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석·유동근 2인2색…그래, 연극은 배우의 예술이지

임석규 2022. 12. 30.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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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화가 로스코의 고뇌 담은 ‘레드’
연극 <레드>에서 화가 마크 로스코 역을 번갈아 맡는 배우 유동근(오른쪽)과 정보석. 빨강 물감이 칠해진 무대 그림이 눈길을 끈다. 신시컴퍼니 제공

배우 유동근에겐 ‘첫아이’였는데, 정보석에겐 ‘짝사랑’이었다. 연극 <레드>는 두 ‘명품 배우’에게 각기 다른 이유로 각별했다. 두 사람이 화가 마크 로스코 역을 번갈아 맡는 이 연극에서 간접적으로 펼치는 ‘2인2색’ 연기 대결이 치열하다. 지난 28일 서울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두 배우가 일부 장면을 기자들 앞에서 각각 시연했다.

이 작품은 유동근이 30여년 만에 오르는 연극 복귀 무대. 민중극단 출신인 그는 그동안 드라마와 영화에 주력했다. “어쩌면 제겐 첫아이의 탄생과도 같아요. 굉장히 의미 있는 작품입니다.” 워낙 오랜만에 오르는 무대라 연습도 다른 출연자들보다 3주 먼저 시작했다. 그는 “아직도 얼떨떨하다”고 했다. 출연 계기는 다름 아닌 정보석의 공연이었다. "2019년 정보석씨가 공연한 <레드>를 봤는데, 로스코란 인물의 매력에 흠뻑 취했어요. 대본을 구해 읽었는데 강한 동기부여가 되더군요.”

30여년 만에 연극 무대로 돌아온 배우 유동근은 연극 <레드>를 ‘첫아이’와도 같다고 했다. 신시컴퍼니 제공

정보석에겐 2015년, 2019년에 이어 이 배역만 세번째. 그런데도 그게 그렇게 어렵다고 했다. “내겐 짝사랑 같은 작품이에요. 매번 하겠다고 한 순간부터 후회를 해요. 못 이룬 사랑이 아쉬워서 다음에 다시 하는데 또 후회하게 되는 거죠.” 무엇이 그리도 어려웠을까. “도대체 마크 로스코, 이 사람의 예술적 고민을 따라갈 수가 없었어요. 첫 공연 땐 너무 괴로워 교통사고라도 나길 기도하는 심경이었다니까요.” 그래도 “배우로서 내가 얼마나 많이 부족한가를 일깨워주고 자극하는 작품”이라고 애착을 드러냈다.

연극은 미국 추상표현주의 화가 마크 로스코(1903~1970)와 가상의 인물인 조수 켄의 대화로 풀어낸 ‘2인극’이다. 거액을 받고 뉴욕 최고급 레스토랑에 걸 벽화 연작 40여점을 그리는 과정의 고뇌를 다룬다. 100분에 걸친 두 사람의 논쟁은 예술의 본질을 묻고, 소통의 부재와 세대의 대립을 그려낸다. “너 정말 앤디 워홀이 100년 뒤 미술관에 걸릴 거라고 생각해?” 피카소의 입체파를 몰아낸 로스코는 곧 앤디 워홀의 팝아트로 퇴출 위기에 봉착한다. ‘장강의 뒤 물이 앞 물을 밀어내는’ 거다. 김태훈 연출은 “로스코는 그림 안에 비극을 담아내려고 평생을 바쳤던 화가”라며 ”이 연극은 비극과 아이러니, 영원한 순환의 이어짐을 말하는 작품”이라고 했다. 미국 극작가 존 로건 원작의 연극은 2010년 미국 최고 권위의 토니상에서 작품상 등 6개 부문을 휩쓸었다. 국내에서도 2011년 초연 이후 다섯번의 시즌에서 평균 95%의 관객 점유율을 기록하며 인기를 얻었다.

연극 <레드>에서 세번째로 화가 마크 로스코 역을 맡는 정보석은 ‘할 때마다 후회하는 어려운 작품’이라고 했다. 신시컴퍼니 제공
연극 <레드>에서 화가 마크 로스코와 조수가 거대한 하얀 캔버스에 선연한 빨강 물감을 색칠하는 장면. 신시컴퍼니 제공

무대는 로스코의 작업실. 빨강과 검정 두가지 색깔로 채워진 거대한 캔버스가 전면에 놓여 있다. 물감과 양동이, 붓들이 널브러진 공간은 의도적으로 자연광을 차단한 로스코의 실제 작업실처럼 어둡고 컴컴하다. 로스코와 조수 켄(강승호·연준석)이 물감을 튀기며 하얀 캔버스를 선연한 빨강으로 색칠해가는 장면이 압권이다. 로스코가 엘피(LP)판을 바꿀 때마다 흐르는 바흐와 모차르트, 슈베르트의 수백년 묵은 음악은 100년 뒤에도 미술관에 걸릴 ‘불멸의 그림’을 상징하는 듯하다.

연기력이라면 앞자리를 양보하기 어려운 두 배우의 은근한 경쟁도 관전 포인트. 그런데 두 배우 모두 서로를 칭찬하기에 바빴다. “오늘 형님 하시는 걸 처음 봤는데 묘하게 집중하면서 빠져들어가게 되더라고요. ‘역시 대단하시구나, 그사이에 이런 로스코를 만들어내셨구나.’ 명불허전이라고 감탄하면서 봤어요.”(정보석) “배우마다 각자의 캐릭터가 있는 거죠. 인물 표현 방식에 온도 차이도 있겠고요. 정보석씨가 하는 로스코는 참 멋스럽고 부럽기도 해요.”(유동근) 온전히 각자의 연기에 집중하기 위해 그동안 연습을 겹치지 않게 진행했다고 한다.

연극 <레드>는 화가 마크 로스코의 비극과 아이러니를 그린 작품이다. 신시컴퍼니 제공

두 배우의 다른 색깔 연기는 연극을 왜 ‘배우의 예술’이라고 하는지 실감하게 한다. 같은 인물을 연기하는데도 빚어내는 캐릭터가 확연히 다르다. 유동근의 로스코에게선 거칠고 야성적이지만 인간적 면모가 두드러진다. “삶의 희로애락이 큰데 너무 비극에 치우치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거든요.”(유동근) 정보석이 연기하는 로스코는 치밀하면서 날카롭다. “치열하고 빈틈없는 로스코로 접근합니다. 조금의 허점도 용납하지 않는, 자신의 삶에 철저한 예술가 말이죠.”(정보석)

여섯번째 시즌을 맞은 연극 <레드>는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내년 2월19일까지 공연한다.

임석규 기자 sk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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