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세대는 왜 입을 닫나…상처 주고받지 않으려는 다짐

한겨레 2022. 12. 30.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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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엄기호의 이야기 사회학
연극 <트라이브스> 연출가 최지혜와 나눈 대화
충성서약이 아니면 공개처형하는 ‘부족’ 같은 사회에서 말하기의 어려움
<트라이브스>는 장애와 가족, 언어의 문제를 소재로 가져와 언어와 공동체를 들여다본다. 청강문화산업대학 제공 

고등학교 교실에서 있었던 일이다. 한 학생의 아버지가 불의의 사고로 돌아가셨다. 학생은 결석했고 그 결석에 대해 담임선생이 “○○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러니 며칠 학교에 나오지 못할 것이다. ○○가 학교로 돌아오면 다들 따뜻하게 맞이해주도록 해라”라고 종례 시간에 급우(級‘友’)들에게 알렸다. 급‘우’라는 말처럼, 친구 사이를 가정하는 학‘급’에서 ‘담임’으로서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공지였다.

그러나 이 공지는 곧 작은 소란을 일으켰다. 몇몇 학생이 불만을 표출했다. 담임이 그 학생에게 물어보지 않고 학생 신상을 다른 학생들에게 알린 것은 사생활 침해이자 개인정보 유출이라는 비판이었다. 한편에선 ‘권리의식’의 강박적인 표출이라 볼 수도 있었지만 그 불만을 학생들이 제기한 이유는 권리의식 때문만은 아니었다. 우려의 핵심에는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것을 가지고 언제 어떻게 다른 학생들이 당사자를 모욕할지 모른다”는 공포가 있었다.

학생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것은 ‘말’

작품을 준비하는 학생들과 면담하면서 이 이야기를 다시 떠올렸다. 언제 어디서 내가 공격받을지 모른다는 공포가 디폴트(기본값)로 대다수 학생에게 있었다. 특히 학생들은 자신이 가장 믿었던 공간에서 가혹한 ‘배신’을 한두 번 경험하면서 큰 상처를 가지고 있었다. 함부로 쉽게 믿어서는 안 되는 것을 넘어 끝까지 감춰야 하는 게 있고 그것만이 자기를 보호할 수 있다고 학생들은 말했다. 관계의 바닥을 지배하는 건 상처와 불신이었다.

“우선적으로 내 상태를 아무도 몰랐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무기력하고 우울하다는 것을 누군가 알았을 때 그들이 나를 뭐라고 생각할까. 당장은 위로해주고 괜찮다고 하겠지요.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그럴 수 있을까요. 아마 이 정도도 버텨내지 못하는 사람이라 생각할 것이고 그러면 저는 버려질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더욱 우울해지는데 이젠 그 우울함을 감춰야 한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역시 내 상태를 아무도 몰라야 하니까요. 그렇게 감추고 감추다보니 나중에는 내가 우울한지 아닌지를 넘어 우울함이 뭔지 모르는 상태가 됐습니다.”

길게 인용한 이 말은 최근 대학로에서 <트라이브스>(Tribes·부족들)라는 연극을 연출한 최지혜(그는 청강대에서 나와 함께 공부한 학생이기도 하다)가 들려준 이야기다. 언어와 공동체를 연출 방향으로 잡은 이유를 물었을 때 오직 개인만이 존재의 양식인 것처럼 여긴다는 엠제트(MZ)세대의 입에서 나온 뜻밖의 문제의식이었다. 이는 단지 그만의 문제의식이 아니라 전반적인 현상이었다. 교실에서 만나는 학생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것은 ‘말’이다.

연극 <트라이브스>의 최지혜 연출가. 한겨레 이정용 선임기자

사실 이것 때문에 많은 학생이 발표수업에 극도의 공포감을 갖고 있었다. 몇몇 언론이 이미 다뤘지만 전화받는 것에 대한 공포 역시 마찬가지였다. 말을 듣고 바로 거기에 응답해야 하는 것에 엄청난 부담을 갖고 있었다. 말은 순발력과 유연함을 요구하는데 그렇지 못할 경우 자칫 자기의 취약점이 드러날 수 있다는 것과 다른 사람의 시간을 뺏을 수 있다는 것에 힘들어하는 학생이 많았다. 학점에 불이익이 있더라도 발표하고 싶지 않다는 학생이 절반을 넘었다.

