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다웠던 시절도 모두 잿더미로…8평 컨테이너에 남겨진 울진산불 이재민들[송년기획]

김현수 기자 2022. 12. 30.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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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미자 신화2리 노인회장(사진 왼쪽)이 지난 30일 경북 울진군 북면 신화2리동회관에서 어르신들이 임시로 사용하는 베개를 보여주고 있다. 김현수 기자

“돈 주고 살 수 없는 게 다 타버렸지. 먼저 간 영감 사진 한 장 남은 게 없어.”

경북 울진군 북면 신화2리동회관. 이곳에는 울진산불 피해로 집을 잃은 어르신 16명이 훈기가 도는 바닥에 누워 몸을 데우고 있었다. 지난 30일 찾은 회관 인근에는 어르신들을 위한 27㎡(약 8평) 남짓한 좁은 컨테이너 임시주택이 들어서 있었지만, 매서운 한파에 몸을 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지난 3월 이들의 보금자리에 들이닥친 화마는 서울 면적(6만500㏊)의 30%가 넘는 2만923㏊(울진 1만8463㏊·삼척 2460㏊)를 태우고 진화됐다. 산불이 진화되기까지 213시간43분이 걸렸다.

화마가 태워버린 것은 단순한 ‘집’이 아니었다. 이들의 소중한 추억과 일상을 모두 잿더미로 만들었다. 주미자 신화2리 노인회장(78)은 “시집왔을 때, 영감이랑 데이트하던 때, 애들 키우던 때…. 그런 사진이 모두 불타 없어져 버렸다. 노인네 유일한 취미가 사진첩 열어보는 건데. 이제 무슨 재미로 살겠나”라며 허탈해했다.

울진 장씨 종부인 주순애(83) 어르신은 조상 뵐 낯이 없다고 했다. 화마가 문중 대대로 내려오던 400년의 세월을 간직한 현판까지 모두 삼켜버렸기 때문이다. 주 종부는 눈물을 훔치며 “족보도 모두 타버리고, 현판도 못 건졌으니 종부로서 무슨 낯이 있겠느냐. 이제 곧 어른들 만나러 가야 하는데…”라며 말끝을 잇지 못했다.

영월 은씨 종부인 김향난씨(71)는 내년에는 제사를 지낼 수 있기를 바라는게 가장 큰 소원이다. 임시주택에서는 제사를 지내기가 여의치 않아 산소에서 약식으로 제사를 지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엄씨는 “병풍이랑 제기 등이 모두 타버려 차례를 물론 제사도 못 지내고 있다”며 “집이 빨리 지어져야 제기 등도 새로 사둘 수 있지 않겠느냐”고 했다.

갑작스레 찾아온 재난은 작은 시골 마을의 일상을 무너트리고 그 속에 ‘상실감’을 심었다.

울진 산불 이재민인 엄석(82) 어르신이 지난 30일 27㎡(약 8평) 남짓한 좁은 컨테이너 임시주택 전기장판 위에서 몸을 녹이고 있다. 김현수 기자
“내년에는 집으로 돌아가 손주들 보고 싶어”

어르신들은 내년에는 평생을 살아왔던 ‘집’으로 돌아가길 소망했다. 집을 잃자 유일한 낙이었던 손주를 보는 재미도 같이 잃었기 때문이다.

주 노인회장은 “동네 어르신들 모두가 명절 때마다 쑥쑥 커버린 손주 보는 재미로 살고 계신다”며 “그런데 자식들이 찾아와도 방 한 칸 내줄 수 없는 신세다 보니 덩달아 손주얼굴 보기도 힘들다”고 토로했다.

매서운 한파도 걱정이다. 임시주택은 전기 패널로 난방을 할 수 있지만, 얇은 외벽으로 스며드는 한기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

산불로 집을 잃어 임시주택을 받은 이재민은 188명. 이 중 8명만 집을 지어 임시주택을 벗어났다. 이재민을 위한 국민 성금은 800억원을 넘겼지만, 이들은 집을 지은 돈이 부족하다고 토로한다.

산불 이재민들이 지금까지 받은 지원금은 정부 지원금과 성금 지원액을 합해 최대 1억2000만원이다. 이 최대 금액을 받을 수 있는 경우는 84㎡(약 25평) 이상 전부 파손된 주택 뿐이다. 피해 정도와 주택 규모에 따라 지원금은 5200만~8700만원으로 차등 지급됐다. 주택이 등기가 없는 무허가 건물이거나 50㎡(약 15평) 미만이면 추가 지원 대상에서 제외됐다.

주 노인회장은 “요즘 건축비가 평당 700만원은 한다”며 “집 짓는 데만 1억7000만원은 든다고 하는데 소득이 없는 노인이다 보니 대출도 안 나온다. 몇몇 집은 자식들에게 손을 빌리기도 했다”고 말했다.

화마 삼킨 송이밭…생계 걱정에 속 타는 송이농가

산불은 임산물 채취로 생계를 이어온 주민들에게는 ‘날벼락’이었다. 울진군은 경북 영덕군에 이어 국내 두 번째 송이 주산지다. 울진주민의 20%가량인 1만여명이 송이 채취로 생계를 이어간다.

송이만 50년 넘게 키워왔던 장순규씨(81)는 자신의 송이밭만 바라보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세 자녀를 키워줬고, 아내와 함께할 노후를 책임져줄 고마운 송이밭이 화마에 생기를 잃어서다. 그는 “송이 농사를 짓는 사람 대부분이 고령의 노인”이라며 “송이로 먹고 살았는데, 송이가 안 나니 이제 죽을 날만 기다린다”고 하소연했다.

지난 3월8일 경북 울진군 북면 검정리 송이 재배지가 검게 그을려있다. 울진|권도현 기자

이운영씨(49)도 장씨와 사정이 다르지 않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와 함께 송이밭을 가꿔왔던 그는 하룻밤에 ‘백수’ 신세가 됐다. 이씨는 “강원 동해안 산불이 난 지 2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그 지역 산에는 송이가 자라지 않는다”며 “최소 30년은 지나야 송이 채취가 가능하다고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다”고 했다.

1만여명의 삶의 터전이 불에 타버렸지만 송이는 자연임산물로 분류돼 피해 보상도 받지 못한다. 그나마 올해는 ‘울진 산불 재해구호 성금’으로 465농가가 84억9000만원을 지원받았을 뿐이다. 각 송이농가가 벌어들인 수익의 1.5년치다. 이들을 위한 추가 지원금은 현재로선 없다.

장씨는 “나는 자식이라도 다 키웠지, 이제 (자녀를) 대학 보내야 하는 이웃들은 걱정이 태산”이라며 “당장 내년부터 뭐 해 먹고 살지 앞길이 캄캄하다”고 말했다.

김현수 기자 kh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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