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번은 넘게 봤겠다” 모두 아는 ‘이 절규’의 놀라운 비밀[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에드바르 뭉크 편]

2022. 12. 31. 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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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의 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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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페르메이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본 뒤 관련 책과 영화를 모두 찾아봤습니다. 잘 그린 건 알겠는데 이 그림이 왜 유명한지 궁금했습니다. 그림 한 장에 얽힌 이야기가 그렇게 많은지 몰랐습니다. 즐거웠습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은 달라졌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이 경험을 나누고자 글을 씁니다. 미술사에서 가장 논란이 된 작품, 그래서 가장 혁신적인 작품, 결국에는 가장 유명해진 작품들을 함께 살펴봅니다.
에드바르 뭉크, 절규(일부)

[헤럴드경제=이원율 기자] 아들, 따라오렴. 잘 보살펴줄게.

죽은 어머니였다. 에드바르 뭉크는 눈을 비볐다. 동생아, 같이 가자. 넌 여기가 더 어울려. 어머니는 죽은 누나 소피에로 바뀌었다. 뭉크는 눈을 질끈 감았다. 두 손으로 귀를 꽉 막았다. 다시 눈을 떠보니 해가 지고 있었다. 어머니와 누나의 환영은 어느새 사라졌다. 환청도 더는 들리지 않았다. 뭉크는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현실로 돌아왔다. 늘 보던 산책길이 펼쳐졌다. 함께 걷던 친구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래. 이 정도로 잠깐 스쳐가는 환각쯤은 이제 참을 수 있었다.

아들아. 이때, 죽은 아버지의 혼령이 불쑥 나타났다. 여기에 신(神)이 있다. 모든 진리, 모든 이치가 있다. 너도 와서 함께 보자꾸나. 저를 이제 좀 내버려 두세요! 뭉크는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둔탁한 말투, 끓고 있는 가래…. 세상에서 가장 듣기 싫은 목소리였다. 아들아. 누가 너를 속세에 찌들게 했느냐. 앨런 포의 공포 소설을 다시 읽어줘야겠다. '모르그 가의 살인사건'이 좋겠구나. 아버지, 제발요! 뭉크는 가만히 섰다. 더는 걸어갈 힘조차 없었다. 벽에 기대 스르르 주저앉았다.

에드바르 뭉크, 불안

이때, 아버지의 혼은 온데간데없고 또 현실로 돌아왔다.

마실 나온 사람들의 재잘거림, 길거리 판매상의 고함 따위가 귓가를 때렸다. 눈을 크게 뜨고 하늘을 봤다. 노을이 물밀듯 밀려왔다. 하늘은 핏빛이었다. 구름도 살점에 겨우 달라붙은 핏물처럼 붉은색이었다. 저 멀리서 낯익은 건물이 보였다. 살아있는 여동생 라우라가 있는 정신병원이었다. 순간 역한 비린내, 알 수 없는 짐승 소리가 몸을 흔들었다. 그러고 보니 이 길 바로 밑이 도살장이었다.

괜찮아, 괜찮아. 뭉크는 자신을 다독였다. 너 따위가 날 좋아해? 스스로를 위로하던 그 순간, 이번에는 첫사랑 헤이베르그 부인의 환영이 구름 틈으로 불쑥 피어났다. 내가 너랑 결혼할 거로 생각했어? 주제도 모르는 인간. 두 번째 사랑 유엘의 환영도 물결처럼 일렁였다. 연달아 모습을 보인 둘은 뭉크를 비곗덩어리 보듯 쳐다봤다. 이내 흐릿해졌다. 이 환영들에서 벗어나고 싶어요. 누가 좀 도와줘요! 제발 살려줘요!….

에드바르 뭉크, Self-Portrait with Cigarette

"이봐, 에디. 갑자기 왜 그래?"

뭉크는 숨을 크게 내쉬었다. 막 물 밖으로 나온 사람처럼 헐떡였다. 주위를 둘러봤다. 늘 걷던 다리 위였다. "어디 불편해?" 그보다 두어 걸음 앞서 걷던 친구가 등을 다독였다. "잠깐 현기증이 났어. 괜찮아. 괜찮아…." "이 사람아. 갑자기 주저앉고는 머리를 싸매서 놀랐잖아." 뭉크는 몸을 덜덜 떨었다. 악령은 더 이상 나오지 않았지만, 두려움은 쉽게 떠나질 않았다.

