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리, 파리에 가다3》, 참을 수 ‘있는’ 존재의 가벼움
(시사저널=정시우 영화 저널리스트)
OTT(온라인 동영상 서비스)가 없었던 시절, 미드(미국 드라마)를 보기 위해 케이블TV에 자주 접속했다. 즐겨찾기를 한 프로그램은 《프렌즈》와 《앨리의 사랑 만들기》. 그러다 우연히 《섹스 앤 더 시티》를 만났다. 처음엔 제목에 박힌 '섹스'라는 단어만 보고 이 드라마를 조금 오해했다. 함께 사는 가족들도 오해할 것 같아 채널을 차마 고정할 수 없었다. 순진한 시절이었다. 뒤늦게 정주행한 《섹스 앤 더 시티》는 섹스 그 자체가 대담한 드라마가 아니라, 성(性) 담론에 대한 솔직한 대사가 대담한 드라마였다.
미국 뉴욕에 사는 섹스 칼럼니스트 캐리 브래드쇼(사라 제시카 파커)와 그녀의 친구 3인이 쉴 새 없이 쏟아내는 연애에 대한 고찰은, 시청자로 하여금 '저 언니/누나들 대화에 끼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했고 뉴욕행 비행기를 타고 싶게 했다. 그렇게 캐리는 광범위한 팬덤을 이끌며 여성들의 워너비가 됐다. 1998년 첫 전파를 탄 후 2004년까지 6개 시즌을 통과하며 《섹스 앤 더 시티》가 사랑받은 이유다.
그래서였다. 캐리와 친구들이 OTT를 타고 17년 만에 돌아온 《섹스 앤 더 시티》 속편 《앤 저스트 라이크 댓: 섹스 앤 더 시티》(2021)를 보지 않은 건. 좋았던 추억을 추억으로만 남겨 두고 싶은 마음이 컸달까. 중년이 된 그들을 만날 준비가 안 된 탓도 있다. 그런 상황에서 《에밀리, 파리에 가다》에 꽂힌 건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에밀리, 파리에 가다》는 《섹스 앤 더 시티》의 메인 프로듀서 대런 스타가 제작에 참여한 작품. 프랑스판 《섹스 앤 더 시티》라는 수식어가 붙은 이 드라마는 과연 그 수식어에 부합하는 센세이셔널한 작품이 될 수 있을까.
프랑스판 《섹스 앤 더 시티》?
2020년 첫 시즌을 연 후 시즌3에 당도한 《에밀리, 파리에 가다》는 미국인 에밀리(릴리 콜린스)가 프랑스 파리의 홍보 마케팅 회사로 파견 가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넷플릭스 드라마. 기대와 달리 이 시리즈는 《섹스 앤 더 시티》가 열광하게 했던 여성 삶에 대한 진지한 고찰이 옅다. 캐릭터들은 단편적이고, 위기와 고난은 쉽게 풀리고 봉합된다. 철저히 미국인의 시선에서 파리를 바라본 탓에 문화적 이해가 결여된 부분도 있다(실제로 시즌1 당시, 프랑스에서 이 드라마를 향한 부정적인 여론이 일었다). 가장 갸우뚱하게 하는 건, 실연을 당한 후 슬퍼하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이내 다른 사람과 눈이 맞아 키스하는 캐릭터들이다. 이토록 깃털 같은 존재들이라니.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약점은 곧, 《에밀리, 파리에 가다》 시리즈의 장점이기도 하다. 밝고 경쾌하고, 상처에 대한 회복력도 너무나 우수한 캐릭터들은 시청자가 그들을 걱정한 틈을 주지 않는다. 에피소드 진행은 빠르고, 러닝타임도 한 편당 30분 내외라 부담이 없다. 요즘 트렌드라는 스낵 컬처, 그러니까 과자를 먹듯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짧은 시간에 즐길 수 있는 콘텐츠로서 이만한 게 없다. 실제로 에피소드 하나 무심코 클릭했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정주행했다는 후기가 넘친다. 중독성 강한 콘텐츠라는 의미다.
