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물에 취한 권력…나치의 또 다른 역사
노르만 울러 지음
박종대 옮김
열린책들
“기회가 되면 페르비틴을 다시 보내주세요. 보초를 설 때 아주 유용해요.” “너무 지쳐서 더 이상 쓰지 못하겠어요. 가능한 한 빨리 페르비틴을 보내 주세요.”
나중에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가 되는 하인리히 뵐이 제2차 세계대전 때 군에서 가족에게 쓴 편지들이다. 그가 거듭 요청한 페르비틴의 주성분은 놀랍게도 메스암페타민. 현재 대부분의 국가에서 마약류로 규제하는 물질이다.
이 책 『마약 중독과 전쟁의 시대』에 따르면 당시 독일에서 페르비틴은 약국에서 쉽게 살 수 있는 알약이었고, 그 사용은 직업을 가리지 않고 대중적으로 퍼져 있었다. 실은 페르비틴만 그랬던 건 아니다. 독일은 각종 화학물질 제조 강국이자, 1920년대 중반에는 세계 최대의 모르핀 생산국, 헤로인 수출국이기도 했다고 한다.
책에 따르면 폴란드 침공과 프랑스 진격을 비롯한 독일군의 전격전에서 페르비틴은 제 역할을 톡톡히 했다. 며칠씩 밤잠을 자지 않고 행군하는 병사들만 아니라 야간 공습에 나선 전투기 조종사들도 복용해 ‘폭격기 알약’으로도 불렸다. 앞서 페르비틴의 각성효과를 주목한 국방 생리연구소 소장 오토 랑케는 임상실험을 통해 그 위험성도 알게 됐지만 이에 대한 경고는 결과적으로 시늉에 그쳤다. 독일군이 활용한 건 메스암페타민만이 아니었다. 1인용 어뢰 공격 등에는 코카인 등도 알약이나 껌으로 동원됐다고 한다.
그럼 최고 권력자는 어땠을까. 히틀러의 개인 주치의 테오도르 모렐은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롭게 그려지는 인물이다. 모렐은 ‘환자 A’ 등의 이름으로 히틀러에 대한 방대한 진료기록을 남겼는데 날짜로 885일 분량에 달한다. 그중 주사약 투여가 약 800회나 된다. 모렐의 주사는 비타민이나 포도당에서 시작해 동물에서 추출한 호르몬 제재와 스테로이드 물질까지, 나중에는 무려 80가지 넘는 약물을 뒤섞었다고 한다.
이와 별도로 오이코달도 종종 주사했다. 진통 효과가 모르핀의 약 두 배에 달한다는 마약성 약물이다. 저자는 모렐이 진료기록에 손글씨로 ‘오이코달’이라고 적은 것뿐 아니라 ‘x’라고 쓴 항목 역시 오이코달로 추정한다. 책에는 히틀러가 주사 전후로 급변하는 모습, 독일에 불리해지는 전쟁의 흐름과 함께 신체적으로도 몰락하는 모습이 마치 눈앞에서 보는 듯 생생하게 그려진다. 모렐은 히틀러의 후광을 통해 사업적 확장도 꾀했지만 결국 미군에 체포됐고 1948년 세상을 떠났다.
이 책은 독일의 언론인 출신으로 소설가로도 활동해온 저자의 첫 논픽션. 저자가 나치의 마약 사용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듣고 독일은 물론 미국의 국립 기록 보관소까지 찾아가 방대한 자료를 확인하며 쓴 결과물이다. 실감 나는 묘사와 대범한 비유법 등 여러모로 흥미롭게 읽히는 책이지만 사료에 근거한 것만 아니라 저자의 추정을 통해 연결되는 대목도 종종 포함돼 있다.
나치의 악행과 마약을 연결 짓는 과잉 해석은 저자 스스로도 경계하는 부분. 저자는 “역사상 가장 어두운 그 시대가 중독성 물질을 너무 많이 복용했기 때문에 탈선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해야 한다”며 “마약은 우리와 우리 시대에 이미 내재되어 있던 것을 강화했을 뿐”이라고 책말미에 적었다. 독일에서 2015년 처음 나온 책으로 원제는 ‘Der totale Rausch: Drogen im Dritten Reich’. 직역하면 ‘완전한 도취: 제3제국의 마약’.
이후남 기자 hoonam@joongang.co.kr
Copyright © 중앙SUNDAY.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