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기농에는 경이로운 자연이 담겼습니다
2022년 12월22일 오전, 충북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 농가에 흰 눈이 깔렸다. 동네가 고요해 찬 바람이 비닐하우스에 부딪히는 소리까지 선명했다. 패딩 바지와 조끼를 껴입은 농부 임종래(60)씨는 밭 한쪽에 놓인 컨테이너에서 겉보리 씨가 담긴 푸른 대야를 들고나왔다. 물에 젖은 씨앗을 살피니 하얗게 촉이 나온 것도, 아직 그대로인 것도 있었다.
“시장 가서 씨를 사면 살균·살충 코팅이 다 된, 소독된 종자를 팔아요. 우리는 농촌진흥청에 약처리 안 된 씨를 주문했어요. 앞으론 기른 씨를 받아 쓸 거예요.”
60여 평 남짓한 비닐하우스엔 화석연료를 이용한 난방시설이 없는 대신 이중으로 문이 달렸다. 임씨가 비닐하우스 안으로 들어가 부직포를 걷어내자, 연둣빛 보리순이 모습을 드러냈다. 흑갈색 토양과 푸릇한 보리순, 겨울이라 전원을 꺼놓은 친환경 유인포충기가 전부였다. 비닐하우스 안팎엔 흔한 제초제 통이나 화학비료는 없고, 친환경 식물비료 몇 개만 있었다.
“유기농 다 거짓말인 것 아시죠?”
임종래·구미숙 부부는 유기농산물(이하 유기농)을 다품종·소량생산하는 농부다. 한겨울이라 밭에는 보리순·유채·비트 등만 남았지만 보통은 감자·토마토 등 40여 가지 작물을 기른다.
“저는 손에 열이 많아서 장갑 끼고 보리순을 살살 베어요. 그래야 소비자한테 갈 때 싱싱해요. 우리는 날이 추워도 전기난방을 안 하니까 하우스 안 온도가 3도 정도거든요. 스마트팜(정보통신기술로 지능화한 농업시스템) 같은 데보다 재배기간이 훨씬 오래 걸릴 수밖에 없어요.”
임씨는 바퀴 달린 낮은 의자에 앉더니 보리순을 꼭 한 움큼씩만 잡고 낫으로 베어내며 말했다. 보리순은 겨울에 키우기 비교적 쉬운 작물이다. 씨를 땅에 바로 심지 않고 3~12시간 물에 담가놨다가 건져서 사흘 뒤 하얗게 촉이 나오면 심는다. 10~15㎝ 키가 자라면 베어내는데, 날이 더울 땐 7일이면 자라지만 겨울엔 2주는 걸린다. 화석연료로 난방하면 더 빨리 더 많이 수확할 수 있지만, 매년 기후변화를 몸으로 느끼는 그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겨울철 작물 재배 온도를 유지하기 위한 난방 에너지, 스마트 설비에 드는 에너지, 농기계 연료 등을 떠올리면 “그건 우리 속도랑 안 맞는다” 싶다.
비닐하우스 입구에 걸린 친환경 유인포충기는 살충제·제초제 등 농약을 쓰지 못하니 망에 벌레를 유인해 가두는 용도로 쓴다. 임씨는 “농사 좀 지어본 사람들이 ‘유기농 다 거짓말이다, 벌레 생기고 병 생기고 자라지도 않는다’ 이런 얘기를 하는데 유기농이라고 아무것도 안 하는 게 아니다. 수확하고 남은 보리순 밑동에 유용미생물(EM)을 뿌려 유기물 분해를 빨라지게 하고, 보통 해충을 예방하려 유기농 목초액을 쓰는 식으로 여러 방법을 찾는다”고 말했다.
보리순이 자라는 땅에 동전 크기보다 약간 큰 구덩이가 2개 나 있었다. 구미숙씨는 “작은 야생쥐가 왔다 갔나보다”며 “호박씨를 심었을 땐 잠깐 밥 먹으러 다녀온 사이 야생동물이 다 파먹은 적도 있다. 동물도 코팅된 씨앗은 안 먹는다”고 말했다.
부부는 납품량이 좀 적더라도 저녁에 한 번, 아침에 한 번 주문량을 확인해 보리순을 수확·포장하고 오후 4시가 되기 전 한살림 청주 미호천영농조합 물류센터에 갖다준다. 재사용 바구니에 쌓인 상품은 다시 안성물류센터로 간다. 운송차들이 한살림 매장과 가정으로 이 상품을 배송하면, 비로소 소비자와 만난다.
