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자 어디가] 홍주처럼 붉은 노을, 예술 특구 진도

박찬은 시티라이프 기자(park.chaneun@mk.co.kr) 2022. 12. 30.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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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한 매력의 섬, 진도를 가다

작가 김훈이 “고향이 없는 자라면 이곳을 고향 삼아도 좋을 것”(『원형의 섬, 진도』(이레))이라 말한 섬, 거친 울돌목과 눈부신 세방낙조를 가져서인지, 생선 파는 아낙네와 용달차 기사도 민요 한가락 멋들어지게 뽑을 줄 아는 곳이다. 그러니 이곳에선 노래 자랑도 쉬이 해선 안 된다.

산이 험한 함경도보다 더 많은 이를 유배 보냈던 이 땅에서 선비들은 노래와 그림으로 아픔을 승화시켰다. 전라도 말마따나 한번 반하면 ‘징하게’ 계속 오게 만드는 섬, 전라남도 진도를 찾았다.


진도 세방낙조 전망대에서 바라본 다도해
헌종 임금과 추사가 사랑했던 ‘문인화의 대가’이자 시서화에 능했던 조선의 대표 화가 소치 허련 선생의 고향인 진도는 국악인 김성녀, 신영희, 가수 송가인을 배출해낸 소리의 고장이기도 하다. 한양에서 가장 많은 이가 유배를 온 이 땅에서 선비들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외로움을 예술로 승화시킬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우리나라 민요에도 ‘진도 아리랑’과 ‘진도 만가’ 등 유독 ‘진도’라는 지명이 붙은 것들이 많다. 어쩌면 임금이 있는 땅에서 가장 먼 땅이었기 때문에 백성이 부르고 만든 민요가 가장 발전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그래서인지 택시 기사, 문화해설사 할 것 없이 진도 사람들은 노래를 청하면, 빼지도 않고 구성진 목청으로 노래 한 곡 쉽게 뽑는다. 씻김굿과 다시래기, 들노래 등 삶과 분리되지 않은 노래들이 이 땅에 많은 이유 역시 같다. 한양에서 가장 먼 땅에서 민초의 삶과 뗄 수 없는 ‘소리’가 가장 다이내믹하게 발전한 것이다.

노래 자랑 함부로 했다간 큰일 나는 예향

진도가 처음이라면 토요일마다 열리는 진도향토문화회관의 토요민속공연을 꼭 추천한다. 세탁소 사장님, 우체국 직원, 화물차 기사…. 진도민속문화예술단 단원들은 직업이 다 따로 있다. 나면서부터 진짜 구전 민요를 듣고 자란 이들은 매주 열리는 공연을 위해 입김이 허옇게 드러나는 한겨울 밤에 모여 리허설 중이었다. “사람이 살면 몇 백 년이나 산다고/내 눈에서 눈물이 나면 니 눈에선 피눈물이 난다~”(육자배기) 일흔을 훌쩍 넘긴 조오환 선생이 힘든 밭일의 시름을 달래줬던 육자배기를 부른다. “밭일하며 노래가 빨라지면 호미질도 빨라지는데, 그러다 보니 노래가 느리게 변했지요.”

조오환 이사장(중앙)과 진도민속문화예술단원들의 리허설 장면
이어 해학적이고 경쾌한 엿타령이 이어진다. “저기 있는 저 아짐씨 속곳 밑에서 돈 나온다/내 말 듣고서 이리와/소리만 하면 다 팔려~”(엿타령) “옛날엔 먹을 거리가 없어 엿장수 가위소리만 나도 사람들이 모여들었어요. 어디서 배운 게 아니라, 그냥 우리 어머니 할아버지가 했던 소리를 보고 들은 거예요.”(조오환)
밤새 가사를 바꿔 부르며 여성들의 애환을 담는 ‘강강술래’.
도 지정 조도닻배노래 예능보유자인 조오환 선생은 “지금은 소리를 배우려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지금 60대 후반인 분들 다 돌아가시고 나면 소리도 사라질 것 같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조오환 선생이 어머니로부터 배우고 익힌 엿타령은 유명 무형문화재나 국립 단체가 연 공연에 비하면 굉장히 투박하다. 그러나 강하다. 그래서 그 투박한 질감이 주는 생생함이 오래 간다.
‘엿타령’을 리허설 중인 조오환 선생(맨 오른쪽)과 단원들.
진도 지역의 노래들은 다른 지역에서 볼 수 없는 특징들이 많다. ‘다시낳다’라는 뜻의 진도 ‘다시래기’는 출상 전 상주를 달래는 민속극이다. 심청전이나 흥부전, 남사당놀이를 제외하곤 연극 성격의 놀이나 극 형태의 민속을 찾아보기 힘든 지금, 가무와 개인기를 곁들인 유일한 민속극이라고 볼 수 있다.
진도민속문화예술단의 진도대교 앞 울돌목 공연.
긴 명주 수건을 허공에 뿌리며 내딛는 살풀이 춤의 세밀한 발동작, 밭일 하며 부르는 남도 들노래의 성실함은 또 어떤가. 곽재구 시인이 “한겨울 눈밭에 엎드려 우는 사내의 등 같다”고 말했던 진도 씻김굿의 끊어질 듯 이어지는 곡조는 길 닦는 노래 부분에서 절정으로 나아간다. 생사의 강을 건네주는 사공 역할을 소리꾼은 충실하게 해낸다. 어부가 손에서 그물을 놓으면 바로 인간문화재가 되는 땅이 바로 진도다. 막연히 ‘민속 공연’이라는 말이 가지는 지루함에 잠겨 있던 사람들의 볼이 빠르게 젖는다. 외국인들마저 오열하게 만드는 저 힘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개도 붓을 물고 다니고, 허씨는 빗자루만 들어도 명필이다

