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두뇌가 뛴다]① 프로게이머 꿈꾸던 공학자 “내가 ‘배그’에 AI 친구를 만드는 이유”
IEEE 최다 인용 논문… 머신러닝 분야서 ‘두각’
크래프톤 딥러닝본부장하며 ‘버추얼 프렌드’ 연구개발
한국계 최초로 수학계의 노벨상으로 불린 ‘필즈상’을 받은 허준이 프린스턴대 교수는 1983년생이다. 나이를 따지는 한국 사회에서 1980년대생은 아직 젊은 실무진 축에 속하지만, 과학계에선 위상이 남다르다. 30대 중후반에서 40대 중반까지는 연구자의 역량과 아이디어가 빛나는 시기로 불린다. 한국연구재단에 따르면, 노벨상 과학 부문 수상자들이 자신의 핵심 연구를 처음 시작한 평균 연령이 37.9세로 나타났다. 조선비즈는 한국의 기초 과학과 공학을 이끌 차세대 리더들을 독자들께 소개하는 인터뷰 시리즈를 시작한다. 젊은 과학자들은 한국공학한림원과 한국과학기술한림원의 추천을 받아 선정했다. ‘제2의 허준이’를 넘어서 한국의 첫 노벨상 과학 부문 수상자, 그리고 한국 산업의 미래를 이끌어갈 핵심 인재가 이들에게서 나오기를 기대한다. [편집자주]
인공지능(AI)이 사람만큼 게임을 잘 하는 건 더는 새로운 뉴스도 아니다. 구글의 알파고를 업그레이드한 ‘알파스타’는 단 14일 동안 100년치 스타크래프트 게임 방법을 학습했고, 2019년에 인간 프로게이머와 ‘스타크래프트2′로 대결을 펼쳤다. 결과는 알파스타의 10대 1 승리. 메타가 만든 AI 키케로는 외교 전략 게임 ‘디플로머시’에서 세계 상위 10%에 들었고, 구글 딥마인드 AI 딥내시도 전략 보드 게임인 ‘스트래티고’에서 세계 랭킹 3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AI가 아무리 게임을 잘 해도 여전히 사람들과 어울릴 순 없다. 친구들과 함께 게임을 하면서 작전을 논의하고 전략을 짜는 ‘협동’의 쾌감을 AI는 주지 못 한다. AI의 게임 실력은 그저 뉴스 속 화젯거리일 뿐이다.
그런데 이런 인식을 바꿔버릴 만한 연구를 하는 사람이 있다. 사람만큼 게임을 잘 하는 AI가 실제 사람처럼 게임 속에서 함께 작전도 짜고 농담도 주고 받을 수 있다면? 조금은 말이 안 되는 것 같은 이 생각을 현실로 바꾸고 있는 사람이 바로 1988년생 공학자 이강욱 메디슨 위스콘신대(UW메디슨) 교수다. 이 교수는 배틀로얄 장르 게임인 ‘배틀그라운드’를 만든 크래프톤에서 딥러닝본부장도 함께 맡고 있다.
“기존에는 경험해보지 못했던 그런 게임이 앞으로 나올 겁니다. 배틀그라운드를 보면 친구들과 말하면서 투닥투닥하는 게 재밌는 게임이에요. 앞으로는 친구가 없다고 해서 심심하게 혼자 할 필요 없이 AI와 대화도 나누고 명령도 내리고 농담도 하면서 게임을 할 수 있게 만드는 게 우리의 비전입니다. 게임 속 AI와 실제 친구처럼 유대감도 만들고 일상생활에서 느꼈던 이야기도 나눌 수 있도록 해주는 겁니다.”
몇 년 전만 해도 어림 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했겠지만, 불과 며칠 전에 오픈AI의 AI 챗봇인 챗GPT와 실감 나는 대화를 나눈 참이었다. AI 친구와 배틀그라운드를 한 판 하는 날이 언제쯤 가능할까. 지난 12월 19일 미국에 있는 이 교수와 줌으로 인터뷰를 진행했다.
-어떤 연구를 하고 있나.
“미국 메디슨 위스콘신대(UW메디슨) 전기컴퓨터공학부 교수이자 크래프톤 딥러닝본부장을 맡고 있다. 전공은 기계학습, 머신러닝, 딥러닝이다. 백그라운드로 박사 때 정보이론, 부호이론을 연구했다. 통신에 들어가는 알고리즘을 만드는데 필요한 수학적 이론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박사를 그걸로 시작했다가 이걸 기계학습에 적용할 수 없을까 싶어서 고민을 했고, 이후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박사후연구원을 하면서 기계학습 연구를 쭉 해왔다. 2019년부터 UW메디슨 교수를 맡고 있고, 2022년에는 크래프톤에서 딥러닝본부장을 겸직하고 있다.”
