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영수 여사 피격'·'남침 땅굴'에도 대면한 남북…거친 설전에도 회담 지속
분위기는 경색됐지만 다음 날짜 잡으며 대화 노력 이어가
(서울=뉴스1) 이설 기자 = 이산가족의 한을 풀기 위해 진행된 1970년대 남북 적십자회담에서 남북은 '김대중 납치사건', 8·15 대통령 저격사건(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 남침 땅굴사건, 북한군의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등 굵직한 갈등을 낳은 사건 속에서도 대화를 중단하진 않았다. 갈등이 곧 대화의 단절로 이어지는 최근의 남북관계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기도 하다.
30일 통일부가 공개한 '남북적십자 분야 회담 문서'(남북대화 사료집)에는 이같은 남북의 '과거사'의 한 장면이 고스란히 담겼다. 이번에 공개된 사료는 지난 1972년 8월부터 1981년까지 진행된 남북 적십자회담의 회담록 등으로, 정부는 국민의 알권리와 대북정책의 투명성 제고 차원에서 남북회담 문서 공개를 정책화하기로 했다.
1973년 8월 8일 일본 도쿄 한복판에서 당시 박정희 정부의 '유신 선포'에 맞서 재야 정치인으로 활동하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 중앙정보부 요원으로 추정되는 이들에 의해 납치됐다.
그 해 11월28일 제1차 남북 적십자 대표회의가 열리자 당시 북측 대표는 이 사건을 언급하면서 "이러한 행동은 나라의 통일과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인민들의 의사를 유린하는 행위이고 숭고한 인도주의에 대한 엄중한 도전"이라면서 "우리는 더 남조선 중앙정보부 성원들과 한자리에 마주앉아 대화를 할 수 없다"라고 했다. 일종의 통일전선전술 차원에서 남북 회담장에 중정 요원이 참석하는 것에 대해 '불쾌감'을 드러낸 것이다.
당시 남북은 중단됐던 적십자 본회담의 개최를 놓고 기싸움을 펼치고 있었다. 우리 측은 1차 대표회의부터 모든 문제는 적십자회담을 통해 토의·해결되어야 한다는 기본입장을 강조하고 서울에서의 개최가 예정됐던 제8차 본회담의 조속한 개최를 촉구했다. 하지만 북측은 서울이 회담 분위기에 적합하지 않다며 8차 본회담을 서울 대신 평양에서 개최하자고 주장했다.
북측 대표는 회의을 마치면서 "명백히 해야할 것은 우리가 제의한 이 문제가 어느 일방에 관계되는 문제가 아니라 바로 남북 적십자회담 앞에 놓인 장애물을 없애자는 문제"라면서 재차 김대중 납치사건을 언급했다. 그러면서 "이러한 행위가 남북 공동성명의 정신과 동포애 그리고 적십자 인도주의 정신과 맞는지에 대해 다음 번에 말씀해달라"라고 말한다.
북측의 무리한 요구에 남측 대표가 "거기에 대해 대답하겠다"라며 회담 종료를 제지하자 북측 대표는 "다음 번에 하자"라며 답변을 듣기를 거부한다. 남측 대표가 재차 "(아까의 발언이) 질문입니까?"라고 묻자 북측 대표는 "그저 그렇게 해둡시다"라며 상황을 회피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남북은 1974년 8월15일 박정희 전 대통령의 암살 미수 사건이자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피격으로 사망한 뒤 약 2주 뒤인 8월28일 3차 남북적십자 실무회의를 갖는다. 남북은 다시 이 사안을 두고 날선 공방을 벌인다.
우리 측은 범인으로 지목된 재일동포 문세광이 친북 단체인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총련)의 자금을 받는 등 이 사건의 배후에 북한이 있다면서 회담장에서 이에 대한 책임을 묻는다.
남측 대표는 북한이 지난 1968년 1월 북한에서 31명의 암살단을 조직, 남파해 청와대를 기습해 대통령을 암살하려다 실패했고, 1970년 6월에도 국립묘지 현충문에 폭약을 설치했다면서 "북한 맹동분자들의 이 극악무도한 반민족적, 반인도주의적 행위를 민족과 인도주의의 이름으로 규탄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에 북측 대표는 "회담에 나왔어요?", "회담을 하자는 게 아니구만"이라며 노골적으로 불편함을 표했다.
우리 측 대표가 남북 적십자회담이 교착상태에 빠져 정상화되지 못하는 근본 원인이 이 같은 북한의 행동에 있다고 따져묻자 북측 대표는 재차 "이게 정치회담이요, 적십자회담이요?"이라며 탁자를 치는 등 격한 감정을 드러냈다.
북측 대표는 이어 "이것은 회담을 하자는 것이 아니라 회담 첫 벽두부터 이 회담을 파탄시키자는 고의적 행동", "그런 발언은 당장 취소해야 한다"라고 우리 측을 공격했다. 또 "이 사건들은 남측 '파쇼' 분자들이, 매국노들이 일으킨 고의적인 무장도발로서 우리의 인도주의 회담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군사정치적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반박했다.