진도의 산은 부드럽다. 가장 높다는 첨찰산(485m)마저 엄마 뱃속처럼 편안한 구도다. 그 첨찰산을 병풍처럼 두른 운림산방(雲林山房)은 말 그대로 ‘깊은 산골에 아침저녁으로 피어 오르는 안개가 구름 숲을 이룬다’는 뜻을 지닌 곳이다.

영화 ‘조선남녀상열지사 스캔들’에서 주인공들이 배를 띄워 놀았던 운림산방
유럽에서 밀레(1814~1875)가 활동하던 시절, 조선 땅에서 그림을 그렸던 소치 허련(1808~1893) 선생의 고향으로, 스승인 추사가 세상을 떠나자 선생이 49세에 고향 진도로 내려와 지은 화실이다. 화실 앞 배롱나무와 연꽃, 첨찰산과 연못이 이뤄내는 풍경이 가히 선생의 산수화 풍경을 연상시킨다. 영화 ‘조선남녀상열지사’에서 배를 띄워 놀았던 바로 그 연못이다.
기념관에 소장된 소치 허련 선생의 인물도(소치기념관 촬영)
허련 선생은 헌종(24대 왕)의 총애를 받으며, 임금의 벼루에 먹을 갈아 왕을 상징하는 ‘모란’을 그리고, 왕실의 고서화를 평하던 당대 최고의 화가였다. 어린 시절, 해남 녹우당(윤두서) 생가에서 화첩을 보며 그림을 익힌 허련 선생은 젊은 시절, 대흥사 초의 선사의 소개로 한양으로 가 추사 김정희에게 본격적으로 그림을 배운다. 마른 붓 움직임으로 강렬한 ‘갈필’이라는 자신만의 화풍을 만들어낸 그는 남종화의 대가가 된다. 동양화 중 채색 위주의 북종화에 비해 수묵 위주의 추상적인 남종화(문인화)는 단순함 속에 강한 힘을 지닌 화풍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매우 좋은 사람입니다. 그의 화법은 종래 우리나라 사람들의 고루한 기습을 떨어 버렸으니, 압록강 동쪽에는 이만한 작품이 없을 것입니다.”(추사 김정희) 추사의 제자였던 소치 허련 선생은 오원 장승업과 함께 조선시대 회화의 양대 산맥을 이룬 화가다.‘소치’ 역시 추사가 중국의 대화가 대치(황공망)와 비교해 내린 호. 남종화의 대가인 소치 허련의 생가가 있는 ‘운림산방’은 진도 여행 1번지다.

