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째서 살아 숨 쉬는 것들을 사랑하지 않는 것일까요”···김성동 ‘흑염소 빼빼’ 깨달음이 지금 말하는 것들
2022년 개정판에 “‘광주 피바다’ 진행형…죽은 사람 있는데 죽인 사람 없어”
42년 지난 지금 다시 보면 온누리 뭇 생명 위한 아름답고 슬픈 동화
죽고 싶지 않았던 빼빼
김성동 지음·이진하 그림 | 이서방 | 160쪽 | 2만5000원
김성동(1947~2022)은 1981년 5월10일 <죽고 싶지 않았던 빼빼>를 냈다. 1980년 5·18민주화운동을 두고 쓴 ‘우의(寓意) 소설’이다. 5월 끝 무렵 썼지만 출판하지 못했다. 두 달 여 전인 3월 3일 전두환이 간접선거로 대통령에 취임했다. 이듬해 책을 냈을 때 ‘광주’라는 단어는 꺼내지 못했다. <만다라>(1978)를 쓴 베스트셀러 작가였는데도, 책은 조명받지 못했다. 그나마 책을 다룬 언론은 단신 처리했다.
모진 탄압의 시절 김성동은 후기에 ‘개칠’이란 제목을 붙이고 이렇게 썼다. “글을 쓴다는 것이, 그리고 글을 써서 밥을 번다는 것이 대단히 미안하고 또 죄송스러운 시절에 살고 있음을 뼈저리게 통감하면서 개칠을 합니다.”
김성동은 당시 아무것도 쓰지 못했다고 한다. 그저 “부끄럽고 미안하고 그리고 죽고 싶을 뿐”이라고 했다. “울부짖는 호곡 소리” 때문에 자다 “소스라치게 놀라 몸을” 일으키곤 했다. “검은 것을 검다고 뛰쳐나가 크게 외칠 용기”가 없어 괴로워했다.
광주에 관한 소설이라는 건 분명했다. 그는 아픔과 고통, 우울을 호소한 뒤 이렇게 적었다. “사납고 억센 글을 쓰고 싶습니다. 사납고 억센 글을 써서 나쁜 사람들을 이 땅에서 몰아내고 싶습니다.” 주인공 ‘빼빼’에 이 바람과 각오를 욱여넣었다.
빼빼는 여덟 달 반을 살다가 죽은 아질개(‘새끼’ 또는 ‘어리다’는 뜻) 흑염소다. 충청남도 보령 땅 청라면 솔미 3리 산골에 살다가 대처(大處)로 팔려나간다. 정력 보강을 위한 ‘염소탕’용이다.
빼빼는 “나를 마음대로 끌고 다니는 커다란 힘을” 가진 사람들을 두려워했다. 어차피 죽는 것 사람과 싸우더라도 도망쳐야 한다는 ‘늙은 염소’의 결의 제안에 도리질하며 싫다고 말한다. “사람과는 싸움이 안 돼요.”
빼빼는 점점 싸움과 자유를 떠올린다. 대처에서 시위를 목격하곤 이렇게 생각했다.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달라고 하고 또 어떻게 하라고 소리치며 어디론가 달려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들 또한 우리네 염소처럼 자기들보다 더 큰 힘을 가진 숨탄것(하늘과 땅한테서 숨을 받은 목숨이라는 뜻. ‘동물’을 가리킴)한테 모가지가 매여 끌려다니고 있다는 것인지. 참으로 알 수 없는 사람들인 것이었습니다.”
빼빼는 도리암직한(나부죽한 얼굴에 키가 작달막하고 몸매가 있다) 흑염소 판매상 ‘털보’가 거래를 마무리하려던 순간 잡은 줄이 느슨해진 틈을 타 땅을 박차고 뛰어나간다. “나는 자유를 얻었다는 것을- 내가 사람들 손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하고 몸을 움직였을 때, 나는 이미 힘없이 끌려만 다니던 어제 염소가 아니라는 것을.”
빼빼의 각성과 실천으로 투쟁과 자유 의미를 역설한다. 김성동은 “본전치기두 뭇허넌 뇡사” 같은 대사로 가난한 농촌 문제를, “염소나 돼지를 가둬두는 우릿간” 같은 산동네 판잣집 묘사로 도시 빈민 문제도 불러낸다.
<죽고 싶지 않았던 빼빼>는 1981년 책을 낸 백제사가 없어지고 2002년 청년사에서 <염소>라는 이름을 달고 나온다. 청년사도 사라져 이번에 다시 책이 나왔다. 앞서 낸 책 후기도 실었다. 2022년 판 ‘세 번째로 다시 펴내며’에서 “저 42년 전 일어났던 ‘광주 피바다’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어느 것 하나 뚜렷하게 밝혀진 것이 없다. 그때 열반하신 넋들이 적어도 2천명 위라고 알고 있는데 이른바 ‘공식적인 발표’로는 274명 사망에 4천명 가까이 부상된 것으로 되어 있다. 기가 막힌 것은 죽은 사람은 있는데 죽인 사람은 없는 것”이라고 썼다.