뭉크는 이날을 죽을 때까지 기억한다. 몇 년 후 그는 이를 그림으로 남긴다. 뭉크는 온갖 악령에게 둘러싸인 그날 일기장에 이렇게 썼다. "…불타는 구름이 짙푸른 도시 위로 피 묻은 칼처럼 드리워져 있었다. 친구들은 무심하게 걸었으나 나는 그 자리에서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었다. 죽을 것만 같은 공포가 느껴졌다. 자연을 꿰뚫는 거대하고 끝없는 절규가 들리는 듯했다."

아버지의 광기 어린 눈을 보다
에드바르 뭉크, 죽음과 아이

"얘들아. 책 읽으러 오렴."

"누나, 그냥 안 가면 안 돼? 너무 무서워서 그래." 어린 뭉크가 누나 소피에의 옷깃을 잡고 애원했다. "누나가 옆에 붙어있을게. 꿈에서도 꼭 지켜줄게." 소피에는 그런 뭉크를 다독였다. "어서 안 오고 뭐 할까? 마귀가 가지 말라고 유혹하니?" "아버지, 지금 가요!" 소피에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소피에는 뭉크를 끌고 가듯 이끌었다. "오늘 잠들기 전 아빠가 읽을 책은 앨런 포의 '검은 고양이'야. 나쁜 짓을 하면 벌을 받는다는 교훈이야." 아버지가 웃었다. 동그랗게 뜬 눈에는 흰자위가 가득했다. 광기가 느껴졌다.

"너희들은." 아버지의 말에 5남매는 침을 꼴깍 삼켰다. "매번 신의 뜻을 어기는 꼬마 악마들이잖니. 이런 충격요법을 주지 않으면 나중에 좋은 곳에 갈 수 없어요." 아버지는 흥얼댔다. 책을 탁 펼쳤다. 소피에가 이불 속에서 뭉크의 손을 잡았다. 그런 뭉크는 여동생 라우라의 손을 꽉 쥐었다. 라우라는 온몸을 떠는 중이었다. 아버지 앞에선 별 내색이 없던 라우라도 사실은 공포에 질려 있었다. 뭉크는 아버지의 기행을 영영 잊지 못한다. 귀신에 대한 공포,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평생 그를 쫓아다니게 된다.

에드바르 뭉크, 재

1868년. 군의관으로 일하던 아버지는 아내이자 5남매의 어머니를 잃었다.

고작 다섯 살이었던 뭉크도 어머니의 죽음을 봤다. 피 섞인 기침을 토해내던 어머니는 그렇게 영영 눈을 감았다. 아버지는 넋이 나갔다. 그날부터 신앙의 힘에 의존했다. 애석하게도 광신도가 되고 만다. 아버지는 때때로 자식들을 다 불러 모았다. 환자들의 피가 묻은 수술복을 갈아입지도 않고선 다짜고짜 소리쳤다. 줄 세워 뺨을 갈기고, 벨트나 몽둥이 따위로 엉덩이를 후려쳤다. 아버지가 기도 중에 너희 어머니를 보고 왔다, 너희들이 나쁜 짓을 많이 해서 울고 있었다…. 이런 식의 훈계를 이어갔다.

"마귀를 쫓으려면 더 무서운 이야기를 들려줄 수밖에 없구나. 다들 오늘 밤에 먼저 잠들지 말거라." 뭉크는 뜨거워진 두 볼을 감싼 채 공포에 떨었다. 맨 앞에 선 소피에, 저마다 방식으로 울음을 참고 있는 동생들도 두려움에 몸을 잔뜩 움츠렸다. 뭉크는 어른이 된 뒤 아버지에 대해 "신경질적이고 강박적이었다. 나는 인류의 가장 두려운 두 가지를 (아버지로부터)물려받았는데, 그것은 병약함과 정신병이었다"고 술회했다.

에드바르 뭉크, 병든 아이

1887년. 뭉크는 어머니보다 더 어머니 같던 소피에의 죽음도 지켜봤다.

사인은 어머니와 같은 폐결핵이었다. 뭉크는 이날의 악몽 또한 마지막 순간까지 안고 간다. 소피에가 떠나는 건 자신의 일부분이 영영 떨어져 나가는 일과 같은 것이었다. 아버지는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아버지의 학대를 온몸으로 받아내던 여동생 라우라는 혼자 웃고, 울고, 침을 흘렸다. 그렇게 서서히 미쳐버렸다. 나머지 두 동생은 실어증에 걸린 듯 말을 잃었다.

