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락한 도시가 예술을 품고 세계적 명소로
폴 골드버거 지음
강경아 옮김
을유문화사
‘빌바오 효과’라는 말이 있다. 1997년 스페인의 북쪽 바스크 지방의 쇠퇴한 산업도시 빌바오에 구겐하임 미술관이 설립되면서 이 도시가 세계적인 관광지로 변모하며 생겨난 말이다. 그런데 이 미술관을 설계한 프랭크 게리는 완공된 미술관을 보고 이렇게 생각했다고 한다. “맙소사, 내가 이 사람들에게 무슨 짓을 저지른 거지?” 어쨌거나 이 미술관은 평생 자신을 의심하며 불안에 시달리며 살아온 건축가의 인생을 바꾸고, 훌륭한 건축물이 경제 발전의 촉매제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을 세상에 널리 알렸다.
책은 현재 93세인 게리와 40년간 만남을 이어온 뉴욕타임스 기자 출신 건축비평가가 쓴 게리의 전기다. 1974년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아웃사이더’로 보였던 게리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고 영향력이 큰 건축가로 성장해가는 모습이 촘촘하게 기록됐다. 빌바오 구겐하임을 보며 ‘어떻게 이런 건물을 설계했을까?’ 궁금했던 이들이라면 궁금증을 풀어줄 단서들을 하나씩 발견해가며 가슴이 설렐 듯하다.
하버드 대학원을 나와 건축일을 시작한 그의 인생에서 눈이 번쩍 뜨이는 경험이 된 것 중 하나는 유럽 건축 투어였다. 프랑스에서 시급제로 일하며 틈만 나면 건축 투어를 다녔다. 10~12세기 유럽에서 유행한 로마네스크 양식의 대성당에 완전히 매료된 그에게 부르고뉴 오툉 성당은 일종의 계시처럼 보였다. 그는 이 성당을 보고 “건축, 회화, 조각은 하나의 거대한 건물 안에서 하나로 통합될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에 이른다.
‘현대 건축의 개척자’ 르 코르뷔지에(1887~1965)의 최신 건축물이었던 롱샹 성당의 조각과 같은 강렬한 형태는 더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독특하고 유동적인 형태와 엄청난 견고함이 하나의 건물에 공존할 수 있다”는 사실에 게리는 전율했다. 또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가우디 작품을 보고선 “USC에서 배웠던 것만큼 직선이 중요하지는 않다는 믿음”을 굳혔다. 그는 건축이란 기능적 문제에 대한 해결책일 뿐만 아니라 예술 작품을 만드는 행위라고 굳게 믿었다.
게리는 예술가 친구들과 ‘유사 가족’처럼 지냈다. 예술가들과 어울리며 건축가들과 있을 때 느껴보지 못한 편안함을 느꼈고, 그들과 형태와 색깔, 재료, 빛을 탐구하고 논하는 일을 좋아했다. 그는 건축을 포기할 마음은 없었지만, 예술가들이 하는 일을 건축으로 해내고 싶다는 욕심이 있었다. 예술가들과의 교류는 영화계, 음악계로 넓어진다.
그러나 1988년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2003년 완공) 설계는 최종 후보에 오르는 과정부터 험난했다. 평범하고 일상적인 재료에 대한 그의 지대한 관심은 “프랭크 게리를 뽑으면 안 돼요, 온 세상의 웃음거리가 될 거예요”라는 반발의 빌미가 됐다. 심사 과정에서 다른 후보들과 다르게 “합리적이고 겸손한 태도”로 피드백을 수용하는 모습을 보여준 뒤에야 설계자로 선정됐다.
이쯤에서 그의 인생에 자리한 뜻밖의 인물을 주목할 만하다. 그의 오랜 심리 상담사인 밀턴 웩슬러다. 저자는 “웩슬러는 게리에게 멘토이자 상담가, 조언자였다. (융통성 없던) 게리가 심리 상담을 받으며 ‘경청하는 사람’으로 변화했다”고 전했다.
게리의 이력에서 저자가 주목한 특이한 점도 있다. 큰 경제적 이익을 얻을 만한 기회를 번번이 차버린 ‘등 돌리기 본능’이다. 설계 사무소 파리 지부를 맡아 달라는 제안은 “내 일을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며 거절했고, 판지 가구가 흥행 조짐을 보이자 손해를 감수하고 오히려 사업을 접었다. “당신의 대표작을 복사해달라”는 몰려드는 요구도 물리쳤다. 내 할 일을 스스로 통제하며 가기 위해선 눈앞의 유혹에 저항하는 일 역시 큰 용기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저자는 게리의 건축을 “직관적이고 체계적인 형식에 관한 탐구”로 정의한다. “조각과 덩어리, 충돌하는 형태와 질감, 채움과 비움이 한데 모인” 그의 작품은 제약 없는 자유가 아니라 새로운 종류의 질서를 만드는 대담한 방식이었다는 것이다. 예컨대 게리가 진보적 테크놀로지를 적극적으로 이용해 창조한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의 독특한 형태는 “새로움의 상징인 동시에 일종의 장식”이며 “건축의 기쁨을 노래한 송시”였다.
이 책은 전기라는 장르가 지닌 힘과 매력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한다. 학교 시절 성적이 C나 D가 나왔던 과목들, 발표엔 젬병이고 승진도 못 했던 직장 생활, 그의 작업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직원들 얘기까지 기술돼 있다. 또 독일 비트라 디자인 미술관, 파리 루이비통 재단 미술관 등 건축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대표작들의 제작 과정도 자세히 엿볼 수 있다.
이은주 문화선임기자 ju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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