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세 꺾인 빅테크 지고, 전통 산업 ‘FAANG 2.0’ 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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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무는 ‘팡’ 시대
올해 들어 지난 28일(현지시각)까지 미국 증시의 메타(페이스북) 주가는 65.8% 내렸다. 이 기간 아마존닷컴과 구글(알파벳A)의 주가 역시 각각 52%, 40.7% 하락했다. 물가 상승세를 잡기 위한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기준금리 인상으로 주가지수 자체가 약세였던 탓도 있지만 이를 고려해도 이들 기업들의 주가 하락폭은 유독 크다. 이를 두고 증권가에서는 팡(FAANG)의 시대가 저물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FAANG은 미국의 빅테크 기업인 메타(페이스북의 F)·애플(A)·아마존닷컴(A)·넷플릭스(N)·구글(G)의 기업명 앞 글자로, 2014년부터 팡 기업의 주가가 급등하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팡 기업들은 코로나19 이후에도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이며 미국 증시를 주름잡았다. 이진우 메리츠증권 투자전략팀장은 “올해 들어 빅테크 기업들의 성장세가 꺾이면서 이제 팡이라는 단어는 회자되지 않는다”며 “미국 빅테크 기업이 증시를 주도하던 모습이 희미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 11일(현지시각) 블룸버그통신도 “주요 빅테크(FAANG)가 미국 증시를 이끌 가능성이 작다는 결론을 내놓았다. 내년 기술주 예상 수익률은 1.8%로 미국 증시 전체의 예상 수익률(2.7%)을 밑돌 것이라 전망했다. 팡의 시대가 저물고 있는 건 탈(脫)세계화 영향이 크다. 그동안 팡 기업들은 지구촌이 하나로 연결되는 세계화 덕에 전 세계 어디에서든 서비스를 선보일 수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블록(분단) 경제권’ 시대로 전환되자 수혜가 끊긴 것이다. 김중한 삼성증권 연구원은 “지정학적 리스크가 부각되고 글로벌 공급망이 해제되는 큰 흐름 속에서 팡 기업들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지고 있다”고 말했다.
국내 증시서도 태양광·조선·방산 등 선방
미국이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금리를 인상하면서 올해 들어 달러가 강세를 보였던 것도 영향을 미쳤다. 정용제 미래에셋증권 연구원은 “글로벌 플랫폼인 구글이나 메타는 미국에서의 매출 비중이 절반이 안 되고 유럽이 약 30%, 나머지는 아시아”라며 “그런데 강달러 속에 특히 유로화 약세가 심해지면서 매출이 줄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들 기업의 3분기 실적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애플을 제외한 메타(-52%), 아마존(-9%), 넷플릭스(-3.5%), 구글(-27%)의 순이익이 모두 전년 동기 대비 하락했다.
빅테크 ‘성장성’의 근거가 약해진 것도 원인이다. 증시에서 빅테크 기업은 기업의 미래 성장 가능성을 주가 상승 동력으로 끌어 와 쓰는데, 이미 너무 많이 당겨와 쓰는 바람에 더 이상 끌어 올 상승 동력이 많지 않다는 얘기다. 김일혁 KB증권 연구원은 “팬데믹 기간 동안 디지털 전환이 급속도로 진행되면서 주가도 큰 폭으로 올랐는데, 팬데믹 시기에 미래 성장 기대감을 주가에 많이 끌어 쓴 만큼 성장 여력이 많이 소진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기술주로서 성장의 한계도 지적된다.
소시에테 제네랄의 앨버트 에드워즈 애널리스트는 “기술주들이 3분기 어닝 시즌에 타격을 받았으나 고통은 이제 시작”이라고 말했다. 에드워즈는 “2001년 나스닥 지수 폭락 당시 얻은 교훈은 경기 침체에 빠지면 성장주 같은 밸류에이션을 가진 경기순환적 기술주가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라며 팡 등 미국 기술주의 성장 한계를 지적했다. 팡과 같은 기업들은 애초에 기존 전통시장을 계속 빼앗으면서 경기에 영향을 받지 않고 구조적 성장을 해왔지만, 지금은 시장에서 영향력이 커지면서 경기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게 됐다는 얘기다.