상처를 덜 주고 덜 받는 것, 이것을 김홍중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무해에 대한 의지가 일상을 지배한다는 의미에서 ‘무해의 시대’라고 불렀다. 남에게 무해한 존재가 되겠다는 것은 반대로 남에게 상처받고 싶지 않다는 의지이기도 하다. 이 경향을 완전히 가속한 것이 코로나19 대유행이다. 과거에는 아파도 학교에 오는 게 미덕이었다면 지금은 아프면 절대 학교에 오지 않는 게 미덕이다.

아파도 학교에 가던 시대, 아프면 학교에 가지 않는 시대

이 미덕과 상처의 핵심에 언어가 있다. 어떤 언어로 어떻게 말할 때 서로에게 상처를 덜 주며 관계를 형성하고 지속할 수 있는가. 학생들은 언어의 본질이 무엇이고 이 시대의 언어생활이 어떠하기에 우리는 말하면서 오히려 깊게 서로를 베고 상처를 주는지 알고 싶어 했다. 만일 입 다물고 사는 것만이 유일한 길이라면 기꺼이 그러겠다는 학생도 많았다. 그만큼 말한다는 것, 말해야만 한다는 것에 지쳐 있었다.

언어는 수치스러운 것이다. 전하려는 느낌을 훼손하지 않고 의미를 전달할 수 있는 언어는 없다. 말이란 전달하고 싶은 걸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전달하려는 것이 훼손됨을 알고 감행하는 것이다. ‘사랑한다’는 말이 어디 그 말을 통해 그대를 향한 내 진심을 전달하던가? 오히려 그 말을 하면서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걸 이 말이 다 전달하지 못한다는 그 안타까움이 전달될 때 저 사람이 나를 정말 사랑함을 알게 되지 않던가. 훼손과 결여 없이 존재할 수 없다는 점에서 언어는 수치스러운 것이다.

나아가 언어는 존재를 훼손하고 파괴한다. 언어는 폭력이다. 보수 개신교를 중심으로 기를 쓰고 ‘성평등’ 대신 ‘양성평등’이란 말을 사용하려는 이유를 생각해보자. 양성평등은 존재하는 사물을 남자와 여자, 그것도 ‘남자’라는 말에 이미 담긴 형상으로서 ‘비장애인 성인 이성애자 남자’와 반대로서의 여자, 딱 둘만 남기고 나머지 다른 존재는 노골적으로 지우고 치워버리는 말이다. 이런 언어는 모든 것이 존재하는 그대로 아름답고 장엄하다는 ‘화엄’의 세계를 베고 파괴한다.

언어의 수치를 대하는 몇 가지 방법이 있다. 가장 좋은 건 말이 수치스러운 것임을 알고 사용하는 것이다. 이 경우 말할 때 불가피하게 내가 해할 수 있음을 의식하며 신중해진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남의 언어만이 아니라 내 언어가 ‘부러진 언어’(Broken Language)임을 인식하는 것이다. 콩글리시 같은 영어의 문법체계와 어휘 세계에서 벗어난 ‘엉터리’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언어가 부러진 언어로서 취약할 수밖에 없음을 인식한다.

이렇게 되면 ‘부러져 있다’(Broken)는 것은 감춰야 할 수치가 아니라 드러내고 서로 도움과 의존을 청해야 하는 존재의 근본적 상태가 된다. 모든 존재가 부러져 있다는 것, 나아가 부러진 채 (또 서로 연민하기에) 아름답고 장엄하다는 것을 인식할 때 서로를 존엄한 존재로서 지지할 수 있다. 이 칼럼에서 몇 차례 강조한 연민(Compassion)은 불쌍함이 아니라 서로의 장엄과 존엄에 대한 지지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런 길을 택하는 사람은 드물다. 대신 언어의 수치와 폭력을 감추려 한다. 한편에선 언어의 이 취약함에 실망한 나머지 언어를 포기하고 언어 너머의 소통으로 강력하게 결속하려 한다. 언어에 대한 전면적 불신에서 밀교적 공동체가 만들어진다. 이들은 취약함을 존재의 근본으로, 장엄함으로 보지 않고 그것을 부정한다. 대신 이들은 진리는 말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며 알아들을 수 없는 주문을 반복해 그 주문을 공유한 폐쇄된 공동체를 만든다.

