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남북회담 문서 3028쪽 분량 공개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남북이 1972년부터 1977년까지 5년간 이산가족상봉을 위한 회담을 40여 차례나 가졌지만 북한의 국가보안법 폐지 등 무리한 요구로 인해 결렬되는 수순을 밟은 사실이 30일 드러났다.
그 이후로도 계속된 남북 입장 차 속에 1차 이산가족상봉 행사는 김대중 정부에서 열린 첫 남북 정상회담을 계기로 한 2000년에야 성사됐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통일부… 이산가족 상봉 팽팽
남북이 1972년부터 1977년까지 5년간 이산가족상봉을 위한 회담을 40여 차례나 가졌지만 북한의 국가보안법 폐지 등 무리한 요구로 인해 결렬되는 수순을 밟은 사실이 30일 드러났다. 그 이후로도 계속된 남북 입장 차 속에 1차 이산가족상봉 행사는 김대중 정부에서 열린 첫 남북 정상회담을 계기로 한 2000년에야 성사됐다.
이 같은 내용은 이날 통일부가 공개한 3028쪽 분량의 남북대화 사료집 4~6권에 담겼다. 이번에 공개된 사료집에 따르면 남북은 1972년부터 1977년에 걸쳐 각각 7차례의 남북적십자 본회담과 대표회의, 25차례에 이르는 남북적십자 실무회의를 갖고 이산가족상봉 문제 해결을 목표로 대화했지만 성과를 얻지 못했다. 남북은 1·2차 남북적십자 본회담에서 이산가족 문제 해결을 위한 5개 의제, 향후 회담 일정 등에 순조롭게 합의했다. 하지만 세부 논의가 시작된 제3차 남북적십자 본회담에서부터 상반된 입장과 견해차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남측은 이산가족 주소·생사 확인 사업을 수행하는 데 있어 국제적십자에서 통용되는 방식에 따를 것을 원한 반면, 북측은 적십자 인원이 각각 상대측 지역을 방문해 확인하는 방식을 요구한 것이다. 특히 북한은 남측의 반공법·국가보안법 철폐 필요성까지 들고나와 이후 회담을 교착상태에 빠뜨렸다. 1973년 7월 열린 제7차 본회담에서 우리 측은 회담 촉진을 위한 시범사업으로 ‘추석성묘 방문단’ 교류를 제안했지만 북측이 거부하고 한 달 뒤인 8월 일방적으로 남북대화 중단을 선언했다. 다행히 같은 해 11월 적십자 본회담 재개를 위한 남북 접촉이 이뤄졌고 1974년 5월까지 판문점에서 7차례나 이어진 남북 적십자 대표회의를 통해 적십자 실무회담의 일자·구성·운영방식 등이 합의됐다. 그러나 그해 7월 시작된 첫 실무회담부터 1977년 12월까지 3년 5개월에 걸친 25차례의 실무회담도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다.
김유진 기자 klug@munhwa.com
[ 문화닷컴 | 네이버 뉴스 채널 구독 | 모바일 웹 | 슬기로운 문화생활 ]
[Copyrightⓒmunhwa.com '대한민국 오후를 여는 유일석간 문화일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구독신청:02)3701-5555 / 모바일 웹:m.munhwa.com)]
Copyright © 문화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남한식 말투’ 쓴 북한 대학생 4명 퇴학처분 후 탄광배치”
- 美, 브래들리 장갑차 우크라에 지원 검토…“사실상 경전차, 지상전 능력 제고”
- 제2경인고속 방음터널 화재…사망자 속출[영상]
- 봉은사, ‘잃어버린 강남 땅’ 국가소송으로 417억 배상 확정
- ‘뉴스공장’ 하차 김어준 “3년6개월 후 돌아와 20년간 일할 것”
- 이성민 “내삶 가끔 불쌍…다시 태어나면 배우 안해”
- ‘한동훈 주거침입’ 더탐사 구속영장 기각…“구속 사유·필요성 소명 부족”
- 극단선택 이태원 생존자 모친 “내 아이도 참사 희생자”
- 공직자 자제, 스포츠·연예계까지 70명 수사선상에…대형 ‘병역비리’ 조짐
- ‘최연소 아나’ 김수민, SBS 퇴사 이유…“재능없어 괴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