김성동은 2002년 판 후기엔 5·18 직후에 쓴 사실을 말한다. “이 기절초풍하고 혼비백산하는 정신의 대공황시대에 어린 흑염소 ‘빼빼’ 깨달음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가. 목멘 그 소리는 어디로 돌아가나. 축구공 하나에 온갖 갈등과 모순을 덮어버리는 이 풍요로운 ‘대~한민국’, ‘컴본주의 시대‘에 이 무슨 귀꿈맞은 소리인가”라고도 했다.
5·18민주화운동과 학살 희생자, 한국 정치사회를 두고 쓴 우화 의미는 지금 넓어진다. 다시 보니 ‘비인간 존재’, 생태·생명 문제의식이 도드라진다. 요즘 나왔으면 생태소설로도 분류할 법하다. 빼빼에게 싸울 각오를 독려했던 늙은염소는 “움직이는 것이든 움직이지 않는 것이든, 마침내는 사람들 손에 죽게 된다”며 소, 돼지, 가히(개), 닭, 토끼에다 나무, 풀, 바람, 흙, 물을 죽 늘어놓는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 빼빼는 “살아서 아름다운 것들을 좀 더 뚜렷하고 튼튼하게 사랑하고 싶습니다”라고 독백하는데, 그 대상은 “하늘 별 바람 흐르는 물 나무 꽃 풀 새 송아지 토끼 강아지 개똥불 그 모든 것들”이다. 빼빼가 묻고 또 묻는다. “사람들은 어째서 살아 숨 쉬는 것들을 사랑하지 않는 것일까요?” 소설의 첫 문장은 “온누리에 살아 숨 쉬고 있는 모든 것,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다.
한 차례 그친 문제의식, 비판의식이 아니다. 김성동은 1990년대 초반 전국 환경파괴 현장을 샅샅이 다닌 뒤 산문집 <생명기행>을 내놓기도 했다. ‘녹색평론’에도 여러 차례 글을 썼다. 이 잡지 발행인 김종철(1947~2020)은 김성동을 두고 ‘자칭 <녹색평론> 전도사’라고 소개했다. 김성동은 2021년 프레시안 ‘녹색평론 김종철 읽기’에 ‘김종철…뵤, 뵤, 멧새처럼 날아간 사람’이란 추모 글을 실었다.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1090211015732155
소설은 동물을 죽이고 먹는 살육과 인간 탐욕 문제를 성찰하게 만든다. 빼빼는 어디서나 먹어대고, 길게 트림을 해대는 사람들을 보곤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은 먹기 위해서 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아아. 사람들이야말로 어쩌면 돼지보다도 더 게염(부러운 마음으로 샘해서 탐내는 욕심. 탐욕)스러운 숨탄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이것저것 마구 먹고, 전시하는 이 시대 ‘먹방’을 두고 한 말로도 읽게 된다.
빼빼 죽음에 대한 묘사로 시작하는 소설 초반부는 강렬하다. 빼빼는 “날카로운 철삿줄이 턱살을 파고”들 때 “그 번뜩이는 칼날 위로 가을 한낮 햇살이 잔비늘로 부서져 가늘게” 흩어지는 모양을 본다. “불에 덴 듯 갑자기 목구멍이 뜨거워지면서, 견딜 수 없는 졸음이 밀려옵니다.” 소설을 두고 영화 <옥자>를 떠올리게 한다는 평도 사회관계망서비스에서 찾을 수 있다.
동물 죽임, 환경 파괴, 광주 학살이 결국은 한 문제라는 걸 깨닫게 된다. 그는 1981년 초판에서 “아아, 무간지옥에 떨어져 마땅한 인간들 가증스런 탐욕 앞에 무참히 죽어간,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죽어가고 있는 뭇 생명들…… 슬픈 눈 염소며 강아지며 닭이며 토끼…… 그리고…… 아아 관세음보살이여”라고 썼다. ‘그리고’ 다음 말 줄임표는 광주 희생자를 말하는 것일 터다.
https://www.khan.co.kr/culture/book/article/202209251600001
소설은 우리말로 가득하다. 김성동은 <국수>를 내면서 <국수사전 아름다운 조선말>도 출간했다. 2022년 개정판에서 김성동이 ‘왜말’이라 부르는 일본어와 일본 한자를 다시 고쳤다. ‘의’를 될 수 있는 대로 뺐다. ‘편안’이나 ‘고민’ 같은 개념어는 각각 ‘푸근’과 ‘냉가슴’으로 바꿨다.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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