‘운림산방을 살펴보고 가지게 되는 생각, 1984년 가을 남농’ 허건, 종이에 엷은 색, 1984년, 42×32㎝
소치의 그림을 그대로 재연한 듯한 ‘운림산방’
임금이 총애했던 1대 허련 선생으로 시작된 화맥은 그림을 기다리는 이들이 대문 밖까지 줄을 섰다는 3대 허건 선생을 비롯, 현대적 서화를 그리는 5대 허진, 허준 등으로 이어진다. 일가 직계 5대의 화맥이 200여 년(1808~1976년생) 동안 이어지는 것은 전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일이다. 운림산방에 가면 허련 선생이 후학을 가르쳤던 화실부터 5대까지 후손들의 작품과 함께 대나무 정원의 홀로그램과 선면산수도 포토존이 있는 전시관부터 볼 것. 1대 산수화부터 5대의 컬러풀하고 모던한 회화까지 비교해가며 보는 재미가 있다.
1대 허련의 ‘선면산수도’(소치기념관 촬영)
5대 허준 작가의 그림 ‘구름 속의 산책’ 허준, 종이에 혼합재료, 99×59㎝(소치기념관 촬영)
5대 허진 작가의 그림 ‘익명인간_구몽狗夢 5’ 허진, 종이에 수묵 채색, 97×65㎝(소치기념관 촬영)
소치고택, 영정이 모셔진 운림사 등도 관람객을 맞는다. 운림산방은 생전에 허련 선생이 그려놓은 산수화를 보고 복원한 것이다. 때가 되면 운림산방 앞 오각으로 만들어진 연못에 연꽃이 피어오를 것이다. 또 연못 가운데 섬에는 배롱나무에는 꽃도 필 것이다. 자신의 그림 속에서 살았을 소치 선생은 나비 꿈을 꾼 장자였을까. 장자 꿈을 꾼 나비였을까.

울돌목을 이겨낸 듬북국과 세방낙조처럼 붉은 홍주

진도 바다에서 가장 부지런한 해초는 듬북이다. 바닷물이 빠지기 시작하면 바위 맨 위에 붙어 있는 듬북이 가장 먼저 투명한 얼굴을 드러낸다. 오염된 곳에서는 잘 자라지 않아 양식이 불가능하다는 이 듬북을 곰탕에 푹 고아 끓인 것이 바로 진도의 명물 ‘듬북국’이다.

진도의 명물 듬북갈비탕
듬북을 한 움큼 씹어보니, 조도 앞바다의 거센 물결에도 안 떠밀린 쫄깃한 생명력이 그대로 느껴진다. “뜸북(듬북)을 잘 불려서 돼지 푹 고은 물에다 끓이면 ‘성진(푹신푹신한)’ 맛이 아주 좋아요. 가장 흔한 음식이지만 집안에 대소사가 있을 때 서로 나눠먹는 음식이지요.” 해설사의 말대로 푹 익은 갈비를 건져 불린 듬북과 함께 끓여낸 듬북갈비탕은 서로 상극일 듯한 바다(듬북)와 육지(소)의 매력을 서로 보듬어 안는다.
진도 홍주는 보리와 쌀, 누룩이 갖는 향과 맛을 최대한 살렸다.
울금을 넣은 수육과 진도 전복 등 진도의 바다를 담은 한상이 차려졌다.
붉은 지초를 용출해 만들어 새빨간 색깔의 진도 홍주와 곁들이는 간재미 무침은 또 어떤가. 진도 울금을 넣어 노랗게 변한 수육, 깊은 수심과 빠른 조류를 이겨낸 통통한 진도 전복과 뻘을 단단하게 움켜쥐느라 탄력이 제대로인 진도 낙지로 차려진 한정식도 일행을 맞았다. 여기에 세방낙조의 빨간 노을을 닮은 진도 홍주 한 잔 걸치지 않는다면 바다를 품은 이 밥상에 대한 예의가 아닐 것이다.
박명화 작가의 ‘남도에서 남미, 진도 한옥에서 만나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사진전’전이 열린 구름숲아토리 사랑방
밥을 먹은 후에는 ‘미스터 션샤인’의 유진 초이처럼 개화기 커피 한잔하러 ‘구름숲아토리’ 카페를 들른다. 이곳은 여행하다 진도에 반한 한 문화 기획자가 귀농하여 만든 진도 여행의 쉼터다. 각국의 싱글 오리진 프리미엄 원두로 만든 스페셜티 커피를 내공 넘치는 바리스타의 핸드 드립 솜씨로 맛볼 수 있을 뿐 아니라, 모카포트 커피 만들기, 선물용 드립백 제조도 가능하다.
운림산방과 ‘아트+스토리’를 합친 ‘구름숲아토리’의 마스코트, 고양이.
진도의 문화살롱 역할을 하는 ‘구름숲아토리’의 스페셜티 커피
“진도 지역 축제를 마니 준비하다 보니 여행자들이 쉴 공간이 없어 마련했다”는 구름숲아토리 허건 대표는 “진도의 원경과 근경 모두를 볼 수 있는 곳”이라며 이곳을 설명한다. 구름숲아토리에선 진도 아리랑과 북놀이 배우기, 솟대 만들기와 서화 체험 등 진도민속문화도 체험할 수 있다. 먹이 접시에 코를 박고 있던 ‘집냥이’들이 한옥 팔작지붕 끝에 걸린 풍경 소리에 번뜻 고개를 쳐든다. 구름숲아토리의 친구들이다.
거친 조류와 아름다운 낙조를 동시에 지닌 진도 바다

