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재도, 황희찬도, 지드래곤도… 진주 목걸이를 두른 남자
젠더리스·빈티지 열풍 타고
‘남자의 보석’으로 떠오른 진주
고귀함과 우아함을 상징하며 오랫동안 여성의 전유물로 여겨져온 진주를 몸에 두르는 남성들이 늘고 있다.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 이어 영화 ‘헌트’의 성공으로 최근 금관문화훈장까지 받은 이정재가 대표적이다. 그는 지난 8월 한 예능 프로그램에 핑크색 재킷과 흰 셔츠에 알 굵은 진주 목걸이를 목에 두르고 등장해 시선을 집중시켰다. 이정재는 헌트 시사회장에도 핑크색 셔츠에 진주 목걸이를 목에 걸었다.
‘영원한 스타일 아이콘’으로 불리는 가수 지드래곤도 진주 목걸이를 즐겨 착용한다. 진주 목걸이와 크리스털 등 다른 소재의 주얼리와 겹쳐 착용해 자유로우면서도 세련된 분위기를 연출한다. 방탄소년단 멤버 뷔는 공식 트위터에 공개한 사진에서 흰 티셔츠에 검은 재킷을 입고 진주 목걸이와 귀걸이를 착용했다.
남성적 이미지가 강한 스포츠 스타들도 진주의 매력에 빠졌다. 월드컵 16강 진출 역전골의 주인공 황희찬이 지난 3월 파주트레이닝센터에 들어설 때 그의 패션은 ‘거친 황소’와는 거리가 멀었다. 편안한 캐주얼 차림에 진주 목걸이를 매치한 것. 지난 5월 팬미팅에 앞서 열린 기자회견에서도 흰색 티셔츠에 진주 목걸이로 포인트를 줬다. 황희찬은 “축구도 좋아하지만 꾸미는 것도 무척 좋아한다”며 “요즘 진주 목걸이가 유행하길래 하나 장만해봤다”고 답했다. 지난 10월 프로농구 기자회견에 나온 지난 시즌 최우수선수(MVP) 최준용도 알이 굵은 진주 목걸이를 검은 티셔츠에 매칭했다.
남성의 진주 착용은 의외로 오랜 역사를 가졌다. 소설 ‘삼총사’에도 등장하는 제1대 버킹엄 공작 조지 빌리어스는 진주 사랑이 유난했다. 1625~1626년 초상화에서 빌리어스는 긴 진주 목걸이를 여러 줄 목에 두르고 있다. 반 다이크 작품 속 영국 왕 찰스 1세는 자랑스럽다는 듯 진주 귀걸이를 착용한 왼쪽 귀가 보이도록 고개를 돌리고 있다. 이처럼 17세기 유럽 왕족·귀족 남성들은 진주 목걸이와 귀걸이를 거리낌없이 착용했고, 진주로 장식된 옷을 입었다.
페르시아와 인도 무굴제국, 중국 군주들도 진주를 선호했다. 중국 청나라 옹정제가 착용한 진주 목걸이 ‘동주조주(東珠朝珠)’는 2010년 소더비 경매에서 6786만 홍콩달러(약 97억6000만원)에 낙찰됐다. 일본 진주 브랜드 ‘미키모토’의 미국 대표 하시모토 야스히코는 지난 6월 CNN 인터뷰에서 “수백년간 진주는 권력과 권위의 상징으로 남녀 가리지 않고 착용했다”며 “진주가 여성스러운 보석으로 여겨진 건 현대 이후”라고 했다.
진주가 남성의 패션 아이템으로 돌아올 조짐은 2010년대 중반부터 보였다. 2016년 미국 팝스타 퍼렐 윌리엄스가 샤넬 패션쇼에서 진주 목걸이를 주렁주렁 목에 두르고 캣워크(무대)를 걸었다. 이어 2019년부터 본격적으로 ‘트렌드세터’라 불리는 남성들의 목과 귀에서 발견됐다.
패션업계에서는 영국 아이돌 출신 연기자 해리 스타일스가 2019년 미국 뉴욕 ‘메트 갈라’에 한쪽 귀에 커다란 물방울 모양 진주 귀걸이를 착용하고 등장한 순간을 남성의 진주 패션이 본격화한 상징적 장면으로 본다. 이후 디올·구찌 등 패션 브랜드와 배우 제이든 스미스와 티모테 샬라메, 가수 숀 멘데스 등 유명인사들이 진주를 다양하게 선보였다.
남성의 진주 착용은 성별(性別) 경계를 허무는 ‘젠더리스(Genderless)’ 트렌드와 관련있다. 큼직하고 화려한 귀걸이를 착용하고, 대담한 디자인의 반지를 손가락에 여럿 끼고, 여성용 핸드백을 연상시키는 작은 가방을 메거나, 진주나 다이아몬드처럼 기존 남성 패션에서 보기 힘들던 보석도 기꺼이 활용한다. 기존 패션 법칙에 얽매이지 않고 개인 취향을 우선시하는 트렌드도 있다.
진주 자체가 인기이기도 하다. 여성용 주얼리 부문에서도 진주가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빈티지 패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중년층이 아닌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 진주 선호도가 높아졌다.
글로벌 남성 라이프스타일 플랫폼 ‘미스터 포터’의 온라인 매거진 ‘더 저널’은 “남성 장신구로서 진주는 어떻게 스타일링하느냐에 따라 화려하거나 미니멀해 보이는 등 놀랍도록 다양한 활용이 가능한 데다, 튀지 않게 절제된 스타일로 연출하더라도 남과 차별화되는 개성을 드러낼 수 있다는 장점을 지녔다”며 남성의 진주 패션이 반짝 인기로 끝나지 않고 오래 지속될 것으로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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