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 없이 장수하면 형벌, 감사 마음 갖고 ‘소식다동’ 해야
[지혜를 찾아서] ‘국민 정신건강 주치의’ 이시형 박사
‘국민 정신건강 주치의’ 이시형 박사를 만나러 간다고 하자 지인이 이런 부탁을 했다. 지인은 강남에서 건실한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다.
이시형 박사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정신과 의사이자 뇌과학자다. 1982년 출간돼 200만부가 팔린 『배짱으로 삽시다』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112권의 저서를 냈다. 아흔의 나이가 무색할 만큼 열정적으로 강의와 저술, 각종 사회사업을 하고 있다.
해가 바뀌는 즈음에 ‘멋지게 나이 드는 지혜’를 찾아 이 박사의 연구실을 향했다. 그는 한 시간 넘는 인터뷰 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달변을 이어갔다.
지하철 손잡이 안 잡으면 밸런스 운동
Q : 여전히 꼿꼿하고 매력적이십니다. 건강 비결을 묻는 분들이 많죠?
A : “건강을 위해 따로 뭘 하는 건 없습니다. 대신 건강에 좋은 습관이 몸에 배 있지요. 밤 11시 이전에 자고, 아침 5시 전에 일어납니다. 커피를 내려서 한 잔 마시면서 조간신문 보고, 가벼운 운동과 명상을 40분 정도 합니다. 운동은 푸시업과 스쿼팅(허리를 편 상태에서 앉았다 일어나기)을 주로 하지요. 50년을 넘게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했는데 지금 생각해도 참 좋았던 것 같습니다.”
Q : 나이가 들면 치아와 눈 건강에 더 신경을 써야 할 텐데요.
A : “치아 관리는 먹고 나면 꼭 양치하는 정도지요. 제가 책을 많이 읽기 때문에 눈을 좀 혹사하는 편인데요. 대신 한 권에 30분 정도로 빨리 읽습니다. 중요한 키워드 위주로 점을 찍듯이 읽는 점독(點讀)이 가능하니까요. 광화문 교보문고에 가면 책 대여섯 권은 한 자리에서 읽고 나옵니다. 저 같은 사람 많으면 서점 운영이 어렵겠죠. 하하.”
Q : 요즘도 지하철 요금을 내고 타시나요.
A : “그렇습니다. 지하철이 굉장한 적자라고 들었습니다. 65세 이상은 지하철을 무료승차 할 수 있는데 요즘 65세를 노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저는 아직은 현역이기 때문에 나라에 빚을 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아직 현역이라는 자체가 저한테는 큰 정체성의 하나거든요. 그렇다고 다른 사람에게 ‘지하철 돈 내고 타자’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Q : 경로석 없애는 게 좋다고도 하셨네요.
A : “저는 경로석 근처도 안 갑니다. 일반석에 앉아 있는 젊은이들도 저를 보면 ‘자리 양보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갈등하는 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아예 출입구 쪽에서 손잡이도 안 잡고 서서 갑니다. 객차가 덜컹덜컹 움직이면 중심을 잡아야 하니까 밸런스 운동도 되죠. 지하철에서 내려 계단을 보면 ‘나를 운동시켜 주려고 여기 있구나’ 하면서 걸어 올라갑니다. 대신 내려갈 때는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하지요.”
Q : 노인 냄새라는 게 있잖습니까.
A : “나이가 들면 세포도 늙어가니까 자연히 노인 냄새가 나게 돼 있습니다. 특히 술·담배를 많이 하시는 분은 더 역한 냄새가 납니다. 몸을 자주 씻고, 좋은 옷 아니라도 깔끔하게 자주 갈아입는 게 꼭 필요합니다.”
Q : 새 책 『신인류가 몰려온다』에서는 ‘장수의 늪’이라는 표현을 쓰셨는데요.
A : “우리나라 평균수명이 83세인데 건강하게 사는 건강수명은 73세거든요. 83에서 73을 뺀 그 10년이 바로 장수의 늪입니다. 오래 살수록 건강·돈·관계가 중요하고 그 중에서도 가족을 포함한 인간관계가 정말 중요합니다. 장수의 늪에 빠지면 오래 사는 게 축복이 아니라 형벌입니다. 제가 이제 딱 90이 됐는데 주위 친구들한테서 가장 많이 듣는 게 ‘내가 이렇게 오래 살 줄 몰랐다’는 말입니다.”
Q : ‘안 해준다 족(族)’이 많다고 하셨네요.
A : “정부에서도 옳게(제대로) 안 해준다, 보조금도 옳게 안 나온다, 애들도 옛날만큼 용돈을 안 준다…. 내 기대만큼 안 해 주니까 섭섭함이 쌓이는 겁니다. 그래서 자꾸 불평을 하는 친구들이 많은데 그런 사람은 자연스럽게 모임에서도 기피하게 됩니다. 우리 세대가 ‘준비 안 된 채 장수시대를 맞은 첫 세대’입니다. 가진 게 없으니까 자꾸 ‘안 해준다’ 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죠.”