이 교수가 처음 학계의 주목을 받은 건 수천개의 컴퓨터에서 이뤄지는 머신러닝 분산 학습의 오류를 없애는 정보이론 논문 덕분이다. 당시 분산 머신러닝에서는 연산 컴퓨터의 오류를 없애는 것이 최대 과제였다. 이 교수가 2015년에 학회에 발표한 논문은 바로 학계의 관심을 사로잡았고, 이 논문은 2016~2020년 국제전기전자공학자협회(IEEE) 정보이론 분야에서 가장 많이 인용됐다.
-분산 학습 논문은 어떻게 쓰게 됐는지 궁금하다.
“아이디어와 영감을 위해 생뚱맞은 수업을 많이 들었다.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UC버클리) 전산학과에서 데이터센터에 들어가는 최신 이론과 시스템을 배우는 수업이 있었다. 그때는 기계학습이 한창 크기 시작할 때였고, 기계학습을 큰 스케일로 하는 연구가 많았다. 이때 이슈가 됐던 게 오류를 잡는 거였다. 예컨대 한 번에 연산하는 기계의 대수가 10개, 100개 수준에서는 오류가 없었는데 1000개까지 커지면 꼭 오류가 발생했다. 구글에서도 이를 해결하는 게 어렵다는 논문을 쓰기도 했다. 이걸 어떻게 해결할까 고민하다가 통신에서 쓰이던 정보이론을 가져와서 기계학습에서의 불확실성을 없애는 방법을 제시했다. 통신은 오류를 기본 가정으로 전제하고 들어간다. 무선 신호는 끊기기 때문에 그런 환경에서도 통신을 잘 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을 수학적 기법으로 풀었는데, 이걸 기계학습에 적용한 것으로 보면 된다.”
-최근에 관심을 가지는 주제는 뭔가.
“3~4년 전부터 공정한 기계 학습을 주제로 연구를 하고 있다. 내가 연구를 시작할 때에는 성능이 부족하고 이론적으로 설명이 되지 않는 알고리즘이 대부분이었다. 이를 해결하려 정보 이론과 최적화 이론을 도입해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알고리즘을 발명했다. 최근에는 ‘공정한 개선가능성(Equal Improvability)’이라는 개념을 통해 기계 학습의 ‘공정’이라는 개념을 새로 정의해야 한다는 화두를 던졌다. 기존의 공정성 개념은 수적인 비율을 맞추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 지금 당장 즉각적인 부분만을 따져서 공정한 지를 보는 것이다. 반면 새로운 개념의 공정성은 미래의 가능성까지 함께 고려하는 게 특징이다.
공대의 입시를 예로 들어보자. 남학생과 여학생의 합격율을 비슷하게 맞추는 걸 공정하다고 보는 게 대표적인 공정성의 정의 중 하나인 인구통계적 형평성이다. 얼핏 생각하면 충분해 보이지만, 이는 앞으로의 개선이나 변화의 가능성을 반영하지 못한 정의이다. 입시는 무한히 반복되기 때문에 한 번 탈락한 사람이 다시 입시에 도전하는 경우도 많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당장의 합격율을 맞추는 것을 넘어서, 현재 탈락한 사람들이 미래에 재도전을 했을 때 합격할 가능성도 고려해야한다는 게 공정한 개선 가능성이 지향하는 공정함이다.”
더 나아가서 이 교수는 최근에는 공정 연합 기계학습(FFL)으로 연구 분야를 넓혔다. FFL 연구로 2022년 재미한인과학기술자협회가 선정한 올해의 젊은 연구자상도 받았다. FFL은 구글이 5~6년 전에 제안을 해서 유명해진 접근법이다. 각자 가지고 있는 데이터를 한 사람에게 몰아줘서 기계학습을 하는 게 아니라 데이터를 가진 모든 사람이 연합해서 기계학습을 하는 방식을 말한다. 공정 연합 학습은 한 발 더 나아가 연합학습을 통해 공정한 기계학습을 하는 것을 뜻한다.
-FFL도 생소한 개념인데, 실생활에 적용될 곳이 있을까.
