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음악 대가 바흐, 코믹 ‘칸타타’ 많이 작곡한 까닭

2022. 12. 31. 00:49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민은기의 클래식 비망록
라이프치히의 바흐 동상. [사진 사회평론]
어릴 적 음악시간에 바흐를 ‘음악의 아버지’라고 배웠다. 바흐가 음악의 아버지라면 음악의 시작이 바흐라는 말이다. 틀린 내용이지만 교과서에도 그렇게 적혀있고 선생님도 그렇다하니 그런가보다 생각했다. 도대체 누가 처음 바흐를 음악의 아버지라고 했을까.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어지간히 바흐를 존경했던 사람이리라. 그리고 독일인이거나 개신교도였을 게 분명하다. 아니면 둘 다였거나.

독일인에게 바흐는 음악의 아버지로 여겨질 만하다. 독일이 누리고 있는 클래식 음악의 성지라는 명성은 바흐에서 시작된 것이 분명하니까. 바흐 이전 독일은 서양음악사에서 단 한 번도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적이 없다. 궁정이 중심이던 당시의 음악 문화에서 독일에 있는 제후 국가들의 위치는 보잘 것 없었고, 그나마 독일 내 궁정 음악마저도 대부분 이탈리아나 프랑스 출신 음악가들이 차지했다. 그랬던 독일 음악의 위상을 완전히 바꾸어 놓은 사람이 바로 바흐다.

바흐, 성가대 소년단원 되려 300㎞ 걸어

바흐 음악이 일취월장한 뤼네부르크의 성 미카엘 교회. [사진 사회평론]
어떻게 한 명의 음악가가 이렇게 엄청난 위업을 이룰 수 있었을까. 바흐가 출중한 음악 명문가에서 태어난 덕분이라고들 하지만 실제로 그 혜택을 받았던 것은 아니다. 부모 형제와 친척들이 모두 실력파 음악가였던 것은 맞지만 정작 바흐는 9살 때 엄마를, 10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고아로 힘들게 자랐다. 결혼한 큰 형이 어린 바흐를 받아주어 몸을 위탁할 수는 있었지만 이제 갓 취직한 24살짜리 형이 해줄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나마 이 더부살이도 형에게 셋째 아이가 생기면서 끝나고 바흐는 15살의 어린 나이에 독립을 해야 했다.

어린 나이에 돈도 벌어야 하고 숙식도 해결해야 했으니 얼마나 막막했을까. 그래서 소년 바흐가 선택한 길이 교회 성가대였다. 성가대 소년단원만 되면 교회에서 먹여주고 재워주고 필요한 음악공부까지 시켜주었기 때문이다. 이 기회를 잡으려고 바흐는 열흘을 꼬박 걸어서 300㎞나 떨어진 뤼네부르크까지 갔다. 그만큼 절박했던 것이다. 소년단원이 되었으나 곧 변성기가 찾아와 성가대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다행히 노래 실력이 워낙 뛰어나고 오르간·바이올린 같은 악기까지 잘 다룬 덕분에 그는 2년을 더 기숙학교에 머물 수 있었다.

바흐 가족의 아침 찬송. [사진 사회평론]
의식주 문제만 해결한 것이 아니라 그토록 간절히 꿈꾸던 배움의 기회를 얻었다. 한자동맹의 교역도시 뤼네부르크에서 바흐는 프랑스·이탈리아의 음악 문화를 접했고, 실력 있는 음악가들을 만날 수 있었다. 게다가 바흐가 머물던 성 미카엘 교회의 도서관은 그에게 영감의 원천이었다. 1555년에 지어진 이 도서관은 르네상스 시대 이후 작곡가 180여명이 남긴 1000점이 넘는 작품뿐 아니라 당대 최고의 작곡가로 인정받던 프로베르거, 북스테후데 같은 대가들의 악보를 모두 소장하고 있었다. 형의 집에 얹혀살던 시절 형이 애지중지하던 악보를 몰래 훔쳐볼 정도로 오랫동안 배움에 목말랐던 바흐에게 이 도서관은 그야말로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았다.

뤼네부르크에 머무는 동안 바흐의 실력은 일취월장했고, 18살이 되어 고향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뛰어난 청년 음악가가 되어 있었다. 그 결과 돌아오자마자 바이올린 연주자 겸 시종으로 작센 바이마르 궁정에 취직할 수 있었고, 다시 6개월 만에 비록 작은 도시지만 아른슈타트 교회의 오르간 주자 겸 합창단장으로 부임했다. 그리고 3년 만에 뮐하우젠이라는 조금 더 큰 도시의 교회로 직장을 옮겼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곳에서 받던 급료의 두 배를 받고 불과 몇 년 전 시종으로 일하던 바이마르 궁정의 음악가가 되었다. 다시 5년 후에는 모든 궁정음악가들의 수장격인 콘체르트마이스터로 승진해 4년을 일했다.

라이프치히 커피숍서 ‘커피 칸타타’ 연주

서른을 넘기자 바흐의 명성이 독일 내 널리 퍼져나갔고 여러 궁정에서 바흐에게 눈독을 들이며 서로 스카우트 경쟁까지 하는 상황이 되었다. 결국 안할트 쾨텐 공국에서 바흐를 카펠마이스터로 모셔갔다. 쾨텐에서 바흐는 그 어느 때보다 좋은 대우를 받았지만 6년이 지나자 나라의 재정 상태가 나빠지고 바흐를 총애하던 군주의 건강마저 좋지 않아 새 직장을 찾아야 했다. 다행히 라이프치히 시의회의 선택을 받아 라이프치히 시의 모든 음악을 관장하는 칸토르가 되었고 남은 평생 바흐는 이 일을 하며 살았다.