농사 도와주고 머리가 아팠던 이유
웰빙이 화두가 되면서 우리나라에서도 유기농을 찾는 소비자가 늘었다. 주 3회 유기농 채소를 산다는 주부 김아무개(63·서울 마포구)씨는 “건강한 먹거리에 관심이 많아서 10년 전부터 유기농을 이용했다. 환경을 지키자는 뜻보다 식구들과 좋은 먹거리를 먹고 싶어서”라고 말했다. 환경 문제에 관심 많은 윤송이(37·경기 용인)씨도 브로콜리, 호박 등 5살 딸 식단에 쓸 채소를 유기농으로 산다. 그는 “일반 마트에는 그냥 ‘저탄소 사과’ 이런 식으로 쓰였지, 무농약·유기농 인증 정보가 자세히 안 나와 있어 한살림을 주로 이용한다”고 말했다.
친환경 농산물을 생산·유통하는 생활협동조합(생협)은 한살림, 두레생협, 아이쿱, 행복중심생협 등 다양한 쇼핑몰과 매장이 있다. 최근엔 ‘마켓컬리’ ‘오아시스’ 등 친환경 식자재 생산·유통을 표방하는 쇼핑몰도 늘고, 대형마트에서도 농산물 생산자의 얼굴을 내세운 포장지를 쓰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농산물 생산 과정을 눈으로 볼 수 없는 소비자에게 ‘먹거리를 믿는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이다. 소비자는 채소 포장지에 표시된 ‘인증’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그린마케팅(자연환경보전 등을 고려해 소비자에게 접근하는 마케팅)이 늘면서 상품 문구가 너무 다양해졌다는 거다. ‘유기농, 무농약, 우수관리인증(GAP)’ 등 다양한 인증 표시와 더불어 화려한 마케팅 문구를 본 소비자는 이 말이 정확히 뭘 의미하는지 헷갈린다.
“손님들이 와서 뭐가 어떻게 다른지 물어보기도 해요. 유기농보다 무농약이 더 좋은 상위 개념으로 잘못 아는 손님도 많고요.”(한살림 서울 아현매장 직원 오소영씨)
보통 농산물에 많이 표기된 ‘GAP’(우수관리인증 표시)란 초록 글씨가 친환경 인증 표시와 비슷해 착각하는 소비자가 많지만, GAP는 생산·수확·포장·유통 과정에서 위해요소 항목의 관리 기준을 통과하면 된다. 적정 수준의 농약과 화학비료, 제초제와 유전자변형식품(GMO)까지 허용한다. 반면 합성농약에 더해 화학비료까지 전혀 사용하지 않으면 ‘유기농’이고, 합성농약은 사용하지 않지만 화학비료는 권장량의 3분의 1 이내를 사용하면 ‘무농약’이다.(그림 참조)
실제 유기농 먹거리는 우리 몸에 좋을까? 미국 유기농업 연구기관 로데일연구소는 2019년 5월 누리집에 올린 보고서에서 유기농 식품을 선택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국제암연구소(IARC)가 글리포세이트, 말라티온, 다이아지논 등 일반적 살충제와 제초제를 발암 가능성이 있는 물질로 분류했고, 우리는 농업에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살충제와 제초제를 사용하고 있으며, 전세계 암 발생률은 증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임씨의 이야기는 더 생생했다. “친구가 모내기 때 바빠서 농사를 도와달라고 한 시기가 매년 있었는데 이상하게 그때만 편두통·감기 증상이 심하고 아침에 못 일어나겠는 거다. 나중에 그게 ‘농약 중독 증상’임을 알았다”고 말했다. 옆에서 얘기를 듣던 이창배 한살림 참여인증팀장도 “(전국 농가를 돌아다니며 만난) 생산자분들 보면 ‘농약 중독 증상으로 내가 죽겠는데, 이걸 누구한테 주냐’며 (유기농업을) 시작했다는 사람들도 있다”고 말했다.
토종 자주감자 세 쪽을 1.5t으로
구미숙씨는 자연의 힘에 대한 믿음이 있다. 충북 보은에서 받아온 토종 자주감자 세 쪽이 6년이 지나면서 1.5t에 이르게 돼 상품 출하까지 했다. 시장에서 소독된 씨를 사와 설비로 키운 작물과, 다른 농가에서 얻은 토종 씨알로 생산량을 늘려가는 기쁨은 완전히 달랐다. 임종래·구미숙 부부는 이렇게 경이로운 자연이, 요즘 들어 급격하게 달라지고 있단 걸 느낀다.
