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은 마을 축소판…‘숙녀의 방’같은 유명 공간 있어야

2022. 12. 31.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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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LITE SOCIETY
남아프리카공화국 랜저랙 호텔의 서재. 마을 도서관이 호텔에 구현된 형태다. [사진 박진배]
뉴욕에 아주 특별한 호텔이 하나 있다. 일반적인 형태의 호텔은 아니다. “1930년대 말 경제공황이 끝나갈 무렵 뉴욕의 첼시지역에 초호화 호텔을 짓는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었다. 하지만 세계 제2차 대전의 발발로 계획은 취소되었다. 그때 그 호텔이 지어졌다면, 그리고 이제까지 수십 년간 영업을 해왔다면…”이라는 가정에 따라 첼시의 창고건물에 ‘맥키트릭(McKittrick) 호텔’이라는 간판을 단 것이다. 내부에서는 ‘슬립 노 모어(Sleep No More)’가 십년 넘게 장기 공연되고 있다. 셰익스피어의 ‘맥베스’ 대사에서 제목을 딴 작품으로, 특정 공간을 따라 배우와 관객이 이동하면서 공연하는 형식이다. 이를 위해서 호텔 리셉션, 바, 재즈 클럽, 무도회장 등을 실제와 같이 재현해 놓고 그 안에서 벌어졌을 법한 사건과 이야기들을 연출해 놓았다. 역사적 상상력과 기획의 창의성이 대단하다.

많은 여행객 사연·추억 간직한 공간

이탈리아 일 팔코니에 호텔의 아침식사 공간. [사진 박진배]
여행객들에게 잠자리와 식사, 서비스를 제공하는 호텔은 실제로 많은 기억과 스토리를 간직하게 된다. 그런 이유로 ‘베스트 엑조틱 메리골드 호텔’, ‘귀여운 여인’, ‘포 룸’,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등 많은 영화가 호텔을 배경으로 만들어져 왔다. 운명이 걸린 비즈니스, 낭만적 호화로움, 편안한 휴식 등 다양한 이유로 사람들은 호텔을 찾는다. 이런 요구를 수용하는 호텔은 흔히 ‘환대산업의 꽃’으로 표현된다. 그 기능을 위한 공간디자인과 쾌적한 분위기, 섬세한 서비스 등 환대산업에 필요한 요소들이 최고 수준으로 집약된 공간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바쁜 상점이나 레스토랑도 영업시간이 끝나면 문을 닫는다. 하지만 호텔은 24시간 열려있는 곳이다. 좋은 일 또는 나쁜 일이 한밤중이나 이른 새벽에 발생할 수 있다. 그래서 호텔은 마치 축소된 마을과 같다. 어린 시절 읽었던 동화 속 작은 마을을 생각해 보자. 입구에서 멀지 않은 곳에 광장이 보이고, 거리가 나누어지며 마을회관, 교회, 우체국, 법원 등의 건물이 위치한다. 외곽 쪽으로는 주택들이 나열돼 있다. 호텔의 공간구성은 정확하게 이런 배치를 따른다. 마을의 중심 광장은 로비, 길거리는 복도, 기타 공공건물은 영업장이 된다. 마을의 공원이나 텃밭은 호텔의 정원과 허브 가든으로, 도서관, 미술관과 공연장은 호텔의 서재, 갤러리, 그리고 로비에 놓인 피아노로 축소돼 만들어진다. 호텔의 미팅룸은 마을회관, 주택은 객실에 해당되는 곳이다. 마을의 광장처럼 호텔의 로비에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모이고 교류한다. 어두운 거리에 늦게까지 불을 밝히며 사람들을 유혹하는 작은 마을의 선술집처럼, 호텔의 조용한 구석에 위치한 바는 외로운 손님을 위해서 자리를 비워놓고 기다린다. 재미있는 점은 실제로 마을에 존재하는 도서관, 레스토랑, 약국, 베이커리, 세탁소, 미용실, 상점 등의 장소들이 호텔에도 그대로 중복돼어 위치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어떤 호텔인가?”는 “어떤 마을인가?”라는 은유적인 상상을 불러온다. 우리는 예쁘고 깨끗하며 사람들이 친절한 마을을 좋아한다.

영국 라임 우드 호텔. 마을의 공원이 호텔에서는 종종 정원으로 축소되어 만들어진다. [사진 박진배]
여기서 한 가지 포인트가 있다. 호텔에는 “그 호텔!” 하면 생각나는 유명한 공간이 하나쯤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 역시 어떤 마을에 가면 역사적인 유적지나 미술관, 수백 년 된 느티나무나 특별한 축제가 있는 것과 유사하다. 영화 ‘여인의 향기’에서 알 파치노가 가브리엘 안와와 함께 탱고를 추던 뉴욕 피에르(Pierre) 호텔의 ‘코틸리온 룸(Cotillion Room)’, 헤밍웨이가 즐겨 찾았다는 파리 리츠 호텔의 바,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가 ‘가지 않은 길’을 구상했다는 버몬트 주 ‘웨이버리 인(Waverly Inn)’의 객실 등이 그런 공간이다. 이런 곳들은 마치 마을의 명소와 같이 고객을 흡입하는 역할을 한다.

