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눈물과 축구 황제의 탄생...그리고 다시 아버지의 품으로 [와이파일]

김재형 2022. 12. 30.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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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브라질에선 제 4회 월드컵 대회가 열렸습니다. 브라질에서 열린 첫 월드컵입니다. 개막 날짜를 검색해보니 현지 시각으로 6월 24일, 지구촌 축구 축제가 막을 올린 비슷한 시각, 브라질 반대편 한반도에선 동족상잔(同族相殘)의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1950년 당시 우승 후보는 개최국 브라질이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브라질은 축구 강국이었습니다. 전설 지지뉴를 앞세운 브라질은 역대급 전력으로 손꼽혔습니다. 홈 관중의 열광적인 응원 속에 브라질은 결승까지 압도적인 경기력으로 쾌속 질주했습니다. 준결승까지 5경기에서 4승 1무승부를 거두는 동안 22골을 몰아쳤습니다. 4강까지 오른 다른 팀보다 거의 10골을 더 넣었습니다.

결승 상대는 1회 대회 우승국 우루과이. 브라질과 달리 우루과이는 어렵게 결승까지 올라왔습니다. 모든 사람은 브라질의 우승을 예상했습니다. 당시 국제축구연맹 피파를 이끌었던 줄리메 회장마저 우승 축하 연설문을 브라질에 맞춰 미리 준비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결승전은 브라질 축구의 심장 마라카낭 경기장에서 열렸습니다. 당시 공식 집계된 결승전 관중은 19만여명. 실제로는 20~25만 명이 입장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최근 열린 2022카타르월드컵 결승전 관중은 8만8천여 명이었으니 어느정도로 브라질 홈 팬들이 몰렸는지 가늠할 수 있습니다.

1950년 월드컵 결승전이 열린 브라질 마라카낭 경기장 / FIFA.COM
브라질의 우승은 당연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실제로 브라질은 선제골을 넣고 앞서갔습니다. 하지만, 후반 거짓말처럼 2골을 연이어 실점하며 우승컵은 우루과이가 차지했습니다. 이른바 '마라카낭의 비극'으로 불리는 충격적인 결과였습니다. 경기 종료 휘슬이 울린 순간, 20만명 넘게 가득 찼던 마라카낭 경기장엔 무거운 침묵만이 가득찼습니다. 당시 라디오 중계를 하던 브라질 캐스터는 "경기장이 마치 무덤과 같다"고 표현했다고 합니다.

당시 충격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는 사례가 있습니다. 결승전 직후 브라질 축구협회는 대표팀의 유니폼을 수거해 모두 불태웠다고 합니다. 화형식 같은 거죠. 당시 브라질 대표팀의 유니폼 색깔은 흰색, 이후로 다시는 흰색 유니폼을 입지 않았습니다. 마라카낭 비극 이후 새롭게 선택한 유니폼 색깔이 현재의 노란색입니다. 그날의 패배가 없었다면 브라질 대표팀의 흰색 유니폼은 지금도 유효했을지 모릅니다.

당시 결승전에 뛴 선수들은 죄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골문을 지켰던 골키퍼 바르보자는 훗날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브라질에서는 아무리 죄를 많이 지어도 43년형 이상의 형을 선고받지 않는데 나는 그 경기에서 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50년 동안 죄인처럼 지냈다."

오버헤드킥을 하는 펠레 / AP 연합뉴스
마라카낭의 비극이 발생한 바로 그 순간, 9살이던 꼬마 펠레는 처음으로 아버지의 눈물을 보았습니다. 축구 선수였던 아버지는 다른 브라질 국민처럼 조국 브라질의 패배에 비통해하며 뜨거운 눈물을 쏟았습니다. 어린 펠레에게 브라질의 패배보다 더 아픈건 아빠의 눈물이었을지 모릅니다. 펠레는 울고 있는 아빠에게 한 가지 약속을 합니다.

"아빠, 언젠가 제가 쥴리메컵(월드컵 우승컵)을 가져올게요."

국가대표 경기에 출전한 펠레 / AP 연합뉴스
불과 8년 뒤, 펠레는 약속을 지켰습니다. 그해 나이 17살, 스웨덴 월드컵에 브라질 국가대표로 출전한 펠레는 브라질의 사상 첫 월드컵 우승을 이끕니다.17세 249일, 지금도 깨지지 않은 역대 '최연소' 월드컵 우승 선수입니다. 개최지 스웨덴으로 향한 비행기는 펠레가 생애 처음으로 타본 비행기였습니다. 그럴만도 했을 겁니다. 불과 17살의 나이였고, 비행기가 지금처럼 흔한 교통 수단이 아니었던 시기였으니까요.