해가 지기 전에 해안도로로 차를 몬다. 해가 떨어질 때까지 가늘게 끝까지 비친다고 해서 ‘세방낙조’로 불리는 한반도 최남단 제일의 낙조 전망지를 가기 위해서다. 전국 해안도로 가운데 가장 아름답다는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 시닉 드라이브 코스(Scenic drive course)를 따라 도착한 세방낙조 전망대에는 일몰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눈부신 다도해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 지력산 동백사 스님이 노을을 가로질러 날던 학떼를 따라가다 바다로 장삼을 떨어뜨렸다는 ‘장삼도’, 바지를 떨어뜨려 ‘하의도’, 손가락을 떨어뜨려 ‘손가락섬(주지도)’, 발가락을 떨어뜨렸다 해서 ‘발가락섬(양덕도)’ 외에 장도, 혈도, 불도까지 한번에 보인다. 손가락과 발가락, 심장까지 모두 떨어뜨린 동백사 스님은 어찌 살아갔을까. 저 노랗고 붉은 세방낙조의 아름다움을 눈에 담았으니 그저 괜찮았을까. 해질 무렵, 섬과 섬 사이로 태양이 빨려 들어가듯 진다.
진도의 바다 낙조를 보는 또 다른 방법은 바로 해상케이블카다. 해남과 진도를 잇는 명량 해상 케이블카(920m, 10인승)는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 전승지 ‘울돌목(명량)’ 해협 위 공중을 가로지른다. 국내 최초로 ‘울돌목’이라는 실제 역사 현장에 개통된 해상 케이블카로, 해협의 폭이 좁고 깊은 절벽 해구를 이루고 있어 바닷목이 우는 명량해전의 현장을 바다 위에서 볼 수 있다.
울돌목 해상 케이블카
진도타워에서 본 진도대교
진도대교에서 벌어진 울돌목 페스타
특히 아래가 투명 유리인 크리스탈 캐빈의 바닥으로 바라본 울돌목은 멀리서도 거친 물살을 자랑한다. ‘소리를 내 우는 바다 길목’이라는 뜻의 울돌목을 더 가까이서 보고 싶다면 해남스테이션에 위치한 물살체험장 스카이워크를 가봐도 좋다. 유속이 초속 6미터에 달해, 거품이 일고 물이 용솟음치며 만드는 회오리를 볼 수 있다.
크리스탈 캐빈에 타면 발 아래로 바다를 볼 수 있다.
진도타워 앞 명량해전 기념조형물
진도타워에서 바라본 진도대교
진도에 위치한 진도스테이션과 해남에 위치한 우수영 국민관광지(해남스테이션)까지 연결하는 920m의 케이블카는 숲과 바다를 모두 통과한다. 다도해와 낙조, 진도대교가 함께 조망되는 케이블카에는 테라스 카페, 루프톱 전망대도 있으니 지친 발걸음을 쉬어 가자.
천연기념물인 진돗개는 육지와 떨어진 특수 환경 때문에 순수혈통이 잘 보존돼 있으며, 충성심과 대담성에 있어서 따를 종이 없다. 사진은 진도 개 테마파크
‘진도 진실의 입’과 ‘소망바위’를 만든 진도군청 이종호 팀장
노을에 비친 케이블카를 마지막으로 두 번째 진도 여행을 마쳤다. 허름한 기사식당 벽에 수묵화가 걸려 있고 화장실 휴지에조차 붓글씨가 쓰여 있는 땅 진도. 섬이지만 비릿한 바다 내음이 별로 나지 않는 곳, 배들이 쉽게 몸을 뉘일 수 있는 온순한 항구들과 잠시 머물렀는데도 고향처럼 느껴지는 곳. 진도를 찾는 이들은 그 누구도 실망하지 않고 전라도 말마따나 그 땅에 ‘징하게’ 반해버리게 된다. 진도에서는 한겨울도 봄이다.
진도 세방낙조 전망대 뒤로 가사도와 주지도, 양덕도 등이 보인다.
진도와 제주를 오가는 산타모니카 호
박찬은 기자 사진 Ming K. Park, 박찬은, 소치기념관 취재협조 진도군청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862호 (23.1.10)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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