뭉크는 두려웠다. 어머니도 가고, 하나 뿐인 누나도 떠났다. 이제 자기 차례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원래 병약했던 그는 죽음의 그림자에 사로잡힌다. 뭉크는 그쯤부터 한밤중에 자다가 덜컥 깨는 버릇을 갖게 됐다. 자신이 이미 죽은 게 아닐까 두려워하며 주위를 둘러봤다. 나도 모르는 새, 지옥에 온 게 아닐까 헷갈리곤 했다. 훗날 뭉크는 이같이 회고했다. "내가 태어난 순간부터 내 곁에는 공포와 슬픔과 죽음의 천사가 늘 있었다. 봄날의 햇살 속에서도, 여름날의 찬란한 햇빛 속에서도 그들은 나를 따라다녔다."

고흐作 절절함에 탄복하다
에드바르 뭉크, 멜랑콜리

그런 뭉크에게 예술은 구명조끼였다.

잠깐 넋 놓으면 곧장 죽음의 소용돌이로 빨려 들어가는 그를 거듭 수면 위로 띄운 존재였다. 1863년. 노르웨이 뢰텐에서 태어난 뭉크는 아버지의 직업 특성상 나라 곳곳을 전전했다. 그러다가 1879년. 오슬로의 기술대학에 갔다. 엔지니어 공부를 시작했다. 문제는 건강이었다. 뭉크의 체력은 공학, 화학, 수학, 물리학을 두루 소화할 수 없었다. 뭉크는 매번 몸져누웠다. 진도를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다. 우울감은 커지고 자존감은 바닥을 쳤다. 그는 수시로 죽음을 생각했다.

어리바리한데 드로잉 하나는 봐줄 만한 놈. 침대에서 식은땀을 흘려대던 뭉크는 불현듯 어릴 적 동네 사람들의 말을 떠올렸다. 어린 시절 그가 별 낙서처럼 그린 그림을 두고서 한 평가였다. 뭉크는 신의 계시를 받은 양 진로를 바꿨다. 살기 위해 길을 갈아탔다. 1880년. 운과 실력이 맞물려 왕립 드로잉아카데미에 입학했다. 이상하게 그림을 그릴 땐 아픔을 참을 수 있었다. 악몽도 밀어낼 수 있었다.

에드바르 뭉크, 한스 예거의 초상

"삶은 고통이야."

뭉크는 열 살 연상인 한스 예거의 말에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둠과 친숙한 뭉크는 정식 미술교육을 받은 후부터는 그 시대 가장 과격한 예술가들과 교류했다. 뭉크는 특히 허무주의자이자 무정부주의자인 예거가 이끄는 보헤미안 집단에 열정적으로 동참했다. 뭉크는 이들의 격정적인 교리를 따랐다. 살아가는 것만이 아름다운 건 아니다, 어쩌면 그 반대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과격하고 근거 없는 가르침에 눈물이 핑 돌만큼 감명받았다.

쓰린 상처를 한 아름 이고 있는 뭉크는 예거의 퇴폐주의에 평생 영향을 받는다. 시간이 꽤 흐른 뒤에는 예거와 거리를 두지만, 예거가 찬양하다시피한 좌절과 절망, 슬픔과 고통의 그림은 붓을 놓는 그날까지 달고 다니게 된다.

빈센트 반 고흐, 에텐 정원의 추억

그 시절 뭉크가 뿜고 있는 '다크함'은 독보적이었다.

뭉크는 화가 프리츠 탈로의 눈에 들어왔다. 젊은 작가들을 후원하던 탈로는 이 풋내기 화가도 후원키로 했다. 뭉크는 프랑스 파리로 갔다. 3주간의 유학이었다. 뭉크는 이 예술의 도시에서 잊지 못할 경험을 했다. 고흐, 로트레크, 고갱 등 불우했던, 게다가 어딘가 확실히 아팠던 사람들의 그림을 보고선 감격에 바로 설 수조차 없었다. 특히 고흐는 충격적이었다. 고흐는 자신의 망가진 내면을 솔직하게 표현했다. 고흐의 그림은 보기에 좋지 않았다. 불편하고, 음울했다. 그런데도 표현할 수 없는 감동과 절절함이 밀려왔다.