아이제나흐의 바흐 하우스에 있는 친필 악보. [사진 사회평론]
바흐의 인생은 그야말로 끊임없는 고난과 도전의 연속이었고, 안정적인 직장을 찾은 이후에도 그는 늘 과중한 업무에 시달렸다. 교회는 교회대로 궁정은 궁정대로 많은 음악을 필요로 했고 바흐는 그 모든 곡의 연주와 작곡을 책임져야 했기 때문이다. 지위가 상승할수록 일도 많아졌고 명성이 높아질수록 사람들의 기대가 커진 탓에 바흐의 부담은 날로 늘어났다. 특히 바흐의 칸타타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는 팬덤이라고 할 정도로 대단했다. 칸타타란 연기를 하지는 않지만 오페라처럼 스토리도 있고 여러 등장인물이 나오는 일종의 연극음악이다. 여러 곡으로 이루어져 연주시간이 족히 30분은 넘는 대규모 장르다. 세속음악 장르로 발달했던 것인데 바흐는 성경 이야기를 가지고 경건하면서도 극적인 감정을 담은 교회칸타타를 만들어서 신도들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사람들은 주일마다 그의 교회칸타타를 듣고 싶어 했고, 결국 바흐는 의무에도 없던 칸타타를 매주 작곡해야만 했다. 이렇게 해서 작곡한 칸타타가 무려 300곡이 넘는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교회칸타타만으로도 눈코 뜰 새 없었을 시절에 바흐가 따로 세속칸타타들을 많이 작곡했다는 사실이다. 이런 세속칸타타들은 바흐가 감독을 맡고 있던 콜레기움 무지쿰이라는 음악단체의 공연에서 연주되었다. 연주 장소는 고트프리트 치머만이라는 사람이 운영하는 라이프치히에서 가장 큰 커피하우스였고, 연주가들은 콜레기움 무지쿰의 아마추어 대학생들이었다. 칸타타의 내용이나 연주 분위기 역시 진지하고 장엄했던 교회칸타타와는 달리 해학적이고 유쾌한 것이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커피 칸타타’다.

칸타타가 시작되면 테너가 나와 청중에게 “얘기들 좀 그만하고 조용히 하세요”라며 광대같이 익살을 떨며 분위기를 잡는다. 그리고 소개를 받은 주인공 아버지가 먼저 나와 푸념을 늘어놓는다. 자기가 딸에게 커피를 좀 그만 마시라고 10만 번이나 얘기를 해도 딸이 말을 안 듣는다는 것이다. 이어 등장한 딸은 자기는 하루에 세 번 커피를 마시지 못한다면 괴로움에 오그라들어 구운 염소가 될 것이라며 아버지의 말을 반박한다. 아버지는 앞으로도 계속 그러면 옷이고 밥이고 좋아하는 것들을 절대로 해주지 않을 것이라며 경고하지만 딸은 신경도 쓰지 않는다. 하지만 결혼시켜 주겠다는 아버지의 제안에는 바로 커피를 끊겠다고 대답한다. 딸의 말을 믿고 아버지가 신랑감을 찾으러 나가자마자 딸은 커피를 마시게 해주지 않는다면 누구도 자기와 결혼하지 못할 것이라며 다시 자신의 커피 예찬을 이어간다.

음악에 관해서는 세상 누구보다 엄격하고 진지했던 것으로 유명한 바흐가 이렇게 가볍고 익살스런 음악을 썼다는 것이 흥미롭다. 게다가 바흐는 이런 연주회를 500회 이상 개최했다고 하니 일시적인 호기심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시민들에게는 궁정에서나 볼 수 있는 오락을 접하는 셈이니 이보다 신기하고 호사스러운 경험이 없었을 것이다. 가뜩이나 격무에 시달렸던 바흐가 왜 시민을 대상으로 한 음악회에 이토록 정성을 들였을까. 교회나 시 당국이 요구한 것도 아니고 이것을 한다고 해서 돈이 생기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바흐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었고 이것을 통해 진정한 휴식과 해방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진실은 바흐만이 알겠지만.

한해가 저문다. 기대도 크고 하고 싶은 일들도 많았는데 정작 제대로 한 것은 별로 없이 이제 하루만 지나면 계묘년이다. 새해에도 내가 짊어져야 하는 삶의 무게는 변하지 않을 것이고 어제와 똑같은 오늘을 살게 될지도 모른다. 삶의 굴레란 그렇게 쉽게 벗어날 수 없는 거니까. 하지만 새해에는 해야 하는 일만 하지 않고 꼭 하고 싶은 일 하나를 찾아서 반드시 하리라고 스스로 다짐한다. 일이 많아서 힘들기도 하지만 정말 하고 싶은 것이 없어서 힘든 것이기도 하니까.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고된 삶을 즐겁게 만들었던 바흐 나름의 지혜가 아니었을까.

민은기 서울대 음악학과 교수. 서울대학교에서 음악이론을 전공하고 파리 소르본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1995년부터 서울대 음악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음악과 페미니즘’ ‘독재자와 음악’ ‘대중음악의 역사’ 등을 주제로 여러 권의 저서를 출판했으며 최근에는 『난생 처음 한번 들어보는 클래식 수업』 시리즈를 집필 중이다.

Copyright © 중앙SUNDAY.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