“5년 전쯤 토종 수박 농사를 지었어요. 비·일조량이 오락가락하니까 당도는 안 나오지, 비 맞아서 다 죽지, 못하겠더라고요. 몇 년 전 일본 야마나시현에서 45년 사과농사 지은 분을 만났는데, 어느 날 갑자기 나무가 못 견디고 사과를 다 놔버려서 떨어졌다는 거예요. 그런 건 처음 봤대요.”
구글코리아가 발표한 2022년 한국 올해의 검색어는 ‘기후변화’였다. 로버트 헤이즌 미국 조지메이슨대학 교수는 저서 <탄소 교향곡>에서 “공기 중 탄소량이 두 배로 늘고 그로 인해 빠르게 지구가 따뜻해지는 현상은 전례 없는 일이다. 인간은 계속해서 엄청난 양의 이산화탄소를 하늘에 버리고 있다. 이산화탄소 수치가 치솟고 있는 게 현실이고, 이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은 무지하거나, 탐욕스럽거나, 아니면 둘 다”라고 썼다.
임종래씨는 악순환처럼 느껴졌다. 기후변화로 유기농업이 어려워지고, 유기농업이 어려우니 더 많은 에너지와 농약, 화학비료가 필요해지는 식이다. 도시 생활자는 기후변화를 뉴스로 느끼지만, 농부는 기후변화를 몸으로 느낀다.
비닐하우스에서 나온 임씨는 유채가 있는 노지로 향했다. “겨울에 나는 것들이 좀 억세고 저항성 물질을 갖고 있어 사람 몸에 좋다”며 유채잎 하나를 따서 기자에게 건넸다. 살짝 무처럼 매운맛도 나면서 달큰했다. 된장국으로 끓여 먹어도 맛있다고 했다. “이 유채 씨앗도 토종 재래종이랑 기업이 순도 높여 개량한 거랑 많이 달라요. 종자 회사 씨앗으로 올해 작물을 키워 씨를 받아 심어도 내년엔 형질이 전혀 다른 놈이 나와요. 씨앗이 안 맺게 조작하는 회사들도 있어요.”
‘개인 먹거리 건강’ 너머
임씨도 어쩔 수 없이 현실과 타협해야 하는 부분(지하수를 끌어올려 쓰는 방식 등)이 있지만,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는 농사 방식은 내키지 않는다. 그럼에도 미래에 유기농업이 대세가 될지는 확신이 안 선다. 특히 드론으로 농약을 대신 쳐주는 업체 서비스가 늘어나는 상황에서, 다른 농부들이 유기농을 포기할까 걱정했다. 다른 농가에서 날아와 흩어진 농약이 한 번 검출되면 ‘사기였네’라는 식으로 낙인찍힌다는 거다.
“한편으론 믿어주는 것도 중요한 거 같아요. 30년 농사지었는데 유기농이라고 사기 쳤다? 그럼 지역사회에서 매장되는 거거든요. 유기농이란 게 농약 성분이 조금이라도 나왔냐 안 나왔냐, 이런 개념은 아니에요.”
그의 말대로 유기농업에서 중심 화두는 ‘개인 먹거리 건강’ 너머에 있다. 부부가 농약·화학비료·탄소배출이 많은 농업 방식을 피하는 건, ‘토양·생물다양성’과 관련해 느낀 문제의식 때문이 더 크다. ‘생태를 살리는 것’이 더 본질적으로 ‘인간의 건강’ 문제와 맞닿아 있다는 생각이다.
프랑스 환경부 장관을 지낸 환경운동가 이브 코셰는 저서 <불온한 생태학>(사계절)에서 “(비용을 최소화하고 수확률을 극대화하는) 생산 중심 농업 방식은 토질에 영향을 미친다. 산소 부족 현상이 일어나고, 중금속에 의한 오염 및 산성화가 일어나고, 유기농 성분의 함유량이 줄어든다. 20년간 집약적 농업을 하고 난 다음 토양이 원래의 성질을 회복할 때까지는 100년의 시간이 걸린다”고 설명한다. 친환경 농업은 이 과정을 위한, ‘공기·물·토양·식물·동물 체계가 전부 고려된 것’이어야 한다.