왜 호텔 디자인이 마을의 배치와 구성을 따르는 것인가? 아무리 훌륭한 호텔도 손님에게는 타지의 숙소일 뿐이다. 그래서 ‘집을 떠난 집’이라는 표현대로 심리적 편안함을 주려는 노력이 도입되고, 그 방법으로 고객에게 친숙한 환경의 조성이 선택된 것이다. 자신이 살던 마을, 마을의 정육점, 이발소와 같이 좋은 기억을 가진 공간의 배치와 은유를 호텔에서 느낄 수 있는 이유다.

뉴욕의 스크리브너스 호텔. 호텔의 로비는 마을의 광장처럼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모이면서 교류하는 장소의 역할을 한다. [사진 박진배]
근사한 건물과 인테리어, 특급 레스토랑과 멋진 객실은 호텔에서 보이는 현상일 뿐이다. 본질은 호텔이 창조하는 라이프스타일에 있다. 특정 호텔을 방문하고 싶은 이유는 고유의 라이프스타일이 있기 때문이다. 호텔은 장소가 아니라 경험이다. 호텔의 고객은 객실이나 음식, 사우나만 구매하는 것이 아니다. 호텔의 이미지를 사는 것이다. 그 이미지는 호텔에 대한 고객의 가치 기준이다. 그 바탕에 서비스와 디자인이 존재한다. 고객 한 사람 한 사람을 기억하며 친절한 서비스를 베푸는 직원들의 환대는 호텔의 근사함만큼이나 비밀스러운 매력이다. 남들이 다 제공하는 정형화된 서비스를 초월한, 작은 것이라도 기대하지 못한 걸 베푸는 서비스가 좋은 호텔의 경쟁력이다. 고객은 디테일에 감동한다. 그리고 그 디테일은 고객의 기억에 남아 두고두고 대화의 소재가 된다. 디테일에 쏟는 정성과 수준은 좋은 호텔의 빠질 수 없는 요건이다.

손님은 직원들 존중 에티켓 가져야

런던의 리츠 호텔. 호텔은 실제로 많은 투숙객들의 추억을 간직하게 된다. [사진 박진배]
고객으로서 호텔을 이용할 때는 나름의 에티켓이 필요하다. 우선은 우리가 이 낯선 마을을 방문한 손님이라는 생각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마을을 지키고 가꾸는 사람들처럼 호텔에도 운영과 관리를 위한 사람들이 존재한다. 백스테이지에서 설비를 점검하고, 정원을 가꾸고, 음식을 준비하고, 깨끗함을 선사하고자 객실과 영업장을 청소하며 손님을 기다리는 직원들이다. 이들에 대한 고마움을 가지는 것은 손님으로서의 예의이자 호텔을 더 잘 즐기는 방법이다. 여행을 할 때, 모르는 마을을 방문할 때는 아무래도 신세를 지게 돼 있다. 손님의 입장에서 겸손하고 존중한다면 이들의 진심 어린 환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다른 손님에 대한 존중도 필수다.

많은 사람들이 어떤 호텔을 방문하는 건 자신들의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진정으로 고객이 되어 서비스를 받고 호텔의 문화와 라이프스타일을 즐기는 사람은 제한돼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처음에는 고객이 호텔을 선택하나 궁극적으로는 호텔이 고객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어울리지 않는 고객은 호텔이 외면하게 되고, 호텔은 품격을 갖춘 고객층을 구축하게 된다. 그 고객은 훗날 누구를 만나서도 자신이 머물렀던 호텔에 관해서 자랑을 할 수 있다. 이런 호텔은 우리에게 영감을 불러일으켜 주고 우리를 사랑에 빠질 수 있게 해준다. 마치 자연스럽게 우리가 살고 방문하고 싶은, 우리와 어울리는 마을이 정해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호텔은 보통 다른 나라, 다른 도시를 방문할 때 잠시 머물다 떠나는 곳이다. 버나드 쇼의 말과 같이 호텔의 큰 장점은 “일상으로부터의 벗어남”이다. 최소한의 짐으로 심플한 일상을 보낼 수 있는 라이프스타일의 경험이기도 하다. 호텔의 입장에서는 항상 낯선 방문객을 맞이한다. 그러면서 수많은 사람들의 추억과 사연을 품게 된다. 호텔이 매일 손님을 환영하고 배웅하는 장면을 반복하는 과정에서 외로움이 스쳐 가는 건 아마도 이 만남과 인연이 순간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세상에 잠시 머물다가는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다. 호텔에서 잠시 머무르는 시간을 즐길 수 없다면 우리 인생의 순간도 즐기기 어려울 것이다.

“나는 수많은 궁전과 대통령 관저를 방문해 보았다. 하지만 호텔에 앉아서 여유 있게 커피를 마시는 것만큼 즐거운 경험은 별로 없다” - 조세핀 베이커

박진배 뉴욕 FIT 교수 마이애미대 명예석좌교수. 뉴욕 FIT 교수 마이애미대 명예석좌교수. 연세대, 미국 프랫대학원에서 공부했다. OB 씨그램 스쿨과 뉴욕의 도쿄 스시 아카데미를 졸업했다. 『공간미식가』, 『천 번의 아침식사』 등을 쓰고, 서울의 ‘르 클럽 드 뱅’, ‘민가다헌’을 디자인했다. 뉴욕에서 ‘프레임 카페’와 한식 비스트로 ‘곳간’을 창업, 운영했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는 필자 사정으로 이번 주 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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