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 인간 펠레

이기수 기자 2022. 12. 30.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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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 때 첫 출전한 1958년 스웨덴 월드컵에서 우승한 뒤 선배 품에 안겨 울고 있는 펠레. AP연합뉴스

벌써 45년 전이다. 1977년 미국에서 ‘축구 황제’ 펠레의 은퇴 경기가 열렸다. 그는 전반전은 마지막 몸담은 뉴욕 코스모스팀, 후반전은 15살에 입단해 18년간 뛴 브라질 산투스팀 옷을 입었다. 축구계 최고 상인 발롱도르도 유럽 선수만 주던 때였다. MZ세대는 낯설 흑백 사진과 영상으로 남아 있는 삼바축구의 영웅, 펠레가 30일 암투병 끝에 영면했다. 향년 82세.

삶은 숫자로 남았다. 1958년(스웨덴)·1962년(칠레)·1970년(멕시코)에 월드컵 우승컵을 세 번 품은 유일한 선수이고, 월드컵 최연소 득점 기록(만 17세)도 갖고 있다. 생애 1281골을 넣고, 92번 해트트릭을 했다. 펠레는 100m를 10초대에 뛰고 제자리에서 120㎝를 점프한다. 두세 명 쉽게 제치는 기술, 강력한 롱슛과 가위차기, 헛다리짚기, 173㎝ 단신 공격수의 고공 헤더, 창조적 패스…. 그는 2200평 축구장을 예술무대로 승화시킨 천재였다. 무하마드 알리(복싱)와 마이클 조던(농구)을 넘어,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1999년 올림픽에 출전한 적 없는 그를 ‘20세기 최고 스포츠인’으로 꼽았다.

인간 펠레의 진면목은 따로 있다. 그는 브라질 빈민촌 모래밭에서 공과 코코넛으로 드리블을 익히며 자랐고, 백인 전유물이던 축구에 흑인 시대를 열었다. 사회사업가·축구해설가·행정가로도 살았다. 그가 1969년 찾은 나이지리아에선 내전이 이틀간 멈췄고, 문어보다 승부를 못 맞히는 ‘펠레의 저주’로 월드컵마다 웃음을 줬다. 1995년 진보적인 카르도주 정부에선 3년간 체육부 장관을 맡았다. 아벨란제 전 FIFA 회장이 이끈 ‘축구 마피아’의 부패·탈세에 맞섰고, 선수와 팬의 권익을 높이는 개혁을 이뤄냈다. 그 후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브라질인”으로 그를 칭송한 이가 룰라였다.

남긴 말도 따뜻하다. 그는 “나는 흑인도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증거”라 했고, “가난에서 어린이를 구하는 게 월드컵 결승전 골보다 기분 좋은 일”이라 했고, “배움을 멈추지 말라”고 했다. 평생 마라도나와 험담을 주고받은 그는 메시에겐 “월드컵 우승할 자격 있다”, 음바페에겐 “축구의 미래”라고 덕담했다. 애도하는 세계인에게 ‘10번의 전설’이 남긴 유언은 네 마디였다. “사랑하고 사랑하고 사랑하라 영원히.” 굿바이 펠레.

이기수 논설위원 ksl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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