리를 들으며, 우선 그 해에 이루고 싶은 것들을 마음속으로 되뇐다. 대체로 나의 새해 소망은 ‘건강하게 해주세요’ ‘운동을 꾸준히 하게 해주세요’ ‘집 갖게 해주세요’처럼 단순하고도 야망 찬 것이 대부분이라, 대체로 타종이 끝나기 전에 소망 리스트가 끝난다. 그러고 나면 그저 종소리를 생경하게 듣는 시간이 찾아온다. 어떤 소리는 한번 듣고 바로 선명히 기억하거나 입으로 따라부를 수 있으며 그 소리에 대해 쉽게 설명할 수 있지만, 종소리의 경우는 쉽지 않다. 들을 기회가 거의 없어서이기도 하겠지만, 그 복합적인 음향을 낱낱이 기억하기는 꽤 어렵고, 소리를 따라 내기도 어려우며, 뭐라 형언하기도 어렵다. 종소리가 무엇인지 명확히 안다고 믿지만, 누군가 그게 어떤 소리인지 묘사해달라고 하면 어쩐지 말문이 막힐 것 같은 기분으로, 그것이 내뿜는 길고도 넓은 진동을 몸으로 느낀다.
일상 속에서 종소리를 더 자주 듣고 살았다면 아마 그 소리에 대해 더 잘 형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프랑스 사학자 알랭 코르뱅이 쓴 <마을의 종들>에 의하면, 19세기 프랑스 시골에서는 그 마을의 종소리가 들리는 곳까지가 마을의 영역이라고 받아들였다고 한다. 종소리는 때마다 울리며 중요한 시간의 분기점을 알리는 역할을 해왔지만, 공간을 구획해주는 하나의 단위가 되기도 했던 것이다. 옛 프랑스에서 종소리는 시계이자 지도 같은 것이었을 수 있겠지만, 종소리를 일상 속에서 듣지 않고 자랐을뿐더러 새해에만 그렇게 큰 종소리를 듣는 내게 종소리의 의미는 조금 더 특별하다. 나는 그 소리를 한 해라는 긴 시간을 구획하는 거대한 울림이자, 많은 이들의 소망과 염원을 모아주는 뜻깊은 소리로 받아들인다.
새해의 결심은 늘 작심삼일로 끝난다고 생각하지만, 한 해의 끝자락에서 지난 일들을 돌이켜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새해 첫날 단 몇 분 동안 되뇐 말들일 뿐이지만 어떤 소망은 지난 한 해를 지탱하는 힘이 되기도 했고, 작심삼일이 몇 차례 반복되며 아주 희미한 습관으로 자리 잡기도 했다. 종소리에 대해 이야기하며 소리는 조금씩 사라져갈지언정 완전히 없어지지 않는다고 했던 강석희의 말처럼, 종소리를 들으며 품었던 소망도 서서히 흐려질 뿐, 완전히 없어지진 않았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제 곧 제야의 종소리를 들을 때가 다가온다. 그 종소리가 정말로 어딘가에서는 계속해서 존재할 것이라 믿으며, 그와 함께 어떤 소망을 품을지 떠올려본다.
신예슬 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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