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도 떨게한 '장군 3인방' 천•천•천 세 개의 하늘 이야기를 아십니까
YTN라디오(FM 94.5) [YTN 뉴스FM 슬기로운 라디오생활]
□ 방송일시 : 2022년 12월 30일 (금요일)
□ 진행 : 이현웅 아나운서
□ 출연: 이준식 전 독립기념관장
* 아래 텍스트는 실제 방송 내용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보다 정확한 내용은 방송으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 이현웅 아나운서(이하 이현웅): 우리나라 독립운동에서 만주벌판을 가득 채운 독립의 열기, 신흥무관학교를 빼놓을 수 없겠죠. 그렇다면 혹시 남만주 삼천결의에 대해 들어보셨는지요? 지청천, 김경천, 신동천 장군의 이야기입니다. 우리 일상에서 보훈 문화가 자리잡을 때까지. 국가보훈처와 함께 하는 특별기획 '슬기로운 보훈생활' 오늘은 6번째 시간이고요. 이준식 전 독립기념관장과 함께 '세 개의 하늘, 남만주 삼천결의'라는 주제로 이야기 나눠보겠습니다. 직접 스튜디오 나오셨습니다. 관장님 안녕하십니까?
◆ 이준식 전 독립기념관장(이하 이준식): 안녕하십니까.
◇ 이현웅: 오늘 관장님을 그냥 모신 게 아니고요. 1940년 중국 충칭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대로 창설된 광복군 총사령관인 백산 지청천 장군의 외손자시라고요?
◆ 이준식: 네, 그렇습니다.
◇ 이현웅: 그러면서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 재산조사위원회 상임위원를 맡았고요. 근현대사기념관 관장 맡으셨고, 독립기념관장까지 역임하셨습니다. 상당히 의미가 있는데 외할머니, 어머니, 외삼촌, 이모부까지 독립운동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야말로 '피가 독립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데, 특히나 어머님께서 아나운서, 제 선배님이시라고 들었어요.
◆ 이준식: 정식 아나운서는 아니고요. 194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충칭에 안착했을 때 당시 충칭이 중국 국민당 정부의 임시 수도였습니다. 중일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국민당 정부가 수도를 계속 빼앗기고 충칭까지 갔는데요. 충칭에서 자신들이 벌이고 있는 대일항전의 정당성을 선전하고 또 해외에 있는 화교들한테 '우리를 도와주십시오'라는 선전을 하기 위해서 국제방송이라는 걸 만들었습니다.
◇ 이현웅: 그 당시에요?
◆ 이준식: 예. 중국 안의 중국인들을 대상으로 한 방송이 아니라 해외를 대상으로 한 방송이었는데, 중국 국제방송에서 심야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특별히 시간을 할당을 했어요. 임시정부한테 당신들도 와서 선전 활동을 하라고 해서. 그래서 저희 어머니가 당시 아마 젊은 여성이어서 그렇겠죠. 아무래도 여성의 목소리로 선전하는 게 효과가 있다고 생각해서 그런지 밤에 중국 국제방송에 나가서 선전방송을 하셨습니다. 주로 일본군으로 끌려와 있는 젊은 조선인 병사들 대상으로 해서 '충칭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고 한국광복군이 있습니다. 일본 군대를 탈출해서 한국 광복군으로 오십시오. 한국광복군에 입대해서 독립운동 합시다'라는 선전방송을 하셨어요.
◇ 이현웅: 그런 방송은 그러면 한국어로 주로 이루어졌나요?
◆ 이준식: 한국어로도 하고 중국, 일본어로도 하고요.
◇ 이현웅: 방송의 무게감이 좀 다르게 느껴집니다.
◆ 이준식: 그래서 저희 어머니의 회고에 따르면, 중국 국민당 정부의 임시수도이긴 하지만 그래도 위험한 활동이니까 테러의 대상이 될지도 몰라서, 심야 방송 출연할 때는 경호원이 따라붙었다고 합니다.