Q : 이러다가 혐노(嫌老)감정이 세대갈등으로 번지고 계급투쟁까지 갈 수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A : “노인을 좋아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좀 더 지나면 노인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 미워하는 세대가 나옵니다. 하루 종일 격무에 시달리다 파김치가 돼 퇴근길 지옥철에 몸을 실은 젊은이가 경로석에 앉아 큰 소리로 얘기하고 있는 노인들을 보면 어떤 생각을 할까요. 게다가 노령 인구가 늘면서 ‘노인표’가 선거 결과를 좌우합니다. ‘내가 죽으라고 일해서 번 돈이 저 영감님들한테 다 돌아간다’고 생각하면 갈등은 점점 더 깊어지겠죠.”
Q : 갈등을 줄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A : “가장 중요한 건 평생 현역으로 살겠다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현역으로 산다는 건 자율적, 자주적이고 책임 있는 생활을 한다는 뜻이거든요. 세계 5대 건강 장수촌을 ‘블루존’이라고 하는데 그곳 노인들의 공통점은 존경을 받는다는 겁니다. 평생 일을 손에서 놓지 않기 때문이죠. 할아버지가 농사지은 감자를 먹고 학교에 다니니까 존경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겁니다.”
Q : 노인력(老人力)이라는 표현도 쓰셨죠.
A : “나이를 먹지 않으면 절대 얻을 수 없는 경험과 지혜, 슬기를 말하는 거죠. 요즘 정당이고 어디고 ‘젊은 피 수혈’을 강조하는데 ‘늙은 피’도 꼭 필요합니다(웃음). 젊은 사람끼리 모이면 행동과 결정은 빠르지만 실수할 가능성도 큽니다. 선진국에서 젊은 사람이 수상이나 대통령이 되는 경우도 많지만 그 뒤의 캐비닛(내각)에는 지긋한 원로들이 포진하고 있어요.”
Q : 평생 현역으로 살려면 60대가 가장 중요하다고 하셨죠.
A : “60대가 가장 허무한 나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평생 버팀목이었던 직장에서 나오면서 뭘 해야 할지 막막하죠. 60이면 정년이 된다는 걸 아는데도 거기에 대한 준비를 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프랜차이즈 가게를 하려고 해도, 설렁탕집을 차리려고 해도 최소 몇 년간 준비해야죠. 지금 뭔가를 시작하려면 수입보다 ‘보람’을 더 생각해야 합니다. 내 경험과 지식, 기술을 이 사회를 위해 쓰겠다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A : “그렇지 않은 것 같아서 걱정입니다. 일본만 하더라도 고령사회가 되면서 초고령사회에 대한 준비를 동시에 했습니다. 우리도 2005년에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가 만들어져서 대통령이 당연직 위원장이고 현재 부위원장은 나경원 전 의원입니다. 우리 아이들의 생존과 나라의 존망이 달린 문제를 고민해야 하는데 나 부위원장이 최근 국민의힘 당대표 쪽에 마음이 가 있는 것 같아서 걱정입니다(웃음).”
‘계속의 힘’ 믿고 작은 것부터 실천해야
Q : 세로토닌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요.
A : “자기조절력의 원천이기 때문이죠. 우리나라 사람의 가장 큰 문제가 감정 조절이 잘 안 된다는 겁니다. 고속도로 한가운데 차를 세울 정도로 보복운전이 극단으로 갑니다. 국회든 어디든 합리적인 토론이 없어요. 폭력 사범은 미국·일본보다 16배나 높다고 해요. 세로토닌 운동을 통해 자기조절력만 키울 수 있다면 대한민국은 세계 1등이 될 겁니다.”
Q : 세로토닌이 잘 나오게 하려면?
A : “햇볕을 받으며 20분 정도 걷는 게 가장 좋습니다. 짧은 명상도 도움이 되고요.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만나면 반갑게 허그 하는 것도 권하고 싶네요. 소식다동(少食多動·적게 먹고 많이 움직임), 음식은 천천히 꼭꼭 씹어서 먹고, 주차는 가급적 멀리 떨어진 곳에 하는 게 좋아요. 간단한 요리를 하는 것도 뇌 활성화에 도움이 됩니다. 화가 날 때는 천천히 몇 번만 심호흡을 하고, 논쟁을 할 거면 걸으면서 하세요.”
들어 보면 특별한 것도 없다. 문제는 실천이다. 이 박사에게 ‘평생을 이끌어 온 좌우명’을 물었더니 ‘계속의 힘’이라고 했다. “저는 반짝반짝하는 재주는 없어요. 대신 굉장히 꾸준하고, 중간에 쉽게 포기하지 않습니다.”
멋지게 나이 들기 원하는 독자를 위해 새해를 맞아 꼭 해주고 싶은 말씀을 부탁했다. “운동을 좀 열심히 해 줬으면 좋겠습니다. 나이 들수록 두 다리로 서고 걸을 수 있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그런데 습관들이기 정말 힘든 게 운동하는 겁니다. 부담스럽지 않고 재미있는 걸 찾아서 꼭 실천하세요.”
이시형. 경북대 의대를 졸업하고 미국 예일대에서 정신과 신경정신과학 박사후과정을 밟았다. 성균관의대 교수, 강북삼성병원 원장을 역임했다. 실체가 없다고 여겨지던 ‘화병(HWA-BYUNG)’을 세계 정신의학 용어로 만들었으며, 국내 뇌과학의 대중화를 이끈 선구자다. 2007년 자연치유센터 힐리언스 선마을을, 2009년에는 세로토닌문화원을 설립해 국민의 건강한 생활습관과 행복한 삶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
정영재 스포츠전문기자 jerr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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