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문턱에서도 희망은 옵니다”
기적의 생환 광부 박정하씨 신년 메시지
“모든 것이 기적이었죠.”
지난 11월 4일 오후 11시 3분. 두 명의 광부는 부축을 받으며 두 발로 걸어서 갱도 밖으로 나왔다. 사고부터 구조까지 221시간. 구조대는 구조 전날까지도 생사조차 확인하지 못했다. 추가 붕괴로 구조작업에 차질을 빚었다. 이런 와중에도 총 9개의 구멍을 뚫으며 필사적으로 매몰 광부를 찾아 나선 구조대와 동료 광부들이 올린 개가였다. 며칠 전 벌어진 이태원 참사로 침울해진 국민에게 작은 위로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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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장 환경·채굴 방식 50년 전 그대로, 이젠 확 변해야죠
Q : 생환 후 어떻게 지내고 있나.
A : “매일 같이 인터뷰에 응하고, 쉬는 날에는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고 있어요. 육체적인 부분은 거의 회복이 됐는데, 정신적인 트라우마가 아직 남아있거든요. 낮에는 멀쩡하다가도 해가 지면 불안감이 찾아와요. 자려고 누우면 환청이 들리기도 해요. 갱 내부와 외부를 이어주는 인터폰 벨 소리가 자주 맴도는데, 사고 당시에는 전기가 끊겨서 듣지 못했거든요. 그 소리가 얼마나 듣고 싶었으면 환청으로 들릴까 싶어요. 깊은 잠에 들지 못해 오전 3시면 어김없이 눈이 떠지고, 어둠이 무서워 방마다 돌아다니며 불을 켜곤 합니다.”
Q : 사고 현장에서는 무슨 생각을 했나.
A : “극한의 상황을 겪은 건 정말 큰 고통이고, 두려움이었지만 사고를 계기로 모든 것에 대한 소중함을 새삼스레 깨닫게 됐습니다. 특히 가족에 대한 소중함이 더 깊어졌어요. 아내에게 ‘고맙다’ ‘미안하다’ 이 말을 꼭 전하고 싶어 온 힘을 다해 죽음의 공포와 싸웠습니다. 갓 태어난 아이처럼 사는 그 자체가 기쁩니다. 앞으로 주어진 것들에 대한 소중함을 잘 간직하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Q : 언론에 적극적으로 나선다.
A : “주치의는 치료를 위해 인터뷰도 자제하라고 합니다. 사고 당시를 자꾸 떠올리다 보니 치료에 조금도 도움이 안 된다면서요. 하지만 저는 이번 기회를 통해 정부와 관련 기관, 광산 업주들에게 경종을 울리고 싶은 마음이 큽니다. 지금 이 시각에도 일하고 있는 동료 광부들이 얼마나 위험한 환경에서 일하고 있는지, 어떤 처우 개선이 필요한지 국민은 잘 모르시잖아요. 제가 겪은 고통을 감수하고라도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누가 하겠어요. 살아 돌아온 저의 책무이기도 합니다.”
A : “돌아보건대, 평소 뭐든 철저하게 준비하는 성격 덕분이었던 것 같아요. 사고가 발생했던 날은 새로운 막장에 투입된 지 나흘째 되던 날이었는데, 첫날부터 현장을 보고 필요한 물건을 하나씩 가져다 두기 시작했어요. 사고 이틀 전에는 1m 80㎝짜리 나무판 20여장 가져다 뒀고요. 우연처럼 느껴지지만, 우연을 가장한 행운이었던 것 같아요. 구조된 이후 ‘박정하, 네가 진짜 준비성 하나는 최고다’라며 스스로를 칭찬하기도 했습니다.”
Q : 구조 이후 화제가 됐던 ‘커피믹스’도 그중 하나였다.
A : “사고 당일, 입갱하기 전 동료에게 커피믹스 170여 개쯤 들어있던 박스를 통째로 들고 오라고 했어요. 그런데 봉지를 가져오더니 낱개로 담더라고요. 제가 ‘그냥 통째로 들고 오라니까?’라고 했는데 ‘내일 또 가지고 가면 되죠’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한 30여 개의 커피믹스를 챙겨갔어요. 3일 정도 먹으니까 다 떨어졌긴 하지만, 생존에 정말 큰 도움이 됐죠.”
Q : 새해 ‘희망 전도사’로서 국민에게 응원의 한마디를 전한다면.
A : “마지막 구조되던 날에는 모든 게 다 떨어졌었어요. 난들 왜 불안하지 않았겠어요. 하지만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죽음의 문턱에서도 희망이 찾아오더라고요. 2022년도 어김없이 참 힘든 한 해였습니다. 늘 희망차고 좋은 일만 있으면 좋겠지만, 내년에도 아마 이 힘든 것을 똑같이 겪게 되지 않을까 싶어요. 하지만 그럴 때일수록 더욱 웃음을 잃지 마시고, 긍정적인 생각으로 살아가신다면 저처럼 새로운 빛, 희망을 다시 마주할 날이 오리라 생각합니다.”
오유진 기자 oh.yoo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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