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주말] 예전만 못한 망년회 풍경, 살림부터 배우라고 했다

한현우 문화전문기자 2022. 12. 31.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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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림하는 중년 남자

크리스마스이브에 청소와 빨래를 했다. 청소와 빨래를 하고 난 뒤 이발을 하러 갔다가 크리스마스이브임을 알게 됐다. 미용실 주인은 앞치마를 벗고 바닥에 쌓인 머리카락을 쓸고 있었다. 이쪽으로 앉으세요,라고 한 뒤 주인이 덧붙였다. 오늘은 좀 일찍 들어가려고요. 크리스마스이브잖아요.

희미하게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에겐 크리스마스이브에 일찍 귀가할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선물을 기다리는 아이가 있을 수도 있고 가족과 저녁식사 약속이 있을 수도 있다. 왜 일찍 들어가느냐고 묻지는 않았다. 마치 나에게도 머리를 단정히 해야 할 약속이 있다는 듯이.

오늘이 크리스마스이브구나. 거울 속 나에게 속으로 혼잣말을 했다. 바리캉이 뒤통수에서 웅웅 하고 움직였다. 크리스마스이브에 청소하고 빨래하고 머리를 깎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싹둑싹둑 잘려나가고 있었다.

언젠가부터 크리스마스 이브는 아무 날도 아닌 날이 되었다. 개천절 전날이 아무 날도 아닌 것처럼 그저 휴일 전날일 뿐이다. 아이가 어렸을 때는 선물을 준비하고 함께 외식을 했다. 남들이 그러니까 딱히 그러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이제 그럴 일이 없는 데다가 마침 토요일이었기에 청소와 빨래를 했고 머리를 깎은 뒤 집에 돌아와 냉동실에서 밥을 꺼내 데워 먹었다.

연말이라고 저녁 약속이 잦아졌다. 친구들과의 술자리는 예전처럼 활기차지 않다. 더 이상 승진하는 친구는 없고 정체됐거나 퇴직했거나 퇴직을 앞둔 친구들 뿐이다. 어떻게 지내냐, 하는 물음에는 모두들 약속이나 한 듯이 똑같이 대답한다. 그냥 그렇지 뭐.

요즘 재미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는 친구는 없다. 다들 예전 학교 다닐 때 아니면 군에서 휴가 나왔을 때, 또는 사회 초년 때 있었던 일들을 재탕하며 낄낄거린다. 요즘 생활은 그저 그렇기 때문에 별로 할 얘기가 없는 것이다. 마누라 눈치 보는 얘기가 나오니까 다들 말이 많아졌다. 밥도 짓고 청소도 하고 살림을 배우라고 했더니 이제 와서 무슨 살림을 배우냐, 앓느니 죽겠다며 벌컥 성질 내는 놈도 있다. 그러면서도 살림을 왜 배워야 하는지 설명하는 데는 귀를 쫑긋 세운다. 간혹 고개를 끄덕이는 녀석도 있다. 당장은 몰라도 분명히 언젠가 닥칠 일이라고 다들 생각하는 것 같다.

새해 전날에도 청소와 빨래를 할 것이다. 토요일이기 때문이다. 크리스마스이브와는 달리 어묵탕이라도 놓고 소주 한잔할까 싶다. 일 년을 어쨌거나 무탈하게 보냈으니, 그 정도 조촐한 자축은 흉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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