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 최초 매출 4000억 돌파, 연말 뮤지컬 대전 승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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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연시 뮤지컬 전쟁
연말 뮤지컬 전쟁이 뜨겁다. 공연예술통합전산망에 따르면 올해 국내 뮤지컬 시장은 사상 최초로 매출액 4000억원을 돌파할 예정이다. 최근 한 달간 전체 공연시장 매출 약 789억원 중 뮤지컬 매출이 약 557억원으로, 무려 70.6%의 비중을 차지한다. 공연장에 가면 ‘팬데믹 보복소비’를 실감한다. 최고가 15만원이던 VIP석이 16~18만원까지 오르는 등 인플레 추세에도 빈 좌석이 없다. 무료 초대나 할인 판매도 종적을 감췄다. 내년 1월 글로벌 제작진을 동원한 대형 창작뮤지컬 ‘베토벤’의 박효신, 3월 13년 만의 한국어 공연을 올리는 ‘오페라의 유령’의 조승우 등 빅스타들의 가세가 예고되어 있어 당분간 전쟁은 더 치열해질 전망이다. 최근 막을 올린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물랑루즈!’ ‘영웅’ 3파전도 흥미롭다. 세 편 모두 영화와 시너지를 내고 있어서다.
제작비 1억 달러(약 1274억원)를 들인 스필버그 영화는 골든 글로브 작품상을 비롯한 각종 수상에도 불구하고 흥행은 저조했지만, 뮤지컬은 원조의 저력을 과시하고 있다. 요즘 익숙한 뮤지컬처럼 음악과 무용이 이야기를 위해 봉사하는 게 아니라 각 장르가 그 자체로 예술적 존재감을 주장한다. 그도 그럴 것이 창작진이 남다르다. 20세기 미국 음악을 대표하는 작곡가 레너드 번스타인과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살아있는 전설 스티븐 손드하임, ‘미국 발레의 아버지’ 조지 발란신의 후계자 제롬 로빈스 등 천재 예술가들의 불꽃 튀는 만남이 빚어낸 20세기 미국 공연예술의 정수인 것이다.
고전 중의 고전, ‘로미오와 줄리엣’을 각색했으니 스토리는 뻔하다. 1950년대 뉴욕, 폴란드 이민자 갱단인 제트파와 푸에르토리코 이민자 갱단인 샤크파 사이 세력 다툼 속에서 싹트는 토니와 마리아의 사랑은 러브스토리의 원형 그대로다. 하지만 이민자 혐오와 국가주의에서 비롯된 갈등과 폭력이 극에 달한 분열의 시대에 ‘사랑만이 구원’이라는 진리는 더 절실하다.
하지만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는 무엇보다 음악이 진리다. 스필버그 감독도 한 인터뷰에서 “10살 때부터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의 음악을 들었고, 가족 모두가 모든 노래와 가사를 기억한다. 지금까지 브로드웨이 뮤지컬 음악 중 내가 들어본 최고의 음악”이라고 추켜세운 바 있다. 그의 말대로 ‘투나잇’ ‘마리아’ 같은 불후의 명곡을 라이브로 들을 수 있는 모처럼의 기회다. 최고 스타 김준수와 박강현, 고은성 등 가장 핫한 배우들의 매력 대결도 관전 포인트다.
압권은 ‘급’이 다른 무대 세트다. 착석과 동시에 프랑스 파리 물랑루즈 안으로 순간이동하는 기분이다. 1889년 세워진 캬바레 물랑루즈의 상징물인 빨간 풍차와 코끼리가 객석 양쪽에 매달려 있고, 오프닝 10분 전부터 배우들이 나와 멜랑콜리한 프리쇼를 펼치며 ‘이게 바로 물랑루즈 쇼’임을 각인시킨다.
“세상 가장 고귀한 건 사랑하고 또 사랑받는 것”. 툴루즈 로트렉은 이렇게 노래한다. 압도적인 물량공세를 퍼부어 전하는 메시지가 ‘사랑이 돈을 이긴다’라니. 그럼에도 결국 기다리는 게 죽음이라면, 이것은 비극일까. 곧바로 이어지는 성대한 커튼콜은 결코 눈물을 허하지 않는다. 이런 아이러니야말로 고수의 솜씨요, 예술의 묘미다.
2009년 안중근의 하얼빈 거사 100주년을 기념해 제작된 작품. 최근 창작뮤지컬 전성시대를 맞고 있지만, ‘영웅’은 한국인의 정체성을 사수하려는 이야기로 한국인이 직접 만든 ‘찐’ K콘텐트인지라 의미가 남다르다. 영화 버전은 ‘한국 창작뮤지컬로 만든 첫 뮤지컬 영화’로 역사에 남게 됐다.
영화는 10여년 간 안중근의 이름으로 무대에 선 정성화의 14kg 감량 투혼, ‘설희’로 출연한 김고은의 열창도 화제지만 뮤지컬 원작에 대한 오마주를 재치있게 풀어낸 대목이 돋보인다. 하나의 무대에 다양한 공간을 담아야 하는 뮤지컬은 창의적 장면 전환이 관건인데, 시공간을 간단히 초월하는 영화가 굳이 카메라에 행주를 던지는 등 ‘장면 전환’에 방점을 찍어 원작이 무대란 걸 환기시킨다.
‘영웅’의 현재는 두 가지 관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OTT에게 헤게모니를 빼앗겨 돌파구가 절실한 극장 영화계에 ‘시청각 종합선물세트’와 같은 뮤지컬 영화는 좋은 대안이 될 수 있다. 뮤지컬계로서는 K콘텐트 전성시대를 맞아 세계 시장에서 존재감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될 수 있다. 2011년 뉴욕 링컨센터 공연을 감행했던 윤호진 예술감독은 “안중근은 중국의 항일운동을 촉발한 사람이니 중국, 동남아 시장에서 잠재력이 크다. 영화에 대한 반응도 기대 이상이라 글로벌 시장으로 가는 좋은 조력자가 될 것 같다”고 기대감을 표했다.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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