◇ 이현웅: 그랬군요. 오늘 주제가 '세 개의 하늘, 남만주 삼천결의'라는 제목을 붙여봤는데, 이른바 '천천천'입니다. 여기 주인공 중에 한 명이기도 한데. 관장님의 외조부인 지청천 장군 있고요, 김경천 장군이 있고요, 신동천 장군까지 이야기를 나눠보려고 합니다. 어떤 결의를 했길래 '남만주 삼천의 혈맹 결의'라고 불리게 되는 겁니까?
◆ 이준식: 정확하게 얘기하면 결의한 것은 김경천 장군하고 지청천 장군이 결의를 한 것이고요. 두 분은 일본 육군 사관학교 선후배 사이입니다. 일본 육군사관학교 재학 시절에 대한제국의 주권을 일제에게 빼앗겼죠. 경술국치가 일어났죠.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국비유학생으로 파견 나가 있던 조선인 학생들이 나라가 망했다고 그러니까 심야에 회동을 합니다. 도쿄 근처에 아오야마라는 곳에 모여서 회동을 합니다. 나라가 망했는데 우리 어떡할 거냐. 일부에서는 지금 당장 귀국해서 총 들고 싸우자, 또 일부는 기왕 일본 육군사관학교에서 지금 일본 군사훈련을 받고 있으니까 제대로 군사 교육을 받은 다음에 때가 됐을 때 망명해서 독립운동하자. 그런데 결국은 후자 쪽으로 모았어요. 그러니까 그 자리에서 김경천 장군하고 지청천 장군은 일본 육사 선후배 사이로 같이 만나서 결의를 한 거죠. 두 분이 결의를 한 것은 맞고요. 신동천 장군하고는 따로 결의했다기보다는 이 세 분이 모두 공교롭게 같은 시기에 신흥무관학교에서 교관으로 활동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독립운동에 대해서 뜻을 같이 한 거죠. 뜻을 같이 했다는 거는 독립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장투쟁, 독립전쟁이 가장 필요하다. 독립전쟁을 치를 새로운 병사들을 양성해야 된다. 새로운 장교들을 양성해야 된다는 데 뜻을 같이 했고요. 그래서 그 세 분이 사실 같이 활동한 시기는 그렇게 길지 않은데, 세 분이 신흥무관학교에 모여서 같이 활동했다는 사실 자체가 당시 만주에 살고 있는 동포들한테 준 영향이 굉장히 컸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당시 만주에 있는 동포들이 얘기했다고 하는 게, '뛰는 김좌진 나는 홍범도'. 김좌진 장군, 홍범도 장군 모두 무장투쟁의 중요한 지도자들이죠. 김좌진 장군을 '뛰는'으로 묘사하고 홍범도 장군은 '나는'이라고 묘사를 해요. 그래서 홍범도 장군의 별명이 '나는 홍범도 장군'이거든요. 근데 그 뒤에 또 붙는 내용이, "만주 삼천이면 산천초목도 떤다". 무슨 얘기냐 하면, 남만주에 있는 세 천 때문에 그만큼 일본군이 그만큼 겁을 먹고 있다, 이런 의미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당시 만주 독립군에 대한 우리 민족의 만주 동포들의 기대가 얼마나 컸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가사죠.
◇ 이현웅: 이런 내용은 제가 교과서에도 못 본 것 같은데 상당히 디테일한 내용을 어떻게 이렇게 마치 본인 경험 얘기하시는 것처럼 잘 해 주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바로 '천천천' 한 분씩 이야기를 나눠볼 텐데, 먼저 외할아버지 이야기가 되겠네요. 지청천 장군. '이름 부자'라고 합니다. 지대형, 지석규, 지청천, 이청천. 이렇게 다양한 이름을 썼다고 하는데 왜 그랬습니까?
