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프] "전 세계에서도 희귀한 공" - 정우영의 '광속 싱커'

이성훈 기자 2022. 12. 30.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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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 WBC에서 통할까?


‘투수의 손은 투구하는 순간에 어깨보다 위로 올라가서는 안 된다.’
-1882년 미국 내셔널리그 규칙

야구 역사 초창기에 투수들은 모두 '잠수함 투수'였다.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위에서 내리꽂는 투구폼, 이른바 ‘오버핸드 투구’가 금지됐기 때문이다. 지금으로 치면 ‘언더핸드’ 혹은 ‘사이드암’ 투구폼만 허용됐다. 이유는 ‘투수의 역할’에 대한 관점이 지금과 매우 달랐기 때문이다. 19세기 중반까지 투수는 타자를 잡아내는 사람이 아닌, ‘타자가 칠 만한 공을 던져서 플레이를 시작할 수 있게 하는 선수’로 인식됐다. 오버핸드 투구는 너무 빨라서 타자가 치기 어려운 공을 던지게 되기 때문에, ‘플레이를 시작할 수 없는’ 일종의 반칙으로 간주된 거다. 

물론 ‘오버핸드 금지 규정’은, 타자를 아웃시켜야 하는 수비팀 본연의 임무와 모순 관계다. 투수들은 당연히 규정의 한계를 시험하며 어떻게든 빠른 공을 던지려 들었다. 팔 높이가 제한선을 넘었는지 여부를 놓고 투수와 상대 팀, 심판 사이에 분란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1884년, ‘오버핸드 금지 규정’은 철폐된다. 투수들은 머리 위로 팔을 올려 마음껏 빠른 공을 던지게 됐다. 투수와 타자가 속도와 힘으로 맞붙는 ‘우리가 아는 야구’가 시작됐다.

거꾸로 말하면, 언더핸드 혹은 사이드암 투구폼은 빠른 공을 던지기에 불리한 투구폼이다. 속도는 투수의 가장 중요한 무기 중 하나다. 속도를 내기 어려운 잠수함 투수는 그래서 지금 전 세계에서 ‘희귀종’이다. 근근이 잠수함 투수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선수들은, 속도 대신 ‘낯설음’으로 살아남으려 노력한다. 타자가 평생 눈에 익힌 오버핸드 투수가 던지는 투구의 움직임과는 완전히 다른, 낮은 곳에서 출발해 상하좌우로 휘어지는 움직임으로 승부한다. 

그래서 ‘강속구 잠수함 투수’는 마치 ‘빨간 바다’, ‘뜨거운 맥주’처럼 일종의 형용모순이다. 그런데 아주 가끔, 상식을 깨고 ‘밑에서 광속구를 던지는’ 투수가 등장한다. 속도와 생소함을 모두 가진 그들은 리그를 압도한다. 과거의 ‘애니콜’ 임창용, 그리고 2022년 홀드왕 정우영(LG)처럼.

정우영은 지난겨울, 혹독한 웨이트 트레이닝을 통해 근육량을 몰라보게 늘렸다. 한눈에 봐도 체형이 완전히 달라졌다. 구속 증가는 더 놀라웠다. 지난해 시속 146.7km였던 주무기 싱커의 평균 속도가 올 시즌에는 151.5km으로 올라갔다. 한 해 사이에 시속 5km에 가까운 속도 증가는 전례를 찾기 힘든 엄청난 변화다. 

평균 시속 150km를 넘기는 ‘옆구리 투수’는 세계적으로 드물다. 정우영이 공을 뿌리는 지점, 이른바 ‘릴리스 포인트’의 높이는 평균 130.4cm다. 여기서 에누리를 조금 줘서 릴리스 포인트가 140cm 이하인 투수를 ‘잠수함 투수’라고 규정해 보자. 올 시즌 메이저리그에서 릴리스 포인트가 140cm보다 낮았던 투수는 겨우 16명. 이들 중 정우영보다 빨랐던 투수는? 딱 한 명뿐이다.


일본 프로야구에는 평균 시속 146km를 넘긴 잠수함 투수가 아예 없다. 오버핸드 투수까지 포함해도, 정우영보다 빠른 싱커-투심을 던진 투수가 없다. (오릭스의 오버핸드 투수 기자와 나오후미의 투심이 평균 시속 151.5km로 정우영과 같았다.)


즉 정우영의 ‘사이드암 광속 싱커’는 지금 지구상에서 가장 희귀한 공 중에 하나인 거다. 이렇게 낯선 공이다 보니, 효과가 엄청나다. 야구 연구계의 중요한 발견 중 하나는, ‘인플레이된 타구가 안타가 되는 걸 막는 능력’이 투수 별로 별 차이가 없다는 거다. 즉 이제 야구팬들에게도 익숙한 기록이 된 BABIP(Batting Average on Ball in Play)는 투수의 능력보다 운이 더 큰 영향을 끼친다는 거다. 가령 현재 프로야구 최고 투수 안우진의 BABIP(0.268)보다 최민준(SSG)의 BABIP(0.216)이 낮은 건, 둘의 구위 차이가 아니라 ‘운의 영향 차이’로 봐야 한다는 거다. 

하지만 가끔 예외가 등장한다. 엄청나게 빠르거나, 구종이 다양하거나, 너클볼처럼 낯선 공을 던지는 투수들은 꾸준하게 리그 평균보다 낮은 BABIP을 기록하기도 한다는 거다. 즉 타자의 방망이 중심을 꾸준하게 피해 가는 능력을 가진 투수들이 드물지만 존재한다는 거다. 정우영은 그런 투수들 중 하나로 보인다. 21세기 들어 통산 200이닝을 넘긴 투수들 가운데, 정우영보다 BABIP이 낮은 투수는? 한 명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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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훈 기자che0314@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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