뭉크는 고흐를 닮기로 했다. 그도 자신의 비루한 삶과 감정을 작품 주제로 전면에 내걸었다. 뭉크는 이쯤 '병든 아이'(1885~1886)를 그렸다. 병든 소녀가 침대에서 최후를 기다리는 장면을 담은 그림이었다. 삶보다도 죽음의 색이 짙은 작품이었다. 그가 어머니와 같은 폐결핵으로 죽어가던 누나 소피에를 떠올리며 완성한 것이었다. 그는 이 그림과 똑같은 작품을 평생 계속 만들게 된다. 마치 훈련하듯 자신의 가장 큰 불행과 끊임없이 마주하게 된다. 뭉크는 언젠가 이렇게 말했다. "더 이상 사람들이 독서하고 뜨개질하는 여인을 그려선 안 된다. 고통받고 있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그려야 한다."

‘뭉크 스캔들’, 한 도시를 흔들다
에드바르 뭉크, 사랑과 고통

"이건 다 악령의 사주를 받아 그린 그림들이에요!"

1892년. 뭉크가 독일 베를린 미술협회 초청으로 이 도시에서 개인전을 열었을 때 한 방문객이 소리쳤다. 그의 그림 55점이 걸린 전시장은 난장판이 됐다. 당시 독일은 보불전쟁에서 프랑스를 꺾었다. 승리의 열기는 뜨거웠다. 모두가 맥주에 취해 기뻐했다. 그런 분위기 속 뭉크의 핏빛 그림은 찬물이자 잿가루였다. 특히 그의 그림 '사랑과 고통'은 저주처럼 느껴졌다. 빨간 머리의 긴 여자가 한 남자를 보듬듯, 사실은 물어뜯듯 감싸 안는 작품이었다. 보수적인 언론과 평론가들은 "소름이 끼친다"고 표현했다. 성과 죽음, 폭력의 이미지를 끌어모아 지옥의 형상을 그렸다고 비난했다. 한 신문은 "뭉크의 그림은 위험하다. 불길한 기운에 전염될지 모르니 조심해야 한다"는 경고성 글도 실었다.

미술협회는 긴급회의를 개최했다. 뭉크의 전시를 이어갈지가 주제였다. 사실 분위기는 일방적이었다. 뭉크의 개인전은 결국 여드레 만에 막을 내렸다. 이는 후에 '뭉크 스캔들'(Munch Affair)로 불린다. 뭉크는 황당했다. 자기들이 먼저 초청하고 판을 깔아줄 땐 언제고, 언론 반응이 좋지 않으니 입을 싹 씻었다. 그러고는 뭉크 앞에 모든 책임의 보따리를 풀었다. 뭉크는 '흡혈귀 화가', '악마의 하수인' 등 온갖 찝찝한 별명을 얻었다.

에드바르 뭉크, 생의 춤

그런데, 뭉크는 이 일로 인해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마주했다.

뭉크는 유명해졌다. 그도 당황스러울 만큼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매번 죽상을 짓는 말라깽이 화가가 한 도시를 흔들었다는 말이 퍼졌다. 뭉크의 추종자도 생겼다. 독일 내 진보적인 젊은 예술가들이 그의 편에 섰다. 예술이란 절망과 공포도 다뤄야 하는 법이라며 주먹을 흔들었다. 독일 예술계는 뭉크를 두고 옹호 진영과 비토(veto·거부) 진영으로 쩍 갈라질 만큼 후폭풍을 맞았다. 뭉크의 명성은 그의 고향 노르웨이, 예술의 범람지 프랑스까지 닿았다.

에드바르 뭉크, 절규

어리둥절하던 뭉크는 이 상황을 이용하기로 했다. 그는 "내가 바로 그 추악한 그림을 그린 인간이오!"라며 자신을 홍보했다. 자신감에 찬 뭉크는 그 이듬해 들어 인류사에 길이 남을 그림을 그린다. '절규'다. 친구와 노르웨이의 한 시골 마을에서 산책을 하던 중 겪은 경험으로 만든 작품이다. 온갖 악령들에게 시달린 그날의 악몽을 한껏 흩뿌렸다. 그가 평생 안고 온 모든 불행을 쏟아부었다. 절규는 그저 음침하다고 비난하기엔 너무나도 충격적이었다. 기괴하다고 손가락질하기엔 너무나도 예술적이었다. 이제 막 30대에 접어든 뭉크는 우여곡절 끝에 화가로 성공한다. 그는 죽을 때까지 유명인으로 인기를 이어간다.