◆ 이준식: 본명은 따로 있고요.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본명이었는데.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직후에 선배인 김경천 장군하고 같이 망명을 결행하기로 결정을 합니다. 그런데 당시 김경천 장군도 그렇고 지청천 장군도 그렇고 일본 육군 장교 신분이었거든요. 장교가 병역을 탈취해서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서 망명을 했다, 이건 큰일이죠. 그래서 망명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변성명을 하십니다. 이름을 바꿉니다. 지대형이라는 사람이 망명했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서 이름을 바꿉니다. 그래서 지청천 장군의 어머니 성씨인 이 씨를 따라서 성을 이 씨로 바꾸고. 대형이라는 이름을 청천으로 바꿉니다. 청천이라는 이름을 바꾼 데에는 두 가지 이야기가 있는데요. 하나는 압록강을 기차를 타고 압록강을 건널 때 압록강에 다리 비치는 걸 보고 그래서 청천이라고 이름을 지었다는 이야기가 하나 있고요. 또 하나는 어렵게 망명을 하는데 조국이 독립될 때까지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 그러니까 푸른 하늘을 되찾을 때까지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뜻을 다지기 위해서 청천으로 이름을 바꿨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후손으로서는 뒤의 이야기가 더 재밌죠.
◇ 이현웅: '이름 부자'라고 하지만 사실 그 안에는 가슴이 아픈 그런 이야기네요.
◆ 이준식: 지금 많은 분들이 저한테 그렇게 물어봐요. '지청천 장군은 지청천이 맞아요, 이청천이 맞아요?' 왜냐하면 서류에는 다 이청천으로 나오거든요. 이청천이라는 성명을 쓴다 하면 계속 자료에 이청천으로 나오니까. 자료에는 다 이청천으로 나오는데 왜 지금 지청천이라고 그러느냐. 그래서 그런 이야기를 자세히 설명을 해야 되죠, 그러니까 저희 외조부님께서는 해방된 다음에 환국하셔서 성명 복구를 하십니다. 워낙 이청천이라는 이름으로 많이 알려져서 '내가 이청천이 아니라 지청천이라는 이름을 써야 합니다'라고 성명 복구를 공식적으로 하십니다.
◇ 이현웅: 그러셨군요. 앞서서 지청천 장군과 김경천 장군,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 선후배 사이라고 말씀을 해 주셨는데. 그러면 앞서서 결의한 대로 거기서 배울 거 배우고 일본군의 병서를 가지고 신흥무관학교로 간 겁니까?
◆ 이준식: 그렇죠. 아까 말씀드린 결의가 '아오야마의 맹세'라고 흔히 하는데요. 아오야마의 맹세에 참여한 일본 육군사관학교 학생들 가운데 실제로 독립운동에 투신하신 분은 세 분밖에 안 되고요. 김경천 장군, 지청천 장군 말고 다른 한 분도 계신데. 한 분은 행적이 그렇게 뚜렷하게 드러나지는 않습니다. 망명해서 독립운동하신 건 맞는데, 김경천 장군이나 지청천 장군만큼 뛰어난 활동을 하시지 않으셨고요. 다른 재학생들은 모두 일본군에 남아 있거나 아니면 일본 군복을 벗더라도 망명하지 않고 국내에서 다른 활동을 하셨죠. 그래서, 모르겠습니다. 그야말로 선택의 기로에서 어떤 분들은 망명에서 독립운동하는 길을 선택했고요. 또 어떤 분들은 그냥 일본 군복을 계속 입는 길을 선택을 했고요. 그래서 지청천 장군의 일본 육군사관학교 동기생 가운데 홍사익이란 분은 일본군에서 아주 높이 올라가서 일본 육군 중장까지 올라갔습니다.