여기엔 패션도 큰 역할을 한다. 시카고 걸 이미지로 첫 회에 등장했던 에밀리의 의상은 시리즈가 거듭될수록 파리지엔느의 느낌을 한껏 풍기고 있다. 《섹스 앤 더 시티》에서 캐리의 의상을 담당했던 패트리샤 필드의 솜씨다. 다소 비현실적이고 지나치게 알록달록한 의상이 종종 등장하긴 하지만, 그런 의상마저 소화해 내는 릴리 콜리스의 모습은 이 드라마의 재미를 견인하는 커다란 요소다. 그리고 파리가 있다. 이 드라마에서 파리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하나의 주인공으로 기능한다. 파리의 랜드마크 곳곳을 아름답게 비추는 카메라는 이 도시를 욕망하게 만든다. 《섹스 앤 더 시티》가 뉴욕을 그렇게 만들었던 것처럼.
선택에 따르는 책임에 대해
2022년 12월21일 공개된 《에밀리, 파리에 가다》 시즌3의 핵심은 극 중 언급된 샤르트르의 말로 대신할 수 있을 것이다. '선택하지 않는 것도 선택이다.' 선택하지 않는 것에도 결과가 따르니 이 역시 선택의 하나일 수 있다는 이 말은, 그러나 때에 따라 책임 회피로 흐를 수도 있다. 실제로 우물쭈물하다가 신뢰를 잃고, 직장마저 모두 잃을 위기에 놓인 에밀리에게 이 명제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선택에 책임이 따른다면, 책임을 위해 이제 선택을 할 차례. 어느덧 파리 생활 1년 차에 접어든 에밀리는 여러 선택 앞에 놓인다. 미국에서 온 상사를 따를 것인지 파리에서 1년을 함께한 실비(필립핀 르로이-뷔리우) 팀을 따를 것인지, 시카고로 떠날 것인지 파리에 남을 것인지, 일과 우정 중 어느 쪽을 우선해야 할 것인지. 선택에 따른 결과를 수용하는 힘. 제작진이 시즌3에서 힘쓴 부분이다.
시즌1~2가 그랬듯, 이번에도 문제는 가브리엘(루카스 브라보)이다. 그러니까 아직도 가브리엘이다. 에밀리가 가브리엘과의 '썸'을 청산하고 다른 사랑을 찾을지 기대했을 시청자라면 기대를 접으라는 의미다. 제작진은 에밀리와 가브리엘 사이의 닿을 듯 말 듯한 '썸'을 시리즈 동력으로 조금 더 가져가겠다는 의지를 보여준다. 팬들 입장에선 답답할 노릇이겠지만,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섹스 앤 더 시티》에서 전 시리즈를 관통했던 캐리와 그녀의 썸남 미스터빅(크리스 노스) 사이의 밀당을 떠올리면 말이다. 미스터빅으로 말할 것 같으면 캐리에게 절대 미래에 대한 확신은 주지 않았던 우유부단의 끝판왕이자, 두 번 품절남이 된 후에야 캐리에게 안긴 '썸계'의 절대 지존이었다. 에밀리와 가브리엘의 관계는 여러모로 캐리와 미스터빅의 관계 연장으로 보인다.
물론 이 드라마에 사랑만 있는 건 아니다. 에밀리와 민디(애슐리 박)의 우정이 있고, 일에 대한 '성취'도 지속적으로 다뤄진다. 그런 점에서 시리즈가 거듭될수록 매력이 선명해지는 인물은 에밀리의 상사 실비다. 까탈스럽고 직설적인 실비는 분명 직장 상사로 선호받을 유형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한 번쯤 '그녀와 함께라면'이라는 생각을 품게 하는 인물이다. 공과 사의 명확한 구분. 개인주의가 강하지만,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자신을 굽힐 줄도 아는 사람. 무엇보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그 흔한 말을 온몸으로 증명해 보이는 노련함과 당당한 매력이 상당하다. 어떻게 보면 이 드라마의 판타지는, 에밀리가 아니라 실비인지도 모른다. 문득, 《앤 저스트 라이크 댓: 섹스 앤 더 시티》에서 캐리도 실비처럼 멋지게 나이 들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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