실패, 또 실패한 사랑…이성이 두려워지다
에드바르 뭉크, 질투

1902년 여름의 어느 날 밤.

오슬로의 해안가에서 숨죽여 살고 있던 뭉크는 지인의 다급한 말을 듣고 동네 한구석에 있는 집으로 허겁지겁 내달렸다. "라르센!" 뭉크는 소리치며 문을 쾅쾅 내리쳤다. 문이 열렸다. 그의 세 번째 연인이었던 툴라 라르센이 권총을 들고 서 있었다. 그녀의 매력적인 두 눈은 붉게 충혈됐다. 윤기 나던 갈색 머리는 산발이었고, 잘 다려입던 옷도 꼬깃꼬깃했다. "내가 여기서 죽는다고 하니 겁이 나던가요?" 라르센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당신을 못 찾을 줄 알았지요? 도망치면 괜찮을 줄 알았나 봐요." 라르센은 뭉크에게 한 걸음씩 다가갔다. "나랑 결혼할 수 없어요? 내가 이렇게까지 하는데도?" 그녀는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라르센. 제발…." 뭉크는 라르센이 건넨 최후의 청혼도 거절했다. 라르센은 여전히 권총을 쥐고 있었다. 그녀는 권총의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었다.

에드바르 뭉크, 지옥에서의 자화상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뭉크는 4년 전인 1898년. 라르센과 처음 마주했다. 꽤 유명해진 화가였던 뭉크와 와인 도매상 상속녀였던 라르센은 그날부터 꼭 붙어 다녔다. 29살의 라르센은 매력적인 외모와 해박한 예술 지식을 갖춰 인기가 많았다. 뭉크는 그런 라르센의 재력과 평판을 발판 삼아 상류 사회에 손쉽게 진입했다. 둘의 관계는 원만했다. 이제 곧 함께 가정을 꾸릴 것 같았다.

문제는 뭉크였다. 뭉크는 라르센에게 '결혼'이란 말만 들으면 발작했다. 광기 어린 아버지의 학대가 떠올랐다. 병든 어머니의 공허한 두 눈이 생각났다. 줄줄이 죽고 정신을 놓아가는 형제들이 머릿속에서 불쑥 나타났다. 그에게 결혼은 재앙의 씨앗이었다. 라르센도 차츰 이성을 잃었다. 그런 뭉크에게 더더욱 집착했다. 뭉크가 도망치면 끝까지 쫓아갔다.

에드바르 뭉크, 마돈나

사실 뭉크는 사랑이란 감정 자체를 믿지 않았다.

시간을 거슬러 1885년. 스무 살의 풋내기 뭉크는 크로아티아 사교계 유명인사인 헤이베르그 부인을 사랑하게 됐다. 순진했던 뭉크는 그녀가 유부녀란 점도 개의치 않았다. 팜므파탈 기질을 가진 그녀의 윙크만 받으면 세상 모든 게 녹아내리는 듯했다. 뭉크는 헤이베르그에게 순정을 바쳤다. 중독과도 같은 강렬한 경험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촌스러운 뭉크만을 불장난 상대로 두기에는 너무나 자유로웠다. 뭉크는 끝없는 의심과 질투로 혼이 쏙 빠졌다. 그녀는 결국 다른 남자를 찾아 떠났다. 뭉크는 실의에 빠졌다. 몸도, 마음도 쪼그라들었다. 뭉크가 이 시기에 그린 게 그 문제작 '사랑과 고통'이었다.

한동안 정신을 못 차린 뭉크는 베를린에서 또다시 사랑을 하게 된다. 소꿉친구였던 다그니 유엘이었다. 행복은 잠시였다. 유엘은 뭉크의 동료 화가 스타니스와프 프시비셰프스키를 더 사랑했다. 끝내 그녀도 떠나갔다. 1893년. 뭉크는 이 두 사람의 결혼 소식까지 듣고 만다. 그는 인사불성이 될 만큼 술을 마셨다. 술잔을 바닥에 내던지고 엉엉 울었다. 뭉크는 이때 '마돈나'를 그렸다. 그는 다짐했다. 앞으로 사랑이란 감정에 놀아나지 않겠다, 평생 결혼 따위는 생각도 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에드바르 뭉크, 마라의 죽음

뭉크는 자신과 한 약속을 지켜왔다.

