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주말] 황야에 핀 꽃으로 만든 술, 허공에 대고 건배!
술은 책과 함께 마셔야 한다고 생각한다. 책을 골라 읽듯이 술도 술꽂이에 꽂아두고 골라먹는 사람으로서 드리는 말씀이다. 얼마 전에도 책을 읽다가 술을 마셨다. 그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폭풍의 언덕>을 읽다가였다. 전에도 읽었지만 얼마 전에 새로 번역된 버전으로 <폭풍의 언덕>을 읽다가 생각했다. 아, 이 소설의 주인공은 황야이거나 히스구나. 캐서린이나 히스클리프가 아니라 말이다. 사람이 아닌 자연 환경이 주인공이고, 캐서린이나 히스클리프는 황야나 히스의 인간형이라고까지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자 참을 수 없이 헤더 허니가 들어간 술이 마시고 싶어졌다. 황야의 히스와 함께 일렁이던 나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헤더(heather)의 군락이 히스(heath)고, 히스는 황야에서 자란다. 황야에서 난 그 꿀이 헤더 허니다. 헤더 허니 향이 나는 술들을 몇 개 알고 있지.
일단 위스키로는 하일랜드 파크 18년산, 딘스톤 12년산, 발렌타인 21년산 등등. 하지만 나는 진짜 헤더 허니가 들어간 술, 드람뷔가 마시고 싶었다. 이 술은 헤더 허니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왔다. 일단 냄새를 맡았다. 꿀 냄새가 진동하다 못해 코를 찌를 거라고 생각했지만 예상과 달랐다. 처음에 강하게 난 냄새는 어디선가 맡아본 적이 있는 쌉쌀한 허브향이었다. 뭐지? 그건 페르노에서 나던 그 냄새였다. 펜넬이거나 리코리스의 냄새라고 추측되는.
병을 보니 ‘스카이 섬의 술’ 아래 ‘스카치 위스키와 헤더 허니, 허브 앤 스파이스’라고 쓰여 있었다. 과연. 도수는 40도. 또 이런 말이 있었다. 1745년 잘생긴 찰리 왕자가 스코틀랜드 서부 해안에 상륙했다. 그 다음에도 잘생긴 찰리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왕위를 되찾으려는 불 같은 야망을 품고 군대를 소집한다. 초반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으로 쿨로든(Culloden) 전투에서 패했고, 맥키넘 가문의 비호 아래 스카이 섬으로 도망간다. 감사의 표시로 자신에게 남은 유일한 재산인 대대로 내려오는 엘릭서의 레시피를 맥키넘에게 준다.
엘릭서(elixir)가 무엇이냐? 동양적 개념으로 보면 만병통치약이고, 서양의 개념으로는 영약이자 묘약이다. 왕실 대대로 내려오던 왕실의 비기 같은 것이라고 하는데, 그걸 자신을 지켜준 스코틀랜드 사람에게 준 것이다. 잘생긴 찰리 왕자라고 불린 이는 영국의 찰스 에드워드 스튜어트로 할아버지는 영국 왕이었다가 폐위되었고, 아버지는 잃어버린 왕위를 요구하나 실패했고, 본인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걸 잃고 남은 유일한 재산이라고 과장되게 표현된 것이 드람뷔의 레시피였다. 왕좌나 영토는 잃더라고 머릿속에 있는 것은 빼앗길 수 없으니. 그 뜻을 유추하기 어려운 드람뷔라는 단어는 고대 게일어에서 온 것으로 ‘만족스러울 수밖에 없는 음료’라는 뜻이라고. 이전의 경험을 떠올려보면 내게 드람뷔는 ‘만족스럽지 않을 수밖에 없는 음료’에 가까웠지만 다시 시도해보기로 했다. 그때는 드람뷔만 먹지 않았으므로.
드람뷔와 위스키를 섞은 칵테일을 마셨었다. 러스티 네일. 이것 말고는 드람뷔가 칵테일에 쓰이는 걸 본 적이 없다. 내가 마신 러스티 네일은 최악이었다. 스카치 위스키와 드람뷔를 섞는 게 러스티 네일이다. 얼음을 넣기도 하고 넣지 않기도 하고. 전혀 복잡하지 않다. 기교가 거의 필요 없는 칵테일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러스티 네일이 원래 그런 맛인가 싶었고, 관심을 끊었다.