◇ 이현웅: 참 이게, 그 당시를 생각해 보면 그 선택에 대해서 함부로 욕하기도 어렵긴 한데. 그래도 이렇게 역사에 다 기록이 돼서 결국 전해집니다. 두 번째 하늘 김경천 장군 얘기도 잠깐 나눠볼게요. 외할아버지의 선배?가 될 텐데. 당시 연해주에 거주한 조선인들에게는 '백마 탄 김 장군'이라고 불렸다고요
◆ 이준식: 그렇게 불린 이유가, 당시 독립운동하시던 분들이 백마 타고 독립운동을 하지는 않았거든요. 그런데 '백마 탄 김경천 장군'이라고 불린 이유가, 김경천 장군은 일본 육군에서 기병 장교였습니다. 당시 일본 육군에는 기병, 보병이 따로 있었는데요. 지청천 장군은 보병 장교였고 김경천 장군은 기병 장교였습니다. 그래서 김경천 장군 남아 있는 사진도 보면 일본 군복을 입고 말 옆에 서 있는 사진이 있거든요. 그러니까 기병 장교 출신이기 때문에 아마 백마 탄 장군이라는 별명을 가지신 것 같아요. 이분은 함경도 출신이고요. 신흥무관학교 교관을 지낸 이후에는 여러 가지 이유로 만주에서 활동하시지 않고 당시 당시에는 소련이라고 그랬죠. 러시아로 가서 러시아에서 주로 활동을 하셨습니다.
◇ 이현웅: 과거 사진들 보면 마치 영화배우처럼 상당히 잘생긴 외모를 보이는데, 그래서 '백마 탄 왕자' 거기서 따온 거 아니냐는 얘기들도 나오는 것 같거든요.
◆ 이준식: 김경천 장군은 기병 장교 출신이기 때문에, 그래서 말이 연상되니까 백마 탄 장군이라는 별명을 가지신 거죠.
◇ 이현웅: 그랬군요. 그런데 말씀해 주신 것처럼 1939년 소련군에 체포돼서 수용소에서 사망한 것으로 전해져요. 혹시 유해는 지금 국내로 안장이 된 건가요?
◆ 이준식: 아마 국내로 못 돌아온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 당시 돌아가신 분들 가운데 소련에서 일본의 스파이라는 혐의를 쓰고 많은 조선 사람들을 죽입니다. 독립운동하신 분들을 죽이거든요. 그렇게 해서 희생당하신 분들은 어디에 묻혀 있는지를 모릅니다. 얼마 전에 홍범도 장군 유해가 봉환이 됐는데요. 홍범도 장관의 경우에는 그냥 돌아가셨기 때문에 그래도 묘가 확인돼서 유해를 봉환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고 정치범으로 몰려서 숙청돼서 처형되신 분들은 안타깝게도 유해를 찾기가 굉장히 힘듭니다.
◇ 이현웅: 보훈처에서 계속 노력을 하고 있긴 한데 여전히 어려운 부분이 많다고 합니다. 자료나 이런 것들을 발굴, 그래도 노력은 계속해야겠고요.
◆ 이준식: 어렵죠. 그래도 노력은 계속 해야 되죠.
◇ 이현웅: 꼭 모시고 올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세 번째 하늘 신동천 장군 얘기도 해보겠습니다. 독립기념관에 가면 신동천 장군의 유명한 사진이 있다고요? 어떤 사진입니까?
◆ 이준식: 만주에서 무장 투쟁을 할 때 장군들이 대개 총알 이런 거 몸에 두르거나 하지는 않는데 신동천 장군은 본명은 신팔균인데요. 신동천 장군은 몸에 이렇게 탄띠를 두르고 사진을 찍은 게 있어요.
◇ 이현웅: 람보 같은 느낌인가요?
◆ 이준식: 그것도 약간의 변장이라고 해야 될까요. 전투모도 아니고 갓이 좀 나온 그런 모자를 쓰고 그래서, 굉장히 복장이 독특해서 사람들이 보면 잊을 수 없는 사진인 거죠.