상대의 말을 먹어치우는 ‘부족주의적 공동체’

다른 한편에선 언어의 수치와 폭력에 뻔뻔해지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자기 말을 확신한다. 자기 말이야말로 확실하고 진실이고 진리라고 확신한다. 이들은 ‘~이 맞는다’는 말을 즐겨 쓴다. 이들에게 자기 말을 제외한 다른 말은 모두 부러진 말이다. 그렇기에 이들은 다른 이의 말은 들을 필요가 없다. 이들에게 말은 일방적인 것이다. 자기 말은 확실해서 ‘맞고’ 다른 존재의 말은 훼손돼서 ‘틀린’ 것이기에 말은 자기 쪽에서 선포되고 상대가 복종하고 따라야 하는 것이 된다. 이들에게 말이란 소통이나 토론이 아니라 명령이다. 이들은 상대의 말을 먹어치운다.

말에 대한 태도는 극단적으로 다르지만 이 둘이 도착하는 공통 지점은 부족주의적 공동체다. 부족은 불완전한 존재인 인간에게 불가능한 것의 확신으로 구성원을 유혹한다.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이 저서 <레트로토피아>에서 말한 것처럼 “현재와 미래에서 오랫동안 잃어버린 더없이 행복한 전능함의 가능성을 약속”하는 것이 부족이기 때문이다. 지금 ‘정치적 효능감’이라 부르는 것이 아마 이 ‘행복한 전능함’의 정치적 버전일 것이다. 다만 차이는 그 효능감/전능감을 주는 것이 말이냐 주문이냐일 뿐이다. 사실 이 경우에는 말이 주문이고 주문이 말이지만 말이다.

이런 부족주의적 말/주문이 지배하는 세상이다. 국가와 정치만 그런 것이 아니다. 도처의 공간이 자기 말/주문을 확신하는 뻔뻔한 자들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말을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은 부정한 자로, 충성심이 부족한 자로 치부돼 밀려난다. 당연히 공동체 내부에 위계가 생긴다. 그 자체로 장엄한 서로의 취약함을 지지하는 화엄의 세계가 아니라 털끝 같은 차이를 훼손 정도로 측정해 위계화한다.

더구나 언어의 불확실성을 어려워하는 존재일수록 공동체/조직의 단결과 유대를 해치고 오염시키는 존재로 치부돼 위험시된다. 이런 위험한 존재는 본보기로 구성원 앞에서 공개처형돼야 한다. 곳곳에서 분서갱유와 인민재판이 횡행하는 이유다. 부족주의 정치에선 무엇보다 본보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왜 지금 말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 됐는지 그 이유가 드러난다. 충성서약이 아닌 한, 말하면 본보기가 되기 때문이다. 입을 다무는 게 가장 안전하다.

최지혜 연출가 “공동체는 잘 소통할 것을 강요하는 곳”

이렇게 입을 다문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트라이브스>의 최지혜 연출가는 이 점을 놀랄 정도로 분명하게 간파했다. 부족은 입을 다문 자를 또 위험시하기 때문이다. 부족은 끊임없이 소통을 요구하며 소통 능력으로 또 위계를 만든다. 그는 “공동체는 잘 소통할 것을 강요하는 곳”이라며 그것도 “극도로 예민한 상태”에서 강요하며 이것이 “사회가 젊은 세대에게 요구하는 많은 일 중 하나”라고 간파했다. 그러면 또 “젊은 세대는 ‘잘’ 수행하기 위해 상대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법을 익히거나, 자신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법”을 익혀갈 수밖에 없는데 그 결과는 참으로 비참하다. 두 종류의 사람이 나온다. “무례할 정도로 친절하거나, 아니면 아예 무례하거나.”

결국 우리가 열망한 것은 무해이지만 무해는 우리의 선택이 되지 못한다. 단지 ‘무례한 친절’과 ‘아예 무례’ 사이의 선택만이 있을 뿐이다. 이 무례의 지옥에서 벗어나려면 저 뻔뻔한 자들에 맞서 언어는 수치스럽고 존재는 취약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인간 존엄의 근거이자 그 자체로 장엄한 것인 이 취약함을 향해 용기를 내야 한다. 이 용기를 낼 수 있을 때 취약한 자들이 부러진 언어로 서로에게 배움과 가르침을 의지하며 이야기‘꽃’이 피어나는 ‘화엄’의 세계를 볼 수 있다. 이 말의 지옥이 아니라!

엄기호 사회학자·청강문화산업대학 교수

*엄기호의 이야기 사회학: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생겨나는 시대와 사회에 대한 고민을 같이 나눕니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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