드람뷔를 먼저 마셨다. 와. 이 기분 좋은 꿀맛. 영약이라는 이야기를 들어서 그런지 몸에도 좋은 듯한 착각이 들지만, 40도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용기를 내서 러스티 네일도 만들었다. 드람뷔 1 위스키 3의 비율로 할 수도 있지만 나는 1대 1의 비율로 시도하기로 했다. 얼음은 넣지 않고. 또 불균질한 맛을 느끼고 싶어 젓지 않기로. 두 가지 스타일로 해보기로 했다. 하나는, 러스티 네일의 고전적인 레시피대로 스카치 위스키를 넣는 것. 싱글 몰트가 아니라 블렌디드 스카치를 넣기로 했다. 또 하나는, 라이 위스키를 넣어보기로 했다. 점성이 강해 끈끈하게 묻어나는 드람뷔의 형질에 역시나 끈덕끈덕한 라이 위스키가 어울릴 것 같아서.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블렌디드 스카치와 섞은 것은 조화로웠고, 라이와 섞은 잔은 현대적이었다. 정말 맛있었다. 감미로운데, 단순한 감미로움이 아니라서. 러스티 네일(Rusty Nail)이라는, ‘녹슨 못’이라는 뜻의 이 술에 어울리지 않는 호사스러운 맛이었다. 나는 네그로니나 키르 로얄을 좋아하는데, 그에 견줄 정도로 밸런스가 좋은 칵테일이었다. 내가 최악이라고 느꼈던 그날의 러스티 네일은 아드벡을 섞은 것이었다. 아일라 위스키 중에서도 맛과 향이 강한 아드벡을 넣은 호기로운 바텐더였으니 드람뷔와 아드벡의 비율도 1대1이었을 리 없다. 아마 1대 4의 비율로 탄 러스티 네일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생각에 드람뷔와 러스티 네일을 색다르게 하는 것은 헤더 허니의 존재감이다. 헤더의 생육 환경에 대해 알아보다 놀라운 것을 알게 되었다. 헤더와 히스는 황야에서 자라는 거의 유일한 식물이라는 것. 황야라는 이름이 붙을 정도로 황량한 그 땅이 황량해진 것은 식물이 자라기 힘든 극도의 산성 토양이기 때문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스는 자란다. 황야에서 피우는 꽃이 헤더 허니가 되는 것이고. 히스의 썩은 뿌리가 이탄, 그러니까 피트향을 만들어내는 그 이탄의 원료임도 알게 되었다. 과격하게 말하면, 히스가 피트이고, 피트가 히스인 것이다. 놀라움!
<폭풍의 언덕>을 보다가 히스 밭에 취해 헤더 허니가 들어간 술을 마시고 있으려니 충만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드람뷔를 마시다 내가 전에 낸 책에서 이런 문장을 쓰기도 했음을 발견했다. “(…) 꽃은 아카시아처럼 다발로 달리고, 색은 주로 마젠타 계열의 짙은 분홍색인 둣하고, 잎은 솔잎처럼 가늘고 뾰족하다. 향기가 얼마나 짙은지, 어떤 계열의 냄새인지, 아니면 리시안셔스처럼 별다른 냄새가 느껴지지 않는 꽃인지 무척이나 궁금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히스 군락이 폭풍이 치는 언덕에서 어떻게 휘날릴지가 가장 궁금하다. 다발로 달린 꽃들이 폭풍에 시달리다 못해 공중에서 터져버리는 것인지 (…).”
요크셔든 스코틀랜드든 언젠가 가게 된다면 히스를 보기 위해서일 듯하다. 스코틀랜드 아일라 섬에 가면 공기 중에도 피트 냄새가 막 떠돈다던데, 히스 냄새를 찾기 위해 킁킁거리다 한잔하고 싶다. 허공에 대고 건배를 해도 좋을 거라는 생각.
스코틀랜드에서 건배는 이렇게 한다고 한다. 슬란쳐(slain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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