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 최초 매출 4000억 돌파, 연말 뮤지컬 대전 승자는

유주현 2022. 12. 31. 0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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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연시 뮤지컬 전쟁
연말 뮤지컬 전쟁이 뜨겁다. 공연예술통합전산망에 따르면 올해 국내 뮤지컬 시장은 사상 최초로 매출액 4000억원을 돌파할 예정이다. 최근 한 달간 전체 공연시장 매출 약 789억원 중 뮤지컬 매출이 약 557억원으로, 무려 70.6%의 비중을 차지한다. 공연장에 가면 ‘팬데믹 보복소비’를 실감한다. 최고가 15만원이던 VIP석이 16~18만원까지 오르는 등 인플레 추세에도 빈 좌석이 없다. 무료 초대나 할인 판매도 종적을 감췄다. 내년 1월 글로벌 제작진을 동원한 대형 창작뮤지컬 ‘베토벤’의 박효신, 3월 13년 만의 한국어 공연을 올리는 ‘오페라의 유령’의 조승우 등 빅스타들의 가세가 예고되어 있어 당분간 전쟁은 더 치열해질 전망이다. 최근 막을 올린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물랑루즈!’ ‘영웅’ 3파전도 흥미롭다. 세 편 모두 영화와 시너지를 내고 있어서다.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사진 쇼노트]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헤드윅’ ‘그레이트 코멧’ 등 참신한 작품을 들여와 뮤지컬계에 새바람을 일으켜온 제작사 쇼노트가 무려 1957년 작인 브로드웨이 고전 뮤지컬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를 새로 제작해 눈길을 끈다. 2007년 이후 15년 만의 한국 공연인데, 올해 초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첫 뮤지컬 영화로도 개봉돼 새삼 핫해졌다.

제작비 1억 달러(약 1274억원)를 들인 스필버그 영화는 골든 글로브 작품상을 비롯한 각종 수상에도 불구하고 흥행은 저조했지만, 뮤지컬은 원조의 저력을 과시하고 있다. 요즘 익숙한 뮤지컬처럼 음악과 무용이 이야기를 위해 봉사하는 게 아니라 각 장르가 그 자체로 예술적 존재감을 주장한다. 그도 그럴 것이 창작진이 남다르다. 20세기 미국 음악을 대표하는 작곡가 레너드 번스타인과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살아있는 전설 스티븐 손드하임, ‘미국 발레의 아버지’ 조지 발란신의 후계자 제롬 로빈스 등 천재 예술가들의 불꽃 튀는 만남이 빚어낸 20세기 미국 공연예술의 정수인 것이다.

고전 중의 고전, ‘로미오와 줄리엣’을 각색했으니 스토리는 뻔하다. 1950년대 뉴욕, 폴란드 이민자 갱단인 제트파와 푸에르토리코 이민자 갱단인 샤크파 사이 세력 다툼 속에서 싹트는 토니와 마리아의 사랑은 러브스토리의 원형 그대로다. 하지만 이민자 혐오와 국가주의에서 비롯된 갈등과 폭력이 극에 달한 분열의 시대에 ‘사랑만이 구원’이라는 진리는 더 절실하다.

영화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2021),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 주연 앤설 엘고트
새삼 놀라운 건 미장센이다. 좀 과장해 무용극이라고 해도 될 만큼 춤의 비중이 높다. 댄서뿐 아니라 주요 출연진이 발레·현대무용·스윙재즈까지 다채로운 군무의 향연을 펼친다. 두 갱단의 대립도 춤싸움으로 전개된다. 여기에 뮤지컬 ‘웃는 남자’ 등에서 압도적인 무대를 선보였던 오필영 디자이너의 무대미술이 새로움을 더한다. 대형 구조물로 표현되는 뉴욕 빈민가 아파트의 빽빽한 창문에 투영되는 다양한 영상이 어두운 뒷골목과 사랑의 발코니를 오가는 마법같은 미장센을 직조해낸다.

하지만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는 무엇보다 음악이 진리다. 스필버그 감독도 한 인터뷰에서 “10살 때부터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의 음악을 들었고, 가족 모두가 모든 노래와 가사를 기억한다. 지금까지 브로드웨이 뮤지컬 음악 중 내가 들어본 최고의 음악”이라고 추켜세운 바 있다. 그의 말대로 ‘투나잇’ ‘마리아’ 같은 불후의 명곡을 라이브로 들을 수 있는 모처럼의 기회다. 최고 스타 김준수와 박강현, 고은성 등 가장 핫한 배우들의 매력 대결도 관전 포인트다.

물랑루즈! [사진 CJ ENM]
◆물랑루즈!=‘웨스트 사이드 스토리’가 20세기 고전이라면 ‘21세기 고전’의 자리는 ‘물랑루즈!’가 예약했다. 돈의 힘을 제대로 보여주는 초호화 ‘자본주의 뮤지컬’이랄까. CJ ENM이 글로벌 공동 제작한 작품으로, 2019년 브로드웨이 개막 때도 사전 제작비 2800만 달러(약 396억원)의 초대형 스케일로 화제였다. 호주·영국·독일 공연을 거쳐 지난주 아시아 초연으로 개막했는데, 토니 어워즈 10관왕을 비롯해 미국·영국의 각종 상을 36개나 휩쓸었다니 믿고 볼 만하다.
물랑루즈! [사진 CJ ENM]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와 반대로 영화가 먼저다. ‘트루먼 쇼’ ‘위대한 개츠비’ 등으로 유명한 바즈 루어만 감독이 만들고 니콜 키드먼, 이완 맥그리거가 주연한 영화 버전(2001) 속 엘튼 존의 ‘유어 송’, 휘트니 휴스턴의 ‘아이 윌 올웨이즈 러브 유’ 등 당대 히트팝에 아델·비욘세·시아 등 21세기 노래를 더해 두 세기에 걸쳐 전 세계를 풍미한 70여곡을 ‘매시업’한 궁극의 주크박스 뮤지컬이다. 저작권 해결에만 10년 넘게 걸렸다고 한다.