김일혁 연구원은 “이전 SK텔레콤이 90년대 성장주에서 지금 가치주로 바뀐 것처럼 팡도 그런 단계를 밟아 나가는 과정에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실제 경기 침체 영향으로 디지털 광고 시장이 위축되자 구글·메타·스냅 등 글로벌 빅테크 기업의 실적은 악화됐다. 메타는 전체 매출의 98% 이상이 광고 수익인데 올해 광고 매출이 272억 달러로 전년 동기 대비 4% 감소했고, 구글 광고 수익 성장률도 지난해 대비 5분의 1가량(42.5%→8.4%)으로 쪼그라들었다. 덩치도 커지다보니 경쟁 심화로 이익도 줄었다. 5년 전 팡의 자기자본수익률(ROE)은 60%에서 최근 26%까지 하락했다. 정 연구원은 “지금 물가가 워낙 높아 수요가 없다. 내년 상반기까지 매출이 악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달 들어 월가 투자은행 골드만삭스는 S&P500지수 종목 평균 매출 성장률(13%)을 빅테크 매출 성장률(8%)보다 높게 잡기도 했다. 팡 기업들의 빈자리는 일부 전통 산업이 채우고 있다. 전쟁발 에너지 수급 문제로 인해 에너지·원자력·신재생에너지와 항공·방위 분야 전통 업체의 주가가 강세를 보이고 있다. 이를 두고 미국의 뱅크오브아메리카(BoA) 메릴린치는 지난 3월 ‘팡 2.0’이라고 정의했다. 에너지(Fuels), 항공·방위(Aerospace), 농업(Agriculture), 원자력·신재생에너지(Nuclear), 금·광물(Gold)의 앞 글자를 딴 것이다. 박승진 하나증권 연구원은 “팡 2.0으로 거론되는 에너지, 방산, 농산물 관련 기업들은 뚜렷하게 나타나는 모멘텀(상승 동력)을 갖고 있고, 밸런스(자산 배분) 측면에서도 금리에 대한 민감도가 떨어져 상대적 우위를 계속적으로 가져갈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 블룸버그의 ‘FAANG 2.0’ 지수는 6월 기준 최근 2년간 63%의 상승률을 보이며 기존 팡 기업 수익률보다 2배나 높았다. 주가가 급락한 올해 들어서도 양호한 흐름을 보이고 있다. 팡 2.0의 주요 기업 중 에너지기업인 엑슨모빌과 셰브론 주가는 28일(현지시각) 기준 연초 대비 각각 70.6%, 48.4% 뛰었다. 방산업체인 록히드 마틴과 노스롭 그루만 역시 같은 기간 각각 36% 이상 올랐다. 농업 분야에서는 코르테바 주가가 25% 오르면서 눈길을 끌고 있다. 이들 기업을 추종하는 상장지수펀드(ETF)도 마찬가지다.
에너지기업을 추종하는 ‘에너지 셀렉트 섹터 SPDR’(XLE)는 50.3% 상승했다. 방산업체를 추종하는 ‘아이셰어스 U.S. 에어로스페이스&디펜스(ITA)’와 광산업체에 투자하는 ‘SPDR S&P 메탈&마이닝’(XME) ETF도 각각 6.4%, 7.9% 상승했다. 금과 관련된 ETF는 마이너스 수익률을 기록 중이지만 박 연구원은 “S&P500 지수가 올해 들어 21%가량 빠진 것에 비하면 선방한 셈”이라고 말했다. 그는 “다만 금의 경우 인플레이션 국면이긴 하나 실질금리가 오르는 과정에서 금 가격이 오르기 어렵기 때문에 다른 종목 대비 부진했다”며 “향후 금리 인상 사이클이 막바지에 다다르고 금리 상승 기조가 약화되면 추가 상승 동력이 반영될 것”이라고 말했다.
국내 증시에서도 팡 2.0 관련 기업이 비슷한 행태를 보이고 있다. 올 상반기부터 국내 증시를 이끌어 온 ‘태조 이방원’(태양광·조선·이차전지·방산·원자력)이 그 예다. 29일 기준 태조 이방원 대표 기업의 6개월간 주가 흐름을 보면 2차전지 3대 대장주(삼성SDI·LG에너지솔루션·포스코케미칼)는 평균 13% 가량 올랐고, 방산 분야 대표 기업(LIG넥스원·한화에어로스페이스·현대로템)도 평균 33% 올랐다. 태양광도 기업별 차이가 있지만 한화솔루션이 10%가량 상승했다.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이들의 올 3분기 기준 영업이익 실적도 시장전망치를 10% 이상 상회했다. 한국조선해양(133.2%)과 포스코케미칼(43.82%), LIG넥스원(33.88%), LG에너지솔루션(28.54%), 한화솔루션(27.43%) 등이 대표적이다.
팡 2.0 부상 ‘경제성장 둔화 신호’ 해석도
식료품 가격 지수 예상치도 2020년 대비 2024년 전망치가 92.5→115.9에서 2021년 대비 2024년 전망치가 121.8→134.1로 높아졌고, 더 상승할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다. 지정학적 리스크에 따른 방산 분야도 마찬가지다. 영국 군사정보 분석기관 제인스는 2025년 세계 방위비 예상치를 2조1500억 달러에서 2조2200억 달러로 상향 조정하기도 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팡 2.0의 부상이 곧 세계 경제 성장의 둔화를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김중한 삼성증권 수석연구원은 “일차적으로 에너지 가격이 계속 높게 유지되는 측면이나, 군비 증강과 같은 상황은 전쟁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기 때문에 경제 상황상 좋게 보긴 어렵다”며 “인플레이션으로 기업의 비용 부담은 더 늘고, 소비자들 역시 소비의 질이나 소비 여력이 떨어지고 있다는 건 경기 둔화 신호로 해석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신수민 기자 shin.sum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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