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레와 한국 축구의 깊은 인연...50년전 서울서 차범근과 맞대결
선수로서 최전성기를 달린 1972년 방한해 친선경기를 치르면서 국내 '펠레 열풍'을 이끌었다.
펠레는 브라질 프로축구 명문 산투스FC의 일원으로 한국을 찾아 우리나라 대표팀과 일전을 펼쳐 3-2로 승리를 따냈다.
지금은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가 들어선 서울 중구 서울운동장에서 펠레는 후반 13분 오른발 슈팅으로 팀의 두 번째 골을 뽑아냈다.
이에 맞선 한국은 차범근 전 대표팀 감독과 이회택 전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의 연속골로 후반 두 골을 따라붙어 1970년대 축구팬들에게 잊지 못할 추억을 선사했다.
펠레는 선수 생활을 마친 이후에도 한국을 찾았다.
1998년 펠레는 방한해 신라호텔에서 열린 기자회견을 통해 개막을 앞둔 프랑스 월드컵에서 한국의 선전과 행운을 기원해줬다.
펠레는 "한국 대표팀은 훌륭하다. 선수들이 자신감을 갖는다면 프랑스월드컵 16강 진출의 꿈을 이룰 수 있다"고 격려했다.
이어 26년 전 맞붙었던 이세연 전 축구협회 이사, 김호곤 전 수원FC 단장 등과 재회한 펠레는 "당시 3-2로 이겼지만 무척 어려운 경기였다"고 돌아보기도 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본선 조 추첨이 열린 2001년에도 펠레는 대회 후원사의 홍보대사로 내한, "한국과 일본이 홈 관중의 응원을 등에 업고 강팀을 맞아 선전할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실제로 이런 격려 섞인 예상처럼 아시아 국가 중 가장 높은 단계인 4강까지 올라섰고, 일본도 16강에 진출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순간에는 '펠레의 저주'가 발동했다.
2002 한일 월드컵에서 4강전을 앞둔 한국 대표팀에 "결승에 오를 수 있다"고 했지만, 한국은 독일에 석패했다.
꼭 예상하면 빗나가는 징크스는 2002년에도 어김없었다.
당시 펠레는 히딩크호의 전방을 책임졌던 황선홍 올림픽 대표팀 감독을 두고 월드컵 이후 몸값이 크게 오를 것이라 기대 섞인 전망을 내놨다.
그러나 2002 대회는 황 감독에게는 사실상 '마지막 무대'가 됐다.
대회 중 입은 부상이 소속팀에서 경력에도 영향을 미쳤고, 이듬해인 2003년 초 현역 은퇴를 선언하고 지도자의 길에 입문했다.
2003년 통일교의 창시자 문선명 전 총재가 개최한 국제 클럽 축구대회인 피스컵 출범 당시 고문으로 위촉돼, 대회 참관차 또 한 번 방한하기도 했다.
2009 피스컵 당시에도 국제자문위원으로 위촉된 펠레는 2012년 문 전 총재가 별세하자 조전을 보냈다.
"한국에서 평화 캠페인을 할 때 레버런 문(문 총재)을 깊이 알게 됐다"는 펠레는 "그분의 관점에서 축구는 세계에서 가장 큰 가족의 단위"라며 "그분은 제게 세계평화를 이루는 데 있어 큰 책임이 제 손에 있다고 말했다"고 전했었다.
이같이 '훈훈한 기억'만 있는 듯했던 펠레의 존재는 2022 카타르 월드컵에서는 한국 축구에 어려움을 주는 요소가 됐다.
16강 상대인 한국과 맞대결을 앞두고 조국을 응원하던 펠레는 대장암 증상과 더불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따른 호흡기 질환이 겹쳐 병세가 더 나빠졌다.
마침 대장암 말기라는 소식이 퍼진 가운데 펠레는 병상에서 소셜미디어를 통해 "대표팀을 지켜봐 달라"고 직접 목소리를 냈다.
이는 브라질 선수들에게는 자국 영웅에 '마지막' 우승을 선물하겠다는 결의를 다지는 동기부여의 계기가 됐다.
경기 전 브라질 대표팀의 공격수 비니시우스 주니오르(레알 마드리드)는 소셜 미디어에 펠레의 쾌차를 비는 관중들의 사진을 올리며 "힘내세요 왕"이라고 썼다.
호드리구(레알 마드리드)도 소셜 미디어에 "당신의 회복을 응원하고 기도합니다"라고 적었다.
펠레를 걱정하며 절박해진 브라질 대표팀은 16강 상대인 한국을 4-1로 물리치며 8강에 진출했다.
하지만 벤투호를 꺾은 브라질은 8강전에서 크로아티아에 승부차기 끝에 고배를 마시며, 임종을 앞둔 펠레의 '마지막 소원'을 결국 이뤄주지 못했다. [연합뉴스=종합]
[김학수 마니아타임즈 편집국장 kimbundang@maniarepo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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