압권은 ‘급’이 다른 무대 세트다. 착석과 동시에 프랑스 파리 물랑루즈 안으로 순간이동하는 기분이다. 1889년 세워진 캬바레 물랑루즈의 상징물인 빨간 풍차와 코끼리가 객석 양쪽에 매달려 있고, 오프닝 10분 전부터 배우들이 나와 멜랑콜리한 프리쇼를 펼치며 ‘이게 바로 물랑루즈 쇼’임을 각인시킨다.

영화 ‘물랑루즈!’(2001), 감독 바즈루어만, 주연 니콜키드먼
화려한 네온사인 이면의 예술가들의 회색빛 삶을 증언하는 건 물랑루즈를 즐겨 그렸던 화가 툴루즈 로트렉이다. 실제 물랑루즈 단골이었던 그는 여배우 사틴(아이비·김지우)과 작곡가 크리스티안(홍광호·이충주)의 지고지순한 사랑의 증인이다. 사틴과 크리스티안이 돈의 힘을 휘두르는 몬로스 공작의 훼방에도 사랑을 지켜내지만 결국 사틴이 폐병으로 죽고 만다는 오페라적 세계관은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만큼이나 고전적이다. 하지만 “돈이 좋아, 난 돈이 많아”라고 노래하는 공작에게 “왜 살아야 해? 사랑이 없다면”이라 맞서는 크리스티안의 존재는 극장 밖 현실의 불황과 혹한을 녹이는 마약처럼 달콤하다.

“세상 가장 고귀한 건 사랑하고 또 사랑받는 것”. 툴루즈 로트렉은 이렇게 노래한다. 압도적인 물량공세를 퍼부어 전하는 메시지가 ‘사랑이 돈을 이긴다’라니. 그럼에도 결국 기다리는 게 죽음이라면, 이것은 비극일까. 곧바로 이어지는 성대한 커튼콜은 결코 눈물을 허하지 않는다. 이런 아이러니야말로 고수의 솜씨요, 예술의 묘미다.

영웅 [사진 에이콤]
◆영웅=3년 만에 돌아온 ‘영웅’은 뮤지컬과 영화판을 동시에 휩쓸고 있다. ‘해운대’ ‘국제시장’으로 국내 최초 쌍천만 감독에 오른 윤제균 감독이 공연을 보고 감동해 2019년 첫 뮤지컬 영화를 제작했고, 팬데믹 탓에 개봉을 미루다 지난 21일 뮤지컬과 영화가 함께 오픈했다. 이번주 기준, 뮤지컬도 영화도 박스오피스 2위다.

2009년 안중근의 하얼빈 거사 100주년을 기념해 제작된 작품. 최근 창작뮤지컬 전성시대를 맞고 있지만, ‘영웅’은 한국인의 정체성을 사수하려는 이야기로 한국인이 직접 만든 ‘찐’ K콘텐트인지라 의미가 남다르다. 영화 버전은 ‘한국 창작뮤지컬로 만든 첫 뮤지컬 영화’로 역사에 남게 됐다.

영화는 10여년 간 안중근의 이름으로 무대에 선 정성화의 14kg 감량 투혼, ‘설희’로 출연한 김고은의 열창도 화제지만 뮤지컬 원작에 대한 오마주를 재치있게 풀어낸 대목이 돋보인다. 하나의 무대에 다양한 공간을 담아야 하는 뮤지컬은 창의적 장면 전환이 관건인데, 시공간을 간단히 초월하는 영화가 굳이 카메라에 행주를 던지는 등 ‘장면 전환’에 방점을 찍어 원작이 무대란 걸 환기시킨다.

영화 ‘영웅’(2022), 감독 윤제균, 주연 정성화
하지만 ‘영웅’만의 시그니처인 추격 씬과 실물 기차의 등장은 영상언어로 재해석될 때 빛이 바랬다. 무예급 안무의 향연인 추격 씬은 박진감 있는 카메라워크로, 실물 기차의 존재감은 기차가 달리는 주변 풍광으로 대신했지만, 역설적으로 뮤지컬 무대에 대체불가능한 것이 있음을 증명하고 말았다. 무대의 가로·세로를 온전히 활용해 군무진이 구조물 사이를 날고 뛰는 아크로바틱 추격전은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의 춤싸움을 방불케 하고, 하얼빈 거사의 위엄에 걸맞는 실물 기차의 절묘한 질주 트릭은 몇 번을 봐도 감탄이 터져나오는 무대 미학의 극치기 때문이다.

‘영웅’의 현재는 두 가지 관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OTT에게 헤게모니를 빼앗겨 돌파구가 절실한 극장 영화계에 ‘시청각 종합선물세트’와 같은 뮤지컬 영화는 좋은 대안이 될 수 있다. 뮤지컬계로서는 K콘텐트 전성시대를 맞아 세계 시장에서 존재감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될 수 있다. 2011년 뉴욕 링컨센터 공연을 감행했던 윤호진 예술감독은 “안중근은 중국의 항일운동을 촉발한 사람이니 중국, 동남아 시장에서 잠재력이 크다. 영화에 대한 반응도 기대 이상이라 글로벌 시장으로 가는 좋은 조력자가 될 것 같다”고 기대감을 표했다.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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