3차 적십자 실무회의는 이같은 남북의 거친 설전 외에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났다. 그런데 회담록 말미에 남북 대표는 방금 전까지 격양된 대화를 나눴던 것과는 사뭇 다른 태도로 다음 회담 날짜를 정하기 위해 일정을 논의한다.
남측이 먼저 "다음 4차 회의는 9월25일에 하자"라고 제의하자 북측은 "오늘 귀측은 이 회담장에서 적십자인으로서 도저히 할 수 없는 망언을 늘어놓았는데 앞으로 다시는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할 것"이라며 엄중한 태도를 취하면서도 "귀측에서 9월25일에 다음 회담을 하자고 하였는데 거기에 동의한다"라고 답한다.
이후 연천에서 북한의 남침용 땅굴이 발견되고 1975년 제2땅굴, 1978년 제3땅굴이 발견된다. 이 일련의 땅굴 사건은 북한에 대한 여론을 크게 악화시키고 정치적으로도 남북 간에 큰 긴장을 유발한 사건이었다. 이러한 와중에도 남북은 1974년 11월29일 6차 적십자 실무회의, 이듬해 3월26일 9차 적십자 실무회의, 같은 해 7월21일 11차 적십자 실무회의를 정상적으로 진행한다.
회담의 분위기는 역시 좋지 않았다. 9차 실무회의 내용을 살펴보면 남측 대표는 먼저 "대한민국에 대한 귀측의 무력도발과 폭력 및 테러 행위는 더욱 폭악해졌습니다"라면서 다시금 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을 상기한 뒤 "한걸음 더 나아가 (북한은) 휴전선 비무장지대 남방으로 지하 땅굴을 뚫었다"라고 지적한다.
이에 북측 대표는 "거, 좋은 기술이외다. 어째 청와대 밑에 있는 땅굴에 대해서는 말 안하오. 우리가 팠소? 뻔뻔하고만"이라며 비아냥댄다.
남측은 아랑곳 않고 "도대체 북한의 호전분자, 맹동분자들은 이 같은 땅굴들을 무엇에다 쓰려고 파는 것입니까?"라고 묻자 북측은 "닥치시오, 닥치시오. 회담을 하겠으면 그따위 발언은 닥치시오"라며 크게 격양된 반응을 보인다.
남측 대표는 더 나아가 "지금 땅굴 파자고 하는 것이, 파고 있는 것이 7.4공동성명의 실천인가 또는 우리 남북 적십자회담에서 우리 명제로 되어있는 이산가족의 고통을 덜어주는 것인가 왜 그런겁니까 응, 왜 땅굴들을 파요?"라며 북측을 압박하듯 따져 묻는다.
그러자 북측은 "7.4남북공동성명 위반하고 땅굴 판 것도 당신들이고 모든 무력 도발한 것도 당신들이고 조선의 긴장상태를 긴장시키고 있는 것은 바로 당신들"이라며 맞받아친다.
이처럼 남북은 금방이라도 서로 안볼 것처럼 으르렁댔지만 또 다음 실무회의 날짜를 정한다. 남측 대표가 "이전에 (우리가) 날짜를 말했으니까 오늘은 귀측에서 제안해보라"라고 하자 북측은 5월8일 이라는 날짜를 제시한다.
남측 대표가 4월에 회담 일정을 잡지 않고 5월로 넘기는 것에 대해 의문을 표시하면서도 동의하자 북측은 "귀측이 (땅굴 문제에 대해) 잘 연구를 해가지고 옳은 대답을 하도록 시간을 주기 위해서"라고 '뒤끝'을 보이기도 한다.
이후 남북은 1976년 8월18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북한군 30여 명이 경계에 방해 요인이던 미루나무를 베던 2명의 미군을 살해하는 '도끼만행사건'이 발생한지 불과 이틀 뒤인 8월20일 제 18차 적십자 실무회의를 갖는다.
남측 대표가 이 사건을 언급하자 북측은 "집어 치우시오"라며 책상을 치는 등 곧바로 격양된 반응을 보인다. 북측은 남측 대표가 땅굴사건부터 시작해 정치적 문제를 회담장에서 수시로 언급했다며 크게 반발했다.
남측은 이에 "그 내용은 적십자회담을 하는 이 회담장에서 할 이야기들이 아니다"며 "앞으로 그런 내용의 발언이 없을 것을 요구한다"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다음 회담 날짜를 묻는다. 북측 역시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다음 일정을 제안하면서 회의가 끝난다.
이같은 모습은 남북이 긴장 국면에서 실질적인 대화를 나누지 못하는 현재의 모습과는 다른 이채로운 모습이다. 북한은 윤석열 정부 출범 후 우리 측의 당국 간 대화 제의는 물론 정부의 방역·수해·이산가족 협력 등 각 사안별 제안에 아예 '무응답'으로 일관하고 있다.'
이는 당시 남북의 정세가 긴장 속에서도 대화를 하는 것이 서로에게 더 이익인 상황이었음을 방증한다는 평가다. 특히 분단 후 남북의 체제 대결이 심화됐던 시기인만큼, 대면 대화를 통해 '탐색전'을 펼치며 체제 경쟁을 이어가는 모습을 보였던 것으로 해석된다.
sseol@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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