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음악 대가 바흐, 코믹 ‘칸타타’ 많이 작곡한 까닭
민은기의 클래식 비망록
독일인에게 바흐는 음악의 아버지로 여겨질 만하다. 독일이 누리고 있는 클래식 음악의 성지라는 명성은 바흐에서 시작된 것이 분명하니까. 바흐 이전 독일은 서양음악사에서 단 한 번도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적이 없다. 궁정이 중심이던 당시의 음악 문화에서 독일에 있는 제후 국가들의 위치는 보잘 것 없었고, 그나마 독일 내 궁정 음악마저도 대부분 이탈리아나 프랑스 출신 음악가들이 차지했다. 그랬던 독일 음악의 위상을 완전히 바꾸어 놓은 사람이 바로 바흐다.
바흐, 성가대 소년단원 되려 300㎞ 걸어
어린 나이에 돈도 벌어야 하고 숙식도 해결해야 했으니 얼마나 막막했을까. 그래서 소년 바흐가 선택한 길이 교회 성가대였다. 성가대 소년단원만 되면 교회에서 먹여주고 재워주고 필요한 음악공부까지 시켜주었기 때문이다. 이 기회를 잡으려고 바흐는 열흘을 꼬박 걸어서 300㎞나 떨어진 뤼네부르크까지 갔다. 그만큼 절박했던 것이다. 소년단원이 되었으나 곧 변성기가 찾아와 성가대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다행히 노래 실력이 워낙 뛰어나고 오르간·바이올린 같은 악기까지 잘 다룬 덕분에 그는 2년을 더 기숙학교에 머물 수 있었다.
뤼네부르크에 머무는 동안 바흐의 실력은 일취월장했고, 18살이 되어 고향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뛰어난 청년 음악가가 되어 있었다. 그 결과 돌아오자마자 바이올린 연주자 겸 시종으로 작센 바이마르 궁정에 취직할 수 있었고, 다시 6개월 만에 비록 작은 도시지만 아른슈타트 교회의 오르간 주자 겸 합창단장으로 부임했다. 그리고 3년 만에 뮐하우젠이라는 조금 더 큰 도시의 교회로 직장을 옮겼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곳에서 받던 급료의 두 배를 받고 불과 몇 년 전 시종으로 일하던 바이마르 궁정의 음악가가 되었다. 다시 5년 후에는 모든 궁정음악가들의 수장격인 콘체르트마이스터로 승진해 4년을 일했다.
라이프치히 커피숍서 ‘커피 칸타타’ 연주
서른을 넘기자 바흐의 명성이 독일 내 널리 퍼져나갔고 여러 궁정에서 바흐에게 눈독을 들이며 서로 스카우트 경쟁까지 하는 상황이 되었다. 결국 안할트 쾨텐 공국에서 바흐를 카펠마이스터로 모셔갔다. 쾨텐에서 바흐는 그 어느 때보다 좋은 대우를 받았지만 6년이 지나자 나라의 재정 상태가 나빠지고 바흐를 총애하던 군주의 건강마저 좋지 않아 새 직장을 찾아야 했다. 다행히 라이프치히 시의회의 선택을 받아 라이프치히 시의 모든 음악을 관장하는 칸토르가 되었고 남은 평생 바흐는 이 일을 하며 살았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교회칸타타만으로도 눈코 뜰 새 없었을 시절에 바흐가 따로 세속칸타타들을 많이 작곡했다는 사실이다. 이런 세속칸타타들은 바흐가 감독을 맡고 있던 콜레기움 무지쿰이라는 음악단체의 공연에서 연주되었다. 연주 장소는 고트프리트 치머만이라는 사람이 운영하는 라이프치히에서 가장 큰 커피하우스였고, 연주가들은 콜레기움 무지쿰의 아마추어 대학생들이었다. 칸타타의 내용이나 연주 분위기 역시 진지하고 장엄했던 교회칸타타와는 달리 해학적이고 유쾌한 것이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커피 칸타타’다.
칸타타가 시작되면 테너가 나와 청중에게 “얘기들 좀 그만하고 조용히 하세요”라며 광대같이 익살을 떨며 분위기를 잡는다. 그리고 소개를 받은 주인공 아버지가 먼저 나와 푸념을 늘어놓는다. 자기가 딸에게 커피를 좀 그만 마시라고 10만 번이나 얘기를 해도 딸이 말을 안 듣는다는 것이다. 이어 등장한 딸은 자기는 하루에 세 번 커피를 마시지 못한다면 괴로움에 오그라들어 구운 염소가 될 것이라며 아버지의 말을 반박한다. 아버지는 앞으로도 계속 그러면 옷이고 밥이고 좋아하는 것들을 절대로 해주지 않을 것이라며 경고하지만 딸은 신경도 쓰지 않는다. 하지만 결혼시켜 주겠다는 아버지의 제안에는 바로 커피를 끊겠다고 대답한다. 딸의 말을 믿고 아버지가 신랑감을 찾으러 나가자마자 딸은 커피를 마시게 해주지 않는다면 누구도 자기와 결혼하지 못할 것이라며 다시 자신의 커피 예찬을 이어간다.
음악에 관해서는 세상 누구보다 엄격하고 진지했던 것으로 유명한 바흐가 이렇게 가볍고 익살스런 음악을 썼다는 것이 흥미롭다. 게다가 바흐는 이런 연주회를 500회 이상 개최했다고 하니 일시적인 호기심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시민들에게는 궁정에서나 볼 수 있는 오락을 접하는 셈이니 이보다 신기하고 호사스러운 경험이 없었을 것이다. 가뜩이나 격무에 시달렸던 바흐가 왜 시민을 대상으로 한 음악회에 이토록 정성을 들였을까. 교회나 시 당국이 요구한 것도 아니고 이것을 한다고 해서 돈이 생기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바흐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었고 이것을 통해 진정한 휴식과 해방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진실은 바흐만이 알겠지만.
한해가 저문다. 기대도 크고 하고 싶은 일들도 많았는데 정작 제대로 한 것은 별로 없이 이제 하루만 지나면 계묘년이다. 새해에도 내가 짊어져야 하는 삶의 무게는 변하지 않을 것이고 어제와 똑같은 오늘을 살게 될지도 모른다. 삶의 굴레란 그렇게 쉽게 벗어날 수 없는 거니까. 하지만 새해에는 해야 하는 일만 하지 않고 꼭 하고 싶은 일 하나를 찾아서 반드시 하리라고 스스로 다짐한다. 일이 많아서 힘들기도 하지만 정말 하고 싶은 것이 없어서 힘든 것이기도 하니까.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고된 삶을 즐겁게 만들었던 바흐 나름의 지혜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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