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황제’ 펠레, 영원히 잠들다

서필웅 2022. 12. 30.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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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축구 역사상 역대 최고 선수로 꼽혀온 ‘축구 황제’ 펠레가 세상을 떠났다. 향년 82세. 현지매체들이 30일(한국시간) “월드컵에서 3차례나 우승하며 세계 최고의 축구 선수로 이름을 날렸던 펠레가 사망했다”고 일제히 보도했다. 펠레가 치료를 받고 있던 브라질 상파울루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병원은 그가 현지시간으로 29일 오후 3시27분 사망했다며 “앓고 있던 질병들과 대장암의 진행으로 인한 다발성 장기부전이 사망 원인”이라고 밝혔다.
펠레가 지난 2016년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열린 자신의 다큐멘터리 영화 ‘펠레’의 공개 행사에서 팬들의 환호에 화답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지난해 9월 오른쪽 결장에 암 종양이 발견돼 제거 수술을 받은 펠레는 이후 화학치료를 받으며 병원을 오갔고, 지난달 심부전증과 전신 부종, 정신 착란 증상 등으로 재입원했다. 여기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에 따른 호흡기 증상 치료까지 받으며 힘든 투병을 이어갔다. 그러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병원 의료진이 지난 21일 성명을 내고 “펠레의 암이 더 진행된 것으로 파악된다. 심장, 신장 기능 장애와 관련해 더 많은 치료가 필요하다”고 밝혀 그의 병이 더욱 위중해졌음이 드러났다. 이후 전 세계 축구팬들이 쾌유를 빌었지만 끝내 하늘의 별이 됐다.

축구팬이라면 누구라도 슬퍼할만한 소식이다. 축구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펠레’는 너무나 특별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1940년 10월 23일 축구왕국 브라질의 소도시인 미나스제라이스주 소도시인 트리스 코라송이스에서 태어난 펠레의 본명은 이드송 아란치스 두 나시멘투. 브라질의 많은 축구스타들처럼 펠레도 어려운 형편에서 축구 선수 출신인 아버지 돈지뉴의 영향으로 일찌감치 축구선수의 꿈을 꾸었고, 어린 나이에 천재성을 드러냈다. 유소년 시절 아마추어 축구클럽에서 재능을 키운 뒤 아버지의 소속팀이었던 바우루AC의 유스팀을 거쳐 1956년 브라질 국가대표 출신 바우데마르 지브리투의 추천으로 명문 산투스FC에서 입단 테스트를 받고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불과 만 15세 때였다. 

프로데뷔 1년 뒤인 1957년 7월 ‘코파 로카’(Copa Roca)라는 이름으로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국가대표팀이 정기적으로 벌이던 친선경기에서 국가대표 데뷔전을 치르기도 했다. 1-2로 패한 이 경기의 득점을 만들어낸 것이 펠레다. 16세259일 만의 A매치 데뷔골로 이는 수많은 축구천재들이 등장한 브라질에서도 아직까지 최연소 A매치 득점 기록이다.

1년이 흐른 뒤에는 17세 나이로 1958년 스웨덴 월드컵 대표로 발탁됐다. 이 월드컵에서 펠레는 세계적 스타가 됐다. 구 소련과 조별리그 3차전에서 월드컵 데뷔전을 치르며 환상적인 드리블과 패스로 전 세계인의 시선을 잡아끈 뒤 매 경기 맹활약 속 브라질이 사상 첫 월드컵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리는 데 일등공신이 된 것. 월드컵 최연소 득점·멀티골·해트트릭·우승 등 불멸의 기록이 이때 펠레에 의해 쓰였다.
펠레(오른쪽 세번째)가 17세때인 지난 1958년 스웨덴 월드컵 결승전에서 승리한 뒤 팀 동료에게 안겨 기뻐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이후 펠레는 1970년 멕시코 대회까지 월드컵 본선에 네 차례 연속 출전해 총 14경기를 치르는 동안 12골을 넣었다. 이 네 번 대회에서 브라질은 세 번 정상에 올랐다. 1962년 칠레 월드컵에서는 펠레가 부상으로 두 경기밖에 뛰지 못했으나 대회 2연패를 이뤘고, 1970년에는 펠레를 중심으로 현재까지도 역대 최고 팀 중 하나로 꼽히는 라인업을 꾸려 다시 정상에 올랐다. 월드컵에서 세 차례나 우승을 경험한 선수는 펠레뿐. 1966년 잉글랜드 대회에서 상대 팀 선수들의 살인적인 태클로 펠레가 다치지만 않았더라도 브라질이 4회 연속 월드컵 우승을 차지했을 것이라는 평가도 많다. 펠레의 부상을 계기로 1970년 월드컵에서 레드·옐로카드 및 선수 교체 제도가 정식 도입되기도 했다. 펠레는 1971년 7월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열린 유고슬라비아와 친선경기를 끝으로 대표팀에서 은퇴했다. A매치 통산 92경기 77골로 이는 브라질 국가대표 통산 최다 골 기록으로 오랫동안 남았다 지난 10일 열린 2022 카타르 월드컵 8강전에서 네이마르가 77번째 골을 넣으며 동률이 됐다.

펠레는 클럽축구에서는 1974년까지 줄곧 산투스에서 뛰었다. 공식전 660경기에서 만든 골이 경기당 1골에 가까운 643골에 달한다. 단일 클럽 최다골 기록으로 역시 오랫동안 축구 역사에 남았다 리오넬 메시(파리 생제르맹)가 바르셀로나(스페인) 소속이던 2020년 12월 경신됐다. 

다만, 펠레의 선수 시절 득점 기록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 펠레와 그의 소속팀이었던 산투스는 펠레의 통산 득점을 세계 기록인 1283골(1364경기)이라고 주장하기 때문. 하지만, 친선경기와 투어 경기 득점이 상당수 포함된 데다 오래된 기록들의 정확성까지 떨어져 산투스, 뉴욕 코스모스, 브라질 대표팀에서 뛸 때 작성된 총 757골이 국제스포츠통계재단(RSSSF)이 인정하는 펠레의 공식전 총득점이다.

브라질 1부리그에서 6회 우승과 득점왕 3회, 파울루주 리그에서 10회 우승 및 득점왕 11회 등 브라질리그를 휘젓던 그는 1975년 미국 내 축구붐 조성을 위해 북미사커리그(NASL) 소속 뉴욕 코스모스에 입단해 세 시즌을 뛴 뒤 그라운드를 떠났다.

은퇴 후에는 축구해설가, 친선대사 등으로 왕성한 활동을 계속해 왔다. 브라질 체육부 장관으로 임명돼 최초의 흑인 장관으로 1995년부터 3년간 활동했다. 장관 재직 시 자유계약선수제 확대, 심판이익단체 결성 허용, 축구협회 승인이 필요하지 않은 새로운 프로리그 창설 등의 내용이 담긴 브라질축구 개혁법안, 이른바 ‘펠레법’을 마련해 브라질 축구 개혁을 주도하기도 했다.

서필웅 기자 seoseo@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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