매력이 철철 흐르던 라르센이라고 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라르센. 내 과거를 다 말하지 않았나. 나를 이해해줄 수 없을까." "안 돼요? 절대로?" 뭉크는 두 손을 라르센의 두 어깨에 댔다. 살짝 힘을 줘 밀어내려고 할 때… 탕! 뭉크는 극심한 고통을 느꼈다. 왼손에 불덩어리가 떨어진 듯 아팠다. 라르센의 권총 속 총알이 뭉크의 왼손 가운뎃손가락을 관통했다. 뼈가 산산조각났다.

뭉크만큼 라르센도 놀란 것 같았다. "아니, 내가 이러려고 그런 건…." 라르센은 문 쪽으로 물러났다. 겁에 질린 그녀는 그대로 도망쳤다. 얼마 뒤 뭉크는 라르센이 웬 듣도보도 못한 못한 남자와 교제 중이라는 말을 들었다. 뭉크는 이제 여자 자체를 경멸하게 된다. 그에게 여자는 흡혈귀 그 자체였다. 뭉크는 평생 왼손에 장갑을 끼고 다닌다. 이쯤 그가 그린 그림이 '마라의 죽음'이었다. 침대에 누워있는 남자는 마라인 동시에 뭉크였다. 침대 옆에 나체의 몸으로 당당하게 서 있는 여자는 살인녀인 동시에 라르센이었다.

끈질긴 불행, 더 끈질긴 생명력
에드바르 뭉크, Self-Portrait. Between the Clock and the Bed

대부분의 유명 화가와 달리, 뭉크는 살아있을 때 큰 명성을 얻었다.

돈도 많이 벌었다. 여유도 찾았다. 그런데도 뭉크의 그림은 어두웠다. 밝게 그리려고 해도 그럴 수 없는 경지에 다다랐다. 뭉크는 때로는 신의 멱살을 쥐고 싶었다. 더는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니 이제 고난도 그만 내리라고 외치고 싶었다. 뭉크는 라르센과의 그 일 이후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 휴양지를 돌면서 몸과 마음의 안정을 찾으려고 했다.

하지만 운명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살고 있는 뭉크는 반백 살 무렵에 스페인 독감에 걸렸다. 당시 희생자가 5000만명으로 추정되는 최악의 전염병에 걸린 그는 정말 오늘내일하는 사람처럼 신음했다. 그런데 결국 살았다. 최악의 불행만큼 끈질긴 생명력이었다. 그 시절 뭉크는 자신만의 생존 수칙을 만들었다. ▷발에 물 적시지 않기 ▷화초 가꾸지 않기 ▷장례식장 가지 않기 등이었다.

에드바르 뭉크, 키스

1909년, 뭉크는 오슬로 연안의 크라게뢰에 집과 작업실을 두고 홀로 생활했다.

그는 오직 그림만 그렸다. 신과 세상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도록 수염을 덥수룩하게 길렀다. 누군가를 봐야 할 땐 밀폐된 공간에서 일대일로만 만났다. 1926년에 여동생 라우라가 죽었다. 정신병을 앓은 그녀는 끝내 스러졌다. 뭉크는 그 장례식에 도저히 참석할 수 없었다.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는 나무 뒤에 숨어 조용히 지켜봤다. 눈물을 집어삼켰다. 그래도 37년 전 아버지가 죽었을 때처럼 극단적 선택을 고민하지는 않았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건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 뭉크의 정신은 니체의 이 말처럼 단단해진 상태였다. 1933년, 70살 생일을 맞은 뭉크는 노르웨이 정부로부터 성 올라프 대십자 훈장을 받았다. 이듬해에는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령했다. 그는 명실상부 '노르웨이의 지성'이었다. 독일 나치 정부는 그런 뭉크를 포섭하기 위해 공들였다. 뭉크는 거듭 거절했다. 1937년. 분노에 찬 나치의 선동가 괴벨스는 뭉크에게 태도를 바꿔 보복을 자행했다. "그림이 너무 야하다!"며 그에게 퇴폐 미술가라는 낙인을 찍었다. 뭉크는 개의치 않았다. 그는 이쯤 거의 현자가 돼 있었다.