“대표적인 사례가 의료 시스템이다. 의료 시스템은 민감한 환자 데이터를 직접 공유할 수 없지만, 치료법 개발을 위해선 병원과 연구소 간 데이터 공유가 필수적이다. 이 때문에 전 세계적으로도 연합 학습을 이용해 공공의 모델을 만들려는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다. 다만 의료 AI 의 경우 편향된 결론이 도출되기 쉽고, 환자들이 큰 피해를 볼 수 있기 때문에 공정 연합 학습이 반드시 필요하다. 피부암을 예시로 들면, 환자 비율이 높은 백인에 대해 정확도가 높고 아시아계와 아프리카계에게는 AI 성능이 떨어진다. 공정 학습을 적용해 성능을 개선할 방법을 모색 중이다.”
기계학습 분야에서 이미 세계적인 학자지만, 이 교수의 이름을 국내 검색 포털에서 찾아보면 크래프톤 딥러닝본부장이 더 많이 나온다. 딥러닝 분야의 학자가 어떻게 게임 회사에서 일하게 된 걸까. 게임에 대한 질문을 던지자 이 교수의 표정이 단번에 밝아졌다.
-크래프톤에서 딥러닝본부장을 맡고 있다. 어쩌다 게임 회사와 함께 일하게 된 건가.
“잘 알고 있던 연구원들이 크래프톤에 연구원으로 있기도 했고, 회사에서 관심 있는 교수를 찾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관심 있는 주제이기도 했고, 게임을 워낙 좋아하다 보니 게임회사랑 함께 일하는 로망도 있었다. 초등학생 때 게임을 하면서 ‘내가 만들면 더 잘 만들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게임회사와 딥러닝 기술로 만든 걸 게임에 넣으면 어릴 때 꿈을 간접적으로 이룰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실제 게임 실력도 상당하다고 들었다.
“어렸을 때 스타크래프트1을 계속 했다. 프로게이머가 너무 하고 싶어서 계속 도전했다. 한국에서는 협회가 여는 공인 대회에서 우승을 해야 프로게이머가 될 수 있었는데, 번번이 실패해서 결국 꿈을 접었다. 그러다 대학원을 미국으로 가게 됐는데 때마침 스타크래프트2가 나왔다. 취미 삼아서 해봤는데 한국 서버와 북미 서버의 실력차이가 컸다. 스타크래프트2 북미 서버에서 챌린저 3위까지 갔다. 북미 프로팀 중에 한 곳에 집에서 가까운 곳에 있어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고 입단을 해서 반 년 동안 프로게이머 생활도 했다. 같이 대회 나가고 트위치에서 스트리밍도 해봤다.(웃음)”
-게임에 빠져 있으면 공부하라는 잔소리를 들었을 것 같은데. 도대체 공부는 언제했나.
“어렸을 때부터 컴퓨터를 좋아했다. 처음 프로그래밍을 한 게 유치원 때였다. 컴퓨터를 엄청 좋아했고 게임도 좋아하다 보니 이걸 어떻게 만들지라는 호기심이 컸다. 네이버 지식인에서 검색도 해보고 동네 컴퓨터 학원도 다니면서 궁금한 걸 하나씩 배웠다. 수학이나 과학을 특별히 좋아한 것 같지는 않은데, 그나마 학교에서 배우는 과목 중에는 재미가 있었다. 딱딱 맞아 떨어지는 학문이라는 것도 좋았던 것 같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뭘 하더라도 굶어죽지는 않는다. 중요한 건 내가 하는 일을 좋아하고 즐길 수 있느냐다.”
-크래프톤에서 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궁금하다. 딥러닝 기술을 배틀그라운드에 적용하는 건가.
“배틀그라운드에서 진행 중인 프로젝트 중에 ‘버추얼 프렌드’라는 게 있다. 배틀그라운드는 친구들과 스쿼드를 구성해 ‘투닥투닥’하는 재미로 하는 게임이다. 다만 앞으로는 친구가 아니더라도 AI와 자연스럽게 소통하면서 플레이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게 딥러닝본부의 비전이다. AI와 대화하면서 명령도 내리고 농담까지 할 수 있게 될 거다. 나중에 다시 접속해도 버추얼 프렌드와 일상을 공유할 수도 있다. 게임 안에 친구가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같이 성장할 수 있는 기술을 만들고 있다.”