◇ 이현웅: 그 사진은 언제 어떤 의도로 찍은 거예요?
◆ 이준식: 독립운동 하시던 분들이 사진을 찍는 데 특별한 의도가 있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실제로 1910년대 말부터 1920년대 만주에서 무장투쟁 하시던 분들이 사진을 남긴 경우가 거의 없거든요. 총 들고 일본하고 싸우는데 사진 찍을 여유가 없죠. 그러니까 아마 잠깐 틈이 났을 때 사진을 찍으신 모양입니다. 그래서 그 사진이 워낙 특이해가지고 사람들한테 깊은 인상을 남기죠.
◇ 이현웅: 사진이 지금도 가면 있는 거죠? 또 가서 한번 다시 자세히 둘러봐야겠습니다.
◆ 이준식: 참고로 말씀드리면 사실은 김경천 장군이나 지청천 장군은 다 하늘 천 자(天)를 쓰는데, 두 분은 별명입니다. 이명입니다. 신동천 장군은 두 분의 천 자 때문에 하늘 천 자라고 많이 알려져 있는데, 실제로는 이분은 동천이 호예요. 동천이 호고. 하늘 천 자가 아니라 원래는 내 천 자(川)를 썼습니다.
◇ 이현웅: 그러면 3개의 하늘이 아니고.
◆ 이준식: 2개의 하늘과 1개의 강인데. 그런데 사람들이 다 청천, 경천에 하늘 천 자를 쓰니까 신동천 장군도 하늘 천 자라고 생각을 하는 거죠.
◇ 이현웅: 이것도 새롭게 아는 정보입니다.
◆ 이준식: 신동천 장군은 양반 출신이고요. 흔히 하는 말로 뼈대 있는 집안 출신이고요. 이분은 대한제국의 육군 장교였습니다. 근데 이제 나라가 망하니까 만주로 망명해가지고 무장투쟁을 벌이신 거죠.
◇ 이현웅: 이 과정은 조금씩 달랐지만 어쨌든 세 분이서 함께 독립운동을 위해서.
◆ 이준식: 세 분이 공통점이 뭐냐면 장교 출신이라는 거예요. 또 신동천 장군은 대한제국 육군 장교이기는 하지만 당시 대한제국 육군이 일본군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었거든요. 그러니까 사실상 일본군의 전략 전술에 굉장히 능한 분들이라는 겁니다. 아까 김경천 장군하고 지청천 장군이 망명하면서 일본군 병서를 갖고 갔다는 말씀을 잠깐 하셨는데. 세 분이 모두 일본군의 전략 전술에 능하기 때문에 이 세 분의 망명을 통해서 독립군들이 일본군들이 어떻게 움직일지를 예측하는 게 가능해졌어요.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고 그러니까 이 세 분이 신흥무관학교에서 일본군의 전략 전술을 앞으로 독립군 간부가 될 학생들한테 가르쳤고. 그 학생들이 나중에 청산리 전투나 봉오동 전투에서 활약을 하면서 일본군의 전력 전술을 꿰뚫을 수가 있었던 겁니다. 이렇게 이어지는 겁니다.
◇ 이현웅: 오늘 사실 준비된 내용이 상당히 많았는데 시간 관계상 굉장히 짧게만 제가 여쭤봤거든요. 근데 듣다 보니까 제가 흔히 교과서나 이런 데서 볼 수 없었던 내용들이 많았고. 이게 흥미롭다는 표현을 써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상당히 귀에 잘 들어오는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다음에 또 한 번 이런 얘기 자세하게 전해주시면 너무 좋을 것 같아요. 다음에 또 모시겠습니다. 오늘 잘 들었고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요.
◆ 이준식: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 이현웅: 지금까지 '슬기로운 보훈생활' 이준식 전 독립기념관장과 함께했습니다.
YTN 이은지 (yinzhi@ytnradi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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