에드바르 뭉크, 여름 밤

뭉크는 1944년 1월23일 오슬로 근처의 작은 집에서 외롭게 죽음을 맞았다.

사흘에 한 번꼴로 쓰러지던 그는 어쩌다 보니 80여년을 살았다. 당시 유럽인의 평균 수명은 50살 정도였다. 쏟아지는 불행에 달관한 결과였다. 뭉크가 죽을 때 쥐고 있는 책은 도스토옙스키의 '악령'이었다.

뭉크는 죽은 뒤 인류에 큰 선물을 남겼다. 그의 작업실에서 유화와 석판화, 실크스크린 등 2만여점 작품이 쏟아진 것이다. 나치의 눈을 피해 숨겨둔 명작들이었다. 아내도, 아이도 없는 뭉크는 자기 그림을 자식처럼 여겼다. 하나가 팔리면 어떻게든 똑같은 것을 또 만들었다. 그렇게 해 성실하게 쌓아둔 것이었다. 뭉크는 오슬로에 모든 작품을 주겠다는 유언까지 남겨뒀다. 그의 그림은 조건 없이 양도됐다. 1963년, 오슬로는 이를 토대로 뭉크 미술관을 열게 된다.

〈후암동 미술관 이론 편 읽는 순서〉

1)천사가 이렇게까지 운다고? 무섭게 왜 그래[후암동 미술관-조토 편] - 르네상스 선구자(2022. 7. 2.)

2)뻥 아냐, 600년전인데 이 정도 ‘입체 그림’ 있었다[후암동 미술관-마사초 편] - 원근법 선구자(2022. 8. 27.)

3)세계서 가장 유명한 이 ‘레이저 눈빛’, 그것은 사랑?[후암동 미술관-얀 반 에이크 편] - 유화 선구자 (2022.5.21.)

4)‘레드벨벳’도 춤추게 한 이 화가의 정체…"악마의 아들? 나 원 참" [후암동 미술관-보스 편] - 초현실주의 선구자 (2022.5.28.)

5)아리따운 금발 여인, 외간남자 목을 베고 있는거야?[후암동 미술관-카라바조 편] - 바로크 선구자 (2022.6.11.)

6)아름다운 여인, 끌어안고 난리난 옆 커플이 부러워[후암동 미술관-와토 편] - 로코코 선구자(2022.10.8.)

7)맨몸 여인들, 전쟁 뛰어들어 “그만!” 사자후…싸움 막았다[후암동 미술관-다비드 편] - 신고전주의 선구자 (2022.10.15.)

8)표류 D+13, 왜 몰랐지? 뗏목 위 널린 게 먹을건데[후암동 미술관-테오도르 제리코 편] - 낭만주의 선구자 (2022.5.14.)

9)“천사요? 데려오면 그려드리죠” 이놈의 똥고집[후암동 미술관-귀스타브 쿠르베 편] - 사실주의 선구자 (2022.5.7.)

10)“관상가 양반 아니었어?” 조선의 ‘얼굴’, 몰랐던 사실[후암동 미술관-윤두서 편] - 사실주의 특별 편 (2022. 11. 19.)

11)벌거벗은 이 여자, 뭐 때문에 빤히 쳐다보나[후암동 미술관-에두아르 마네 편] - 인상주의 선구자(2022. 4. 23.)

12)“못 그렸는데 폼만 잡아” 욕먹던 이 그림, 3300억이요? [후암동 미술관-클로드 모네 편] - 인상주의 선구자⑵ (2022.4.30.)

13)‘점투성이’ 수상한 커플 정체는? [후암동 미술관-조르주 쇠라 편] - 신인상주의 선구자 (2022. 6. 25.)

14)반 고흐 최애작, 별밤·해바라기 아닌 ‘이 사람들’ [후암동 미술관-빈센트 반 고흐 편] - 표현주의 선구자 (2022.6.4.)

15)이 ‘사과’ 때문에 세상이 뒤집혔다, 도대체 왜?[후암동 미술관-폴 세잔 편] - 근대 회화 선구자(2022. 7.9.)

16)‘생각하는 사람’ 진짜 정체, 남모를 사정도 있었다[후암동 미술관-오귀스트 로댕 편] - 근대 조각 선구자 (2022. 10. 22.)