이 교수가 ‘버추얼 프렌드’를 자신하는 건 그만큼 AI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딥러닝 기술이 세상에 나온 지 10년이 지났는데 지난 10년보다 지난 1년 동안의 기술 발전이 더 컸다”며 “딥러닝을 게임 제작에 적용하면서 이제는 오디오, 그림, 코딩 등 모든 과정을 AI로 할 수 있게 됐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크래프톤 딥러닝본부는 버추얼 휴먼 프로젝트 ‘애나(ANNA)’를 통해 음원을 만들었는데 이 과정에서 사용한 모든 음성을 딥러닝으로만 제작했다. 크래프톤의 문자음성 자동변환(Text to Speech·TTS) 플랫폼 ‘오딕’도 딥러닝본부의 작품이다.
-AI의 게임 실력이 인간을 능가하지 않나. 버추얼 프렌드가 게임을 너무 잘하면 같이 할 맛이 없을 것 같은데.
“AI의 실력은 기계학습을 통해 얼마든지 조절할 수 있다. 다만 지적한 대로 어떻게 해야 게임 속에서 재미있게 풀어낼 지에 대해서는 고민이 많다. 게임을 하는 사람과 실력을 맞추는 방법을 고민 중이다. 처음에는 적당한 수준의 실력을 보여주다가 나중에는 게이머와 함께 성장하는 캐릭터를 구현할 수도 있다.”
이 교수는 자신을 게임을 좋아하던 ‘평범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단지 열심히, 그리고 꾸준히 연구했을 뿐이라며 자신을 되돌아봤다. 존경하는 과학기술계 인사들의 기사를 읽던 자신이 언론과 인터뷰하게 된 것이 부끄럽다는 소감도 밝혔다. 하지만 한국 공학계를 이끌어 갈 미래 세대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각오는 분명했다.
-젊은 나이에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공학도가 됐다. 어떤 비결이 있나.
“우리 때는 과학이나 공대에 대한 이미지가 좋지 않았다. 공대를 간다고 했을 때 경제적으로 힘들 거라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다. 친구들 중에는 부모님의 의견을 듣고 의대로 빠지는 경우도 많았다. 공대 동기들 중에도 금융계로 취업하는 경우도 많았다. 공부를 하다보면 이런저런 유혹이 있고 힘든 일도 있다. 카이스트에서 1000명이 함께 시작하면 15년 뒤에 학계에 남아 있는 건 많지 않다. 하지만 이럴 때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하는 게 중요한 것 같다. 내가 뭘 더 잘했나 이제와서 생각해보면 다른 길을 가지 않고 그저 꾸준히 연구만 한 것 뿐이라고 생각한다. 나 스스로 평범하다는 생각에 그저 열심히 많이 노력했던 게 전부다.”
-과학자나 공학도를 꿈꾸는 학생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을까.
“한국 공학계 선배들에게 개인적인 인연이 없더라도 조언을 많이 구했다. 정말 작은 인연이지만, 대학원에서 연구할 때 많은 도움이 됐다. 지금은 나도 종종 학부생이나 대학원생에게 연락이 온다. 모두 성실하게 답변하니 부끄러워하지 않고 연락했으면 좋겠다.
대학교 때 감명 깊게 들었던 은사님 일화가 생각난다. 아침마다 연구실에 빨리 출근하고 싶어서 양치를 빨리한다는 이야기였다. 결국, 하고 싶은 이야기는 경제·사회적인 것은 예측할 수 없으니 좋아하는 일을 선택하라는 뜻이었다. 과학과 공학은 ‘머리싸움’하는 게 재밌는 학문이다. 나는 지금도 즐겁게 일을 하고 있고, 앞으로도 즐거울 거라는 확신이 있다.”
이강욱 교수는
2010년 한국과학기술원(KAIST) 전기전자공학부 졸업
2012년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UC버클리) 전기컴퓨터공학 석사
2016년 UC버클리 전기컴퓨터공학 박사
2016년 UC버클리 우수 대학원생 강사상
2016~2018년 KAIST 박사후연구원
2018~2019년 KAIST 연구조교수
2019~ 미국 메디슨 위스콘신대(UW메디슨) 전기컴퓨터공학부 조교수
2020년 국제전기전자공학회(IEEE) 통신학회와 정보이론학회 최다 인용 논문
2022년 재미한인과학기술자협회 올해 젊은 연구자상
2022~ 크래프톤 딥러닝본부 본부장
한국공학한림원 차세대공학리더(YEHS) 시니어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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