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사 갈림길서도 환자·동료부터 챙긴 '의사 임세원'[그해 오늘]

한광범 2022. 12. 31.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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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강북삼성병원 임세원 교수…망상 환자에 피살
위급한 상황서도 동료들에 걱정하며 범인 주의 끌어
유족들 "고인 뜻따라 환자 낙인 안돼"…조의금도 기부
복지부, 의사자 인정 안해 비판…법원 "의사자 맞다"

[이데일리 한광범 기자] 2018년 마지막 날 오후. 몇 해 전 양극성 정동장애(조울증)로 강북삼성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던 박모(당시 31세)씨가 병원을 찾았다. 그는 오후 4시께 병원에 도착해 과거 주치의였던 정신건강의학과 임세원(당시 47세) 교수 외래진료 접수를 했다.

평소 예약 없이 당일 진료가 쉽지 않았으나 임 교수는 자신의 환자였던 박씨를 배려하는 마음으로 당일 진료를 흔쾌히 수락했다. 외래접수 후 1시간 40분가량 지난 오후 5시40분 무렵 박씨에 대한 진료가 시작됐다. 퇴원 후 박씨의 상태는 더욱 악화된 상황이었다. 그는 ‘정부와 강북삼성병원이 나를 3차 세계대전의 전쟁 주동자로 만들기 위해 강제입원 시켰다. 그리고 내 머릿속에 소형 폭탄도 심었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고(故) 임세원 강북삼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의 발인식이 엄수된 지난 2019년 1월 4일 오전 임 교수의 영정이 서울 종로구 서울직십자병원 장례식장을 떠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박씨는 임 교수 진료실에 들어서자 대뜸 “퇴원 후 이상해졌다. 머릿속에 폭탄을 넣어 놓았다. 내 머릿속에 있는 폭탄을 제거해 달라”고 요구했다. 임 교수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병원 직원에게 비상벨을 눌러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박씨는 그러자 곧바로 진료실 출입문을 잠그고 미리 구입해 점퍼 속에 숨겨온 흉기를 꺼내 들었다.

다른 직원 위협 상황 우려해 직접 범인 주의 끌었다

놀란 임 교수는 곧바로 옆 진료실을 통해 복도를 뛰쳐나갔다. 그는 진료실 문을 열어준 간호사 A씨에게 “도망가”라고 소리쳤고, 박씨도 곧바로 임 교수를 뒤쫓아 출입문 쪽으로 향했다. A씨가 진료실 출입문을 닫으며 제지하자 박씨는 흉기를 들고 A씨에게 달려들다가 넘어졌다. 이 순간 임 교수는 A씨 등 다른 직원들의 안전을 걱정하며 현장을 벗어나지 못하고 박씨의 주의를 끌었다.

박씨는 임 교수를 보자마자 복도에서 다시 뒤쫓아갔다. 임 교수는 박씨가 쫓아오는 상황에서도 인근에 있던 간호사들에게 “신고하고 도망가라”고 말하며 손짓으로 위험을 알렸다. 임 교수는 결국 복도에서 박씨가 마구 휘두른 흉기에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박씨는 쓰러진 임 교수를 향해 “이 정도도 각오 못했어?”라고 소리를 지르며 발길질을 했다.

범행 후엔 병원 복도에서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병원 관계자들이 임 교수에게 달려들어 긴급하게 응급조치를 하는 상황에서도 태연히 바라보며 담배를 계속 피웠다. 곧바로 경찰이 출동해 박씨를 체포했고, 임 교수는 병원 응급실로 이송돼 긴급수술을 받았다. 하지만 흉기로 치명상을 입은 임 교수는 결국 당일 저녁 사망했다.

경찰 조사 결과 박씨는 2015년 9월23일 집안에서 물건을 부수고 집에 불을 지르겠다고 위협하며 가족에게 칼을 들이대는 극단적 행동을 했다. 결국 박씨 가족들은 강북삼성병원에 입원치료를 시켰다. 하지만 박씨 상태는 그 이후 더욱 흉폭해져 갔다. 추가적인 치료를 거부하는 것은 물론 자신을 입원시켰다는 이유로 가족들에게 더욱 폭력적인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2018년 2월엔 동생에게 “총으로 죽이겠다”고 협박하기도 했다.

박씨는 경찰에 체포된 후에도 아무런 반성도 하지 않았다. 그는 “강북삼성병원이 머릿속에 폭탄을 설치한 만큼, 정당방위에 의한 살인이었다. 죄책감을 전혀 느끼지 않는다”며 “추가로 죽여야 할 사람이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국회, 의료진 폭행 처벌강화 ‘임세원법’ 통과

1심은 “반성이 없는 피고인의 태도 등을 종합하면 검찰의 구형대로 무기징역형 선고를 검토할 수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조현병이 이 사건 범행이 원인이 됐다고 인정되는 점을 감안해 유기징역형으로 법률상 감경을 한다”며 징역 25년과 함께 치료감호와 전자발찌 20년 부착을 명령했다. 박씨는 이에 불복해 상소했지만 2심과 대법원의 판단도 1심과 같았다.

고(故) 임세원 교수 사망 1주기인 2019년 12월 31일 강북삼성병원에 마련된 추모 공간. (사진=강북삼성병원)
대낮 병원에서 의사가 환자에 의해 살해된 사건은 사회적으로 큰 충격을 줬다. 임 교수가 평소 마음이 아픈 환자들에 깊은 애정을 보이며 자살 예방에 힘써왔기에 의료계의 충격은 더 컸다. 국회는 사건 이후 의료기관 내 의료인과 환자의 안전을 강화하고 의료인 폭행 시 가중처벌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임세원법(의료법 개정안)을 이듬해 4월 통과시켰다.

이 같은 상황에서도 유족들은 고인의 뜻이 훼손되지 않길 호소했다. 유족들은 큰 충격 속에서도 평소 우리사회 조현병 환자들에 대한 편견이나 혐오가 발생하지 않길 바라던 임 교수의 평소 뜻과 다르게 이번 사건으로 자칫 조현병 환자에 대한 사회적 낙인이 생길 것을 우려하기도 했다.

유족들은 장례식장에서 “유족의 뜻은 귀하고 소중했던 우리 가족의 자랑이었던 임세원 의사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라며 “의료진의 안전과 더불어 모든 사람이 정신적 고통을 겪을 때 사회적 낙인 없이 적절한 정신 치료와 지원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조의금을 정신질환 환자 치료와 연구에 사용해달라며 기부하기도 했다.

보건복지부는 2019년 3월 유족이 신청한 의사자 인정 신청에 대해 “임 교수가 직접적·적극적 구조행위를 했다고 볼 수 없다”며 받아들이지 않아 거센 비판을 받기도 했다. 서울행정법원은 2020년 9월 유족이 제기한 소송에서 “임 교수가 진료실을 나온 후에 안전한 대피경로를 포기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위험을 알리기 위해 직접적·적극적 구조행위를 한 만큼 의사자에 해당한다”며 복지부 판단을 뒤집었다.

한광범 (totoro@e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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