펠레는 처음 출전한 월드컵에서 6골을 기록했습니다. 더구나 스웨덴과의 결승전에서 2골이나 기록하며 5대 2 대승을 이끌었습니다. 월드컵 전만해도 브라질 내부에선 프로에서 불과 1년 정도밖에 뛰지 않은 어린 선수를 월드컵 대표로 선발하는 데 대해 논란이 적지 않았지만, 펠레는 실력으로 비판 여론을 잠재웠습니다.

이후 1962년 칠레 대회에서 2회 연속 월드컵 우승을 이끈 펠레는 1970년 멕시코 대회에서 세 번째 우승컵을 들어올리며 쥴리메컵을 영원히 브라질로 가져왔습니다. 월드컵 3회 우승을 경험한 최초의 선수, 펠레의 이 기록은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은 유일무이 위대한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클럽이나 다른 기록 등에서 펠레를 넘어선 최고의 선수들이 있지만, 월드컵에서만큼은 펠레를 넘어선 전설이 아무도 없습니다.

피파 행사에 참석한 생전의 펠레 / 로이터 연합뉴스
펠레가 등장하기 전까지 세계 축구는 이른바 '롱볼'의 시대였습니다. 한마디로 단순하고 거칠었습니다. 센터백이 최전방으로 롱패스를 건네면 공격수들이 뛰어가는 '킥 앤 러시(Kick and Rush)'가 대세였고 공을 운반하는 기술 역시 지금의 패스보다는 드리블이 주류였습니다. 거친 태클도 난무했습니다. 흡사 럭비와 비슷할 만큼 거칠고 격렬한 경기였다고 합니다.

이런 시대에 펠레는 패러다임을 바꾼 선구자 같은 존재였습니다. 단순히 골을 잘 넣는 선수가 아닌 축구의 개념 자체를 바꾼 선수였습니다. 거친 패스를 발 밑에 떨어뜨리는 트래핑과 수비수를 가볍게 벗겨내는 스핀 동작 등 펠레의 유연하고 화려한 기술은 축구를 단순한 스포츠에서 예술로 승화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자세한 설명은 펠에의 '10번'을 물려 받은 네이마르의 애도사로 대신합니다.

" 펠레 이전에 '10'번은 단순히 숫자에 지나지 않았다. 축구는 스포츠에 불과했다. 펠레는 모든 걸 바꿔놓았다. 축구를 예술로, 엔터테인먼트(즐거움)로 바꿨다. 특히, 가난한 사람들과 흑인들을 옹호했고 무엇보다도 브라질을 세계의 시선 속에 올려놓았다. 축구와 조국을 모두 높이 올려놓은 진정한 황제! 펠레의 마법은 영원할 것이다."

네이마르와 펠레 / AP 연합뉴스
2020년 영국 BBC 여론 조사에서 펠레는 역대 최고의 선수로 뽑혔습니다. 리오넬 메시,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디에고 마라도나, 요한 크루이프 등 과거와 현재의 축구 전설들이 펠레의 뒤에 섰습니다. 앞선 2000년에는 피파가 선정한 20세기 최고의 선수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펠레는 1977년 미국 뉴욕 코스모스에서 선수 생활을 마무리했습니다. 펠레의 팀 동료 중에는 독일의 전설 베켄바우어도 있었습니다. 베켄바우어는 펠레를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음악에는 베토벤과 나머지가 있고, 축구에는 펠레와 나머지가 있다."

1977년 뉴욕 코스모스에서 펠레의 마지막 경기 / AP 연합뉴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곁으로 가기 직전, 펠레는 인류에게 마지막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사랑하고, 사랑하고, 사랑하라. 영원히."

■ 펠레

-본명:에드송 아란치스 두 나시멘투

-1940년 10월 23일 ~2022년 12월 29일

-15세에 프로 데뷔

-17세에 월드컵 데뷔

-월드컵 3회 우승(1958,1962,1970)

-통산 1363경기 1281골

-국가대표 92경기 77골

펠레의 딸 켈리가 병상에 누워있는 아버지를 안고 있는 모습 / 켈리 SNS

YTN 김재형 (jhkim03@yt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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