17)화끈한 키스, ‘이 여성’ 사르르 녹아내리다[후암동 미술관-구스타프 클림트 편] - 분리파 선구자 (2022. 8. 13.)

18)나체 여인, 어쩌다 사자 득실대는 정글 한복판에[후암동 미술관-앙리 루소 편] - 근대 초현실주의 선구자 (2022. 7. 30.)

19)헐크색 피부 갖게 된 ‘이 여성’…이 놈의 ‘남편’ 때문에[후암동 미술관-앙리 마티스 편] - 야수주의 선구자 (2022. 7. 16.)

20)잘생긴 법학 교수님, ‘이것’ 그렸더니 미술계 '발칵'[후암동 미술관-바실리 칸딘스키 편] - 추상회화 선구자 (2022.7. 23.)

21)“이건 나도 그리겠다!” 1순위 그림, 그 놀라운 비밀[후암동 미술관-몬드리안 편] - 추상회화 선구자⑵ (2022. 8. 6.)

22)스파게티 면발? 1315억에 팔린 그림, 충격적 이유[후암동 미술관-잭슨 폴록 편] - 액션페인팅 선구자 (2022. 10. 29.)

23)몸 좋은 보디빌더, 거대 막대사탕 들고 ‘의문의 포즈’[후암동 미술관-리처드 해밀턴 편] - 팝아트 선구자 (2022.11.12.)

24)“동양서 ‘테러리스트’가 왔다” 피아노 다 때려부쉈다[후암동 미술관-백남준 편] - 비디오 아트 선구자 (2022.11.26.)

〈후암동 미술관 인물 편 읽는 순서〉

1)미녀만 보면 그리려고 안달났다, 왜 그랬나 보니[후암동 미술관-오귀스트 르누아르 편] - 행복을 그린 화가 (2022. 12. 24.)

2)“고갱 그놈, 도대체 왜 그래?” 악마인지 ‘악마의 재능’인지[후암동 미술관-폴 고갱 편] - 고귀한 야만인 (2022. 12. 3.)

3)“백번은 넘게 봤겠다” 모두 아는 ‘이 절규’의 놀라운 비밀[후암동 미술관-에드바르 뭉크 편] - 노르웨이의 현자 (2022. 12. 31.)

4)“이놈의 짧은 다리 때문에” 카바레 스타의 영광과 몰락[후암동 미술관-툴루즈 로트레크 편] - 작은 거인 (2022. 12. 17.)

5)눈동자 없는 기괴한 여자 그림, 알고 보니[후암동 미술관-모딜리아니 편] - 파리의 귀공자 (2022. 12. 10.)

6)“로댕 아이를 뱄다” 폭탄선언 여성, 30년 수용소에 갇혔다[후암동 미술관-카미유 클로델 편] - 천재와 맞선 천재 (2022. 11. 5.)

7)당신은 모르실거야, 키스하는 두 사람 왜 이 꼴인지[후암동 미술관-르네 마그리트 편] - ‘진짜’ 괴짜 (2022. 9. 3.)

8)피카소도 ‘이 그림’에 “대박!” 감탄, 각성했다는데[후암동 미술관-피카소·마티스 편] - 영원한 라이벌 (2022. 9. 10.)

9)권총도 채찍도 버텼는데, ‘이 남자’ 행동에 무너졌다[후암동 미술관-마리나 아브라모비치 편] - 우아한 전사 (2022. 8. 20.)

〈후암동 미술관 현장 편 읽는 순서〉

1)이건희 컬렉션, 이 ‘다섯 작품’ 놓치지 마시라[후암동 미술관-‘어느 수집가의 초대’ 출장 편] - 전시 특집 (2022. 6. 18.)

2)알코올 중독 ‘이 남자’, ‘파리’에 미치자 놀라운 일 터졌다[후암동 미술관-몽마르트 언덕 편] - 동행자 : 모리스 위트릴로 (2022. 9. 17.)

3)고흐 “슬픔은 왜 나한테만” 펑펑 울었다, 고작 2평 다락방에서[후암동 미술관-오베르 편] - 동행자 : 빈센트 반 고흐 (2022 9. 24.)

4)모네 “앞이 안 보여도 상관없어”…백내장도 못 막은 그의 ‘최후작’[후암동 미술관-지베르니 편] - 동행자 : 클로드 모네 (2022. 10.1.)

yul@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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