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인간으로 살게 한 독서의 보물지도…여러분 윗목에 두고 갑니다[은유의 책 편지]

기자 2022. 12. 30.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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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것을 보았어
박혜진 지음
난다 | 328쪽 | 1만6000원

히트곡이 하나뿐인 가수는 전국을 다니면서 맨날 같은 노래만 하고 살 텐데 얼마나 지루하고 쓸쓸할까,라는 나의 말을 듣던 선배가 그게 뭐가 어떠냐며 그랬습니다. 어차피 청중은 처음 듣는 노래일 테고 자기 노래로 거기 온 사람들에게 힘을 주었으니 가수로서 본분을 다한 거라고요. 선배의 말에 크게 놀랐죠. 그때가 내 나이 서른. 철없이 남의 삶을 함부로 평했구나 싶어 급히 반성을 하면서도 선배의 말이 이상하게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날의 대화가 한번씩 떠오릅니다. 유명해지는 건 고사하고 평생 노래하자면 체력이 뒷받침돼야 하고 내세울 히트곡 하나쯤은 필수죠. 또 자기를 기억하고 불러주는 이가 지상에 존재해야 하는데, 이 모든 게 당연하게 주어지는 게 아님을 어느새 터득해가는 나이가 된 것입니다. 우린 대부분 무명가수에 가까운 삶을 살아가며 그게 쉬운 일도 그리 비관할 일도 아니라는 것도요.

제가 몸담은 출판계라고 다를까요. 책이 나오고 언론과 대중의 주목을 받는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출판사가 모든 책에 마케팅 비용을 들이진 못해요. 적지 않은 책들이 시한부 운명이 예비된 채 태어납니다. 십년 전 나온 제 첫 산문집은 판매 부진을 이유로 3년 만에 절판됐죠. 당시에 낙담했으나 다행히 그 책을 아끼는 동네책방 주인이 ‘절판기념회’ 자리를 열어준 덕분에 슬픔은 얼마 안 가 기쁨이 되었고요, 그 슬픔과 기쁨이 뒤엉킨 감정은 저를 또 쓰게끔 등떠밀었습니다.

한번은 친구의 책이 나왔을 때도 별다른 공식 행사가 없다는 말을 듣고 ‘그럼 우리가 하자’며 의기투합했습니다. 친구 다섯이서 카페를 빌리고 문장카드를 만들고 꽃시장에서 꽃을 사서 장식하고는 우리끼리 척척 북토크를 열었습니다. 신나는 경험이었죠. 앞으로도 품앗이처럼 책을 내면 ‘이러고 놀자’는 약속을 했답니다. 이렇게 책은 출판사에서 나오지만 계속 쓸 힘은 동료들에게 나오기도 했습니다.

삶에서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 차근히 배워가는 중입니다. 사람도 사물처럼 소모되고 버려지고 뜨고 지고 빠르게 교체되는 세상의 질서에서 인간의 온도를 유지해주는 건 촛불같이 흔들리는 작은 마음들. 그것을 꺼뜨리지 않으려는 노력을 기울입니다. 읽으려는 마음, 들으려는 마음, 투정하는 마음, 기대려는 마음, 다독이는 마음, 들썩이는 마음이 더해지고 포개지면 계속 노래하고 살아갈 수 있음을 보았거든요.

본다는 것은 힘이 세죠. 먼저 그것을 보았던 선배와 선배 같은 책들의 언어를 길잡이 삼다보니, 저도 뒤늦게나마 유명과 무명이 구획된 세상 너머로 시야를 넓힐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언제나 곁에 있는 책의 공로가 큽니다. 나를 인간으로 살게 한 책들이라면 남도 살릴 수 있다는 간곡한 마음으로 ‘책 편지’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도합 44편의 편지를 썼고 지금 저는 마지막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미처 소개하지 못한 책더미 때문에 미련이 남았는데, 때마침 우리 책 편지의 엔딩에 맞춤한 책이 세상에 나왔습니다.

제목이 <이제 그것을 보았어>, 부제가 ‘박혜진의 엔딩노트’예요. 대개 작품의 첫 문장을 중시하는 풍토에서 저자는 “아무리 좋은 작품도 적당한 곳에서 끝나지 않으면 태작이 된다”며 마지막 문장을 화두 삼아 <이방인> <도둑맞은 가난> 등 각 작품을 소개해요. 엔딩 수집가이자 연구자는 말합니다. “소설의 끝은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근시의 인간에게 잠깐만 허락되는 신의 눈이다.”

처음엔 잠들기 전에 한편씩 읽으려고 책을 폈으나 나중엔 자세를 고쳐 앉았습니다. 저자 박혜진은 12년차 편집자이자 8년차 문학평론가죠. 정직하게 작품을 완주하고 치열하게 언어를 골라내는 직업을 병행하는 신뢰할 만한 독서 이력의 소유자입니다. 소설에 나오는 인물의 생에 푹 잠겼다가 나온 그는 마치 인생 2회차를 사는 듯한 위엄이 깃든 목소리로 돈에 대해, 죽음에 대해, 사랑에 대해, 고통에 대해 그러니까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엔딩노트는 곧 ‘인생수업 노트’ 그 자체가 되죠.

“인생의 상온은 윗목이다. 따뜻함은 거저 주어지지 않는다. 열기는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사랑이 필요한 건 삶의 온도가 그리 높지 않기 때문에”라는 대목은 무명가수의 삶을 옹호하는 선배의 말에 대한 부연으로 다가왔어요. “내게 어른이란 배경이 돼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 주인공이 아니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상태의 다른 말”이란 문장 앞에서는 내가 있어야 할 삶의 자리가 어디인지 헤아려보게 되었습니다.

“책을 통해 대비할 수 있는 일이란 없다. 벌어질 일은 벌어지고 만다”지만 저자 박혜진은 책의 엔딩에서 “어떤 밤은 문학만이 나를 살려두었다”고 뜨겁게 고백합니다. 도통 무용해서 나를 떠나지 않는 책. 한 사람을 살려내고 다른 세계로 데려다준 ‘독서의 보물지도’를 여러분 생의 윗목에 두고갑니다. 안녕!

<시리즈 끝>

은유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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