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황제' 펠레, 영원한 별이 되다…82세 일기로 별세

2022. 12. 30. 0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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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 3회 우승…브라질 산투스, 미국 뉴욕 등서 활약
은퇴 후 체육부장관, 친선대사 등으로 다양한 영향력
축구황제 펠레가 82세를 일기로 서거했다./AFP

[헤럴드경제=김성진 기자] 축구황제이자 축구와 동의어처럼 불리던 '레전드' 펠레가 눈을 감았다.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였던 펠레(브라질)가 암투병 끝에 82세를 일기로 화려했던 생을 마감했다.

전 세계 외신들도 30일(한국시간) "월드컵에서 3차례나 우승하며 세계 최고의 축구 선수로 불렸던 펠레가 사망했다"라며 이 소식을 급히 전했다. 펠레의 딸 켈리 나시멘투도 이날 인스타그램을 통해 "당신에게 감사드려요. 영원히 사랑합니다. 편안하게 쉬세요"라는 글과 함께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알렸다.

펠레는 지난해 9월 오른쪽 결장에 암 종양이 발견돼 제거 수술을 받았고 이후 통원하며 화학치료를 받았으나 지난달 심부전증과 전신 부종 등으로 재입원했다. 여기에 흡기 증상 치료까지 받으며 힘든 투병을 이어갔다. 병마를 이겨내기 바라는 가족들의 간절한 바람에도 펠레는 결국 눈을 감았다.

펠레의 선수생활은 누구도 흉내낼 수 없을 만큼 화러했다. 현역 생활 동안 모두 1363경기에 출전해 공식대회와 친선경기 등을 포함해 1281골을 터트리며 '축구황제'로 불렸다. 브라질대표로 A매치 91경기에 나서 77골을 기록했고, 월드컵에서 1958, 1962, 1970년 3차례나 우승했으며 14경기에서 12골을 넣었다.

브라질이 3번째 월드컵 우승을 차지한 1970년 멕시코 대회에서 펠레를 목마 태우고 즐거워하는 브라질 선수들./AP

펠레는 1940년 10월 23일 브라질 미나스제라이스주 소도시인 트리스 코라송이스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이드송 아란치스 두 나시멘투다. '펠레'는 애칭이었는데 본인도 그 의미를 모른다고 했다.

펠레는 유소년 시절 아마추어 축구클럽에서 활약하다 바우루AC의 유스팀을 거쳐 1956년 브라질 명문 산투스FC에서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그의 나의 만 15세였다.

펠레는 1957년 7월 '코파 로카'(Copa Roca)라는 이름으로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국가대표팀이 정기적으로 벌이던 친선경기에서 브라질 국가대표 데뷔전을 치렀다. 비록 브라질은 1-2로 졌으나 펠레는 만 16년 259일 만에 골을 넣어 역대 브라질 최연소 A매치 득점기록을 세웠다.

펠레가 세계에 널리 알려진 것은 1958년 스웨덴 월드컵이다. 월드컵 최연소 득점·멀티골·해트트릭·우승 등 불멸의 기록을 세우며 우승까지 이끌었다.

168㎝에 만 17세였던 펠레는 옛 소련과의 조별리그 3차전에서 월드컵 데뷔전을 치르며 환상적인 드리블과 패스로 전 세계인의 시선을 모았다. 웨일스와 8강전에서는 결승골, 프랑스와의 준결승(5-2 승)에서는 해트트릭을 기록했고, 개최국 스웨덴과의 결승(5-2 승)에서도 두 골을 몰아 넣으며 브라질에 사상 첫 월드컵 우승을 안겼다.

브라질 상파울로에 그려진 펠레의 벽화./로이터

이후 펠레에게 유럽 명문 클럽들의 스카우트 제안이 쏟아지자 1961년 브라질 정부는 그를 '국보'로 정해 국외 진출을 막기까지 했다.

브라질은 1962년 칠레 월드컵에서는 펠레가 부상으로 두 경기밖에 뛰지 못했으나 대회 2연패를 이뤘고, 1970년 다시 정상에 올랐다. 월드컵에서 세 차례나 우승을 경험한 선수는 펠레뿐이다.

펠레는 1971년 7월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열린 유고슬라비아와 친선경기를 끝으로 대표팀에서 은퇴했다. 펠레는 1974년까지 줄곧 산투스에서만 뛰면서 공식전 660경기에서 643골을 터트렸다.

이는 단일 클럽 최다 골 기록이었으나 '축구의 신' 리오넬 메시(파리 생제르맹)가 바르셀로나(스페인) 소속이던 2020년 12월 경신했다. 메시는 바르셀로나에서만 공식전 778경기에서 672골을 넣었다.

펠레는 이후 미국의 축구붐 조성에 힘을 보태고자 1975년 북미사커리그(NASL) 소속의 뉴욕 코스모스에 입단해 1977년까지 세 시즌을 더 뛰었다.

펠레의 선수 시절 득점 기록은 브라질의 집계와 국제스포츠통계재단의 기록이 엇갈린다.

펠레와 그의 소속팀이었던 산투스는 펠레의 통산 득점을 세계 기록인 1283골(1364경기)이라고 주장한다. 산투스에서도 1091골을 넣었다고 집계한다. 하지만 친선경기와 투어 경기 득점이 상당수 포함된 데다 오래된 기록들의 정확성이 떨어져 산투스, 뉴욕 코스모스, 브라질 대표팀에서 뛸 때 작성된 총 757골이 국제스포츠통계재단(RSSSF)이 인정하는 펠레의 공식전 총 득점이다.

펠레가 그라운드 안에서만 영향력을 끼친 것은 아니다.

진위에 대한 논란이 있긴 하나 1960년대 후반 소속팀 산투스가 해외 투어 일환으로 내전 중인 나이지리아의 라고스를 방문해 나이지리아 대표팀과 친선경기를 치렀을 때 펠레를 보기 위해 48시간 전쟁을 멈췄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펠레는 은퇴 후에도 축구해설가, 친선대사 등으로 왕성한 활동을 계속해 왔다.

브라질 체육부 장관으로 임명돼 최초의 흑인 장관으로 1995년부터 3년간 재임하기도 했다. 그는 장관 재직 시 자유계약선수제 확대, 심판이익단체 결성 허용, 축구협회 승인이 필요하지 않은 새로운 프로리그 창설 등의 내용이 담긴 브라질축구 개혁법안, 이른바 '펠레법'을 마련해 브라질 축구의 개혁을 주도했다.

펠레는 1999년 국제올림픽위원회(IOC)의 '20세기 최고의 운동선수'로 뽑혔고, 그해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이 선정한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에 축구인으로는 유일하게 포함되기도 했다. 아르헨티나의 축구 영웅 디에고 마라도나 등과 함께 함께 2000년 FIFA가 선정한 '20세기 최고의 선수'에도 뽑히기도 했다.

withyj2@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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