아직도 한국에선 유기농 식품을 ‘건강하고 신선한 먹거리’ 정도로만 인식하는 게 보편적이다. 자연은 틀에 맞춰 짜낸 상품이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완벽한 외양의 유기농산물’을 원한다. ‘알이 작은 토종 자주감자를 소비자들이 꺼린 경험’을 이야기할 땐, 구미숙씨의 말이 약간 빨라졌다. “저는 소비자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유기농산물이라도 늘 잘생기고 벌레 안 먹은 걸 최고로 치잖아요. (자연은) 그게 안 되는 거잖아요.”
자연은 상품을 만들지 않는다
구씨는 비트밭으로 가, 상품이 되지 못할 만큼 작은 비트 하나를 쑥 뽑아 건넸다. 그 비트로 만든 주스도 기자의 손에 쥐여줬다. 매장 판매대에 오르지 못한 비트주스일지라도 맛은 더없이 좋았다.
청주(충북)=손고운 기자 songon11@hani.co.kr
믿고 사는 직거래장터 ‘마르쉐’ 농부의 사과버터, 맛 좋고 말 좋고
‘봉금의 뜰’. 빨간 체크무늬 식탁보가 덮인 책상 위로 귀여운 손글씨가 적힌 나무팻말이 놓여 있다. 작은 구멍이 있지만 튼실한 배추, 말린 허브, 공심채와 달랑무(총각무) 장아찌도 있다. 소농 김현숙씨가 2022년 12월18일 서울 성동구 파아프랩에서 열린 ‘농부시장 마르쉐’에 직접 키운 작물을 팔러 나왔다. 경기도 양평으로 귀농한 지 8년 된 그는 가지, 호박, 허브 등 300여 가지 작물을 소량생산한다. 간이 매장명으로 붙인 ‘봉금’은 그의 어머니 이름이다.
생산자·소비자 간 농산물 직거래가 힘들어진 시대, 농부시장 마르쉐(프랑스어로 ‘장터’)는 농부와 손님이 ‘대화하는 시장’을 표방한다. “어떤 게 공심채예요? 바질가루는 요리할 때 써요?” 궁금한 게 많은 손님이 동시에 질문을 쏟아냈다. ‘말 많은’ 손님들은 화석연료를 적게 쓰는 농법으로 기른 무농약 채소인 걸 알기에, 구멍 난 채소를 군말 없이 사갔다.
이곳 장터에 온 손님과 농부들은 ‘믿는다’는 말을 많이 썼다. 60여 년 전 할아버지가 연 사과농원을 부모님에 이어 남편과 운영한다는 꼭지농원 이재선(32)씨는 “지역 축제에도 사과를 팔러 다녔는데 소비자가 ‘비싸다, 덤 많이 달라’며 따질 때가 많다. 저탄소 농법으로 사과를 길러 2021년부터 마르쉐에 참가하고 있는데, 이 장터에선 손님들이 ‘믿고 사간다’는 느낌이 좋다”고 말했다. 부부가 직접 수확한 사과로 만든 ‘사과버터’를 맛본 손님들은, 조금 비싸도 맛에 감탄하며 상품을 사갔다. 평소 ‘좋은 먹거리’에 관심이 많다는 김세나(40)씨는 “사과, 바게트, 파아프 템페(콩을 발효해 만드는 인도네시아 음식)를 샀다”며 “재료를 직접 키워서 오니 믿음이 간다”고 말했다.
사실 이런 장터는 한국인에게 익숙한 풍경이다. 이보은 농부시장 마르쉐 상임이사는 “시골 할머니들이 24절기 먹거리를 텃밭에서 자연의 순리대로 키워 먹고, 남은 건 장에 나가 팔고 했다. 우리가 전통적으로 해오던 문화”라고 말했다.
농부시장 마르쉐엔 ‘대화’와 ‘신뢰’만 있는 건 아니다. 판로를 찾기 힘든 소농들이 계속 ‘자연과 함께하는 경작’을 할 수 있도록, 경제적 뒷받침이 돼주는 곳이기도 하다. 일요일 낮(오전 11시~오후 3시)에 열린 이날 장엔 12개팀이 물건을 팔러 나왔는데, 각 생산자의 하루 매출 목표는 50만원이었다. 김현숙씨는 “제철 채소를 주로 팔다보니 계절마다 차이가 있는데 많게는 70만~80만원치를 판 적도 있다”고 말했다.
Copyright © 한겨레2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크롤링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