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택근의 묵언] 황희찬 어깨에 ‘생명평화’가 피었듯이
세밑이 얼어붙었다. 지구온난화로 북극의 얼음주머니가 풀린 것일까. 지구가 탈이 난 게 분명하다. 지난 한 해 기후재앙으로 무수한 생명체들이 절멸했다. 종족은 사라지고, 단 한 마리만 남은 새의 마지막 울음을 들어본 적 있는가. 고독과 두려움에 몸서리쳤을, 깃털이 빠진 최후의 둥지를 본 적이 있는가. 상상만으로도 소름이 돋는다.
다시 한 해를 흘려보내야 한다. 추억에는 아직 온기가 남아있건만 시간의 강물은 차갑기만 하다. 우리는 어디쯤에 있는 것인가. 얻은 것은 무엇이고 버린 것은 무엇인가. 지난해를 펼쳐보고 이를 다시 뭉치면 작고 남루하다. 그럼에도 초록별에서 함께 새해를 맞는 이웃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가. 저 언 땅에 생명들이 있기에, 하늘 향해 팔 벌린 겨울나무가 있기에 봄은 찾아올 것이다.
그렇다. 살아있기에 우리는 포기해서는 안 된다.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생명평화’를 얻어 보겠다고 길 위에 있었던 무리가 있었다. 생명평화탁발순례단. “세상의 평화를 원한다면 내가 먼저 평화가 되자.” 맨 앞에 도법 스님이 있었고, 목사, 수녀, 농민, 문인, 활동가 등이 함께 걸었다. 바람이 지리산 골짜기에서 크게 울던 2004년 3월1일, 순례단원들이 노고단에서 하늘에 아뢰었다. “어지러운 세상입니다. 이라크에서 끔찍한 군사폭력이 춤을 추고 있습니다. 인종, 종교, 계급, 성, 나이 등 우리는 스스로가 만든 차별로 말미암아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인간 중심의 세계관으로 만들어낸 문명은 뭇 생명을 고통의 아수라장으로 내몰고 있습니다. … 우리 안에 있는 온갖 편견과 증오와 만나고 우리의 꿈과 절망을 볼 것입니다. 모심과 살림, 섬김과 나눔으로써 생명평화의 새날을 함께 열 것입니다.”
걷고 또 걸었다. 순례는 5년 동안 계속되었다. 온 나라 모든 마을을 찾아가 빌어먹었다. 필자도 주말이면 슬쩍 순례단에 끼어들었다. 길 위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처음에는 모든 사람이 달라보였다. 시간이 지나자 오늘 만난 사람이 어제의 사람이었다. 하지만 다시 보면 저마다 특별한 존재였다. 물으면 답하고, 답하다가 물었다. 그러다보니 물음이 곧 답이었다. 그리고 문득 깨달았다. 내가 존재하는 것은 낱낱의 존재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그래서 오늘 이 순간 살아있음은 모든 것이 관여해서 만들어낸 기적이라는 점을. 길 위에서 만난 수만명에게 감사하며 깨달음을 전했다. 그렇게 생명평화의 씨앗을 심었다. 순례의 성과 가운데 하나가 바로 생명평화 무늬(심벌마크)의 탄생이었다. ‘하늘에 해와 달이 있고, 물 땅 허공에도 생명체가 있다. 삼라만상이 저마다의 개성과 가치를 지니고 있을 곳에 있다. 사람이 이 삼라만상을 제대로 섬긴다면 그대로 생명평화이다.’ 생명평화 무늬는 모든 생명체는 온 우주가 참여하고 서로 관계를 맺어 존재한다는 것을 형상화해 만들었다.
그렇게 탁발순례를 마치고 십수 년이 지났다. 그렇다면 5년 동안 뿌린 생명평화의 씨앗은 이 땅 어디에, 누구의 마음에 남아있을까. 놀랍게도 생명평화의 꽃이 카타르 월드컵 경기장에서 피어났다. 축구강국 포르투갈을 이기는 기적 속에는 또 다른 기적이 있었다. 결승골을 넣고 손흥민 선수를 껴안고 있는 황희찬 선수의 어깻등에 새겨진 생명평화 심벌마크! (경기 후 다음날 언론에 보도된 사진을 보고 눈을 의심했다.) 어떻게 생명평화 심벌마크를 타투했는지 알 수 없지만 황희찬은 평범한 선수가 아니었다. 그의 우람한 어깨에 새겨진 무늬는 생명평화를 부르는 듯 보였다. 그걸 알리기 위해 웃통을 벗어젖혔을 것이라는 상상을 해본다.
그렇다. 오래전에 이 땅에 뿌려진 생명평화의 염원은 이렇듯 다시 피어나고 있다. 지금 지구촌은 18년 전 순례단이 하늘에 아뢴 상황과 흡사하다. 우크라이나에서는 끔찍한 군사폭력이 춤을 추고 있다. 인종, 종교, 계급, 성, 나이 등 우리 스스로가 만든 차별로 여전히 고통받고 있다. 인간 중심의 세계관이 만들어낸 문명은 뭇 생명을 죽음의 아수라장으로 내몰고 있다.
우리는 지구를 떠날 수 없는 지구인들, 한 해 마지막 노을이 내려앉는 시간에 손을 모으자. 그리고 새해에 새 꿈을 꾸자. 함께 꿈꾸면 달라질 것이다. 믿을 것은 우리 자신뿐이다. 우리가 바뀌면 세상이 바뀐다. 작은 바람들을 모아보자. 황희찬의 어깻등에 생명평화 무늬가 펄떡이듯 세상 곳곳에서 생명평화 기운이 움트는 ‘공명(共鳴)의 기적’이 일어나길 소망한다. “세상의 평화를 원한다면 내가 먼저 평화가 되자.”
김택근 시인·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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