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로 뻗는 K기업] 한국은 좁다, 수출 역군이 된 방산

사천=정재훤 기자 2022. 12. 30.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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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사천시에 위치한 한국항공우주산업(KAI) 훈련체계 통합실에 설치된 TA-50 시뮬레이터./정재훤 기자

경상남도 사천시에 위치한 한국항공우주산업(KAI) 훈련체계개발실. 둥그런 구(球) 형태의 TA-50 전술입문기 시뮬레이터 내부에는 실제 전투기에서 사용하는 것과 동일한 동체가 설치돼 있었다.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을 작동시키자, 기체 주위를 감싸고 있던 360도 스크린 위로 드넓은 사천 비행장의 활주로가 눈앞에 펼쳐졌다.

조종 스틱을 앞으로 밀어내자 전투기는 굉음을 내며 활주로 위를 달리기 시작했다. 일정 속력에 도달했을 때 조종간을 뒤로 젖히자 하늘을 향해 힘차게 날아올랐다. 공중에서 적기와 실시간 교전하는 ‘도그파이트(dogfight)’ 모드를 활성화하자 레이더에 가상의 적기 위치가 나타났다. 타깃을 조준하고 공대공 미사일을 발사하니 폭발음과 함께 적기가 추락했다.

이날 시뮬레이터로 체험한 KAI의 FA-50(TA-50) 기종은 길이 13.1m, 폭 9.4m, 높이 4.8m의 경공격기다. 최대속도는 마하 1.5에 달하며, 고도 1만6700m까지 상승할 수 있다. 날개 끝 2곳, 날개 하부 4곳, 동체 하부 1곳 등 7곳에 5t이 넘는 무기를 장착할 수 있다.

지난 5월 한국을 찾은 폴란드의 마리우시 브와슈차크 국방부 장관은 경남 사천 KAI 본사를 방문해 시뮬레이터를 직접 탑승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 기동을 마치고 조종석에서 내려온 그는 “우리가 가진 것보다 훨씬 좋다. 이 장비가 꼭 폴란드에 들어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방한 일정을 마친 뒤 구매를 긍정적으로 검토하던 폴란드는 일주일 만에 실무단을 다시 한국에 보내 수출 계약을 구체화하는 협상을 진행했고, 9월에 48대 구매 계약을 매듭지었다. 한국산 전투기가 아시아, 중동에 이어 유럽 상공까지 진출하는 순간이었다.

그래픽=이은현

한국이 만든 무기가 세계로 뻗어나가고 있다. 국내 방산업체들은 올해 1월 아랍에미리트(UAE)에 천궁2 지대공미사일·레이더, 2월에는 이집트에 K9 자주포를 수출했다. 하반기에는 폴란드와 K2 전차, K9 자주포, K239 천무 다연장로켓, FA-50 경공격기 수출 계약을 맺었다.

그간 한국 방산업계는 수출보다는 성장이 제한된 내수 위주의 사업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방위사업청에 따르면 지난 2010년~2020년 한국 방산업계의 연평균 수출 규모는 30억달러(약 4조원)에 그쳤다.

대한민국은 ‘휴전 국가’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주요 무기를 국산화하기 위해 꾸준히 개발·생산을 해 왔다. 현재 한국 방위산업 무기체계 수준은 선진국의 80~90% 수준까지 올라왔다는 평가를 받는다. 수출 규모도 지난해 70억달러(약 9조원), 올해 170억달러(약 22조원)를 돌파하며 무섭게 성장하고 있다.

그래픽=손민균

성장통도 있었다. 과거 방산 업체들은 무리한 입찰 경쟁에 나선 뒤 납기일을 맞추지 못하거나 성능이 부실해 ‘방산 비리’라는 꼬리표가 붙어 다니곤 했다. 방사청 자료에 따르면 지난 2011년~2020년에 10억원 이상의 지체보상금을 부과한 사례는 총 65건, 금액은 1조1458억원에 달했다. 지체보상금은 계약을 못 지켰을 때 부과하는 일종의 벌금이다.

무리한 사업으로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과거 우리 군은 소총과 유탄 발사기를 결합한 개념인 K11 복합소총을 개발해 2010년 군에 보급했다. 그러나 총기 파손, 탄걸림 등 문제가 수시로 발생했고 훈련 중 폭발 사고를 일으켜 장병이 다치기도 했다.

해외 수주전에서는 번번이 고배를 마셨다. KAI의 T-50 훈련기는 지난 2009년 아랍에미리트(UAE), 2010년 싱가포르 T-50 수주 경쟁에서 연달아 패배했다. 당시 UAE는 산업 협력을, 싱가포르는 훈련 시설과 인력 등을 함께 요구했으나 조건을 충족하지 못했다.

KAI는 실패를 거름 삼아 2011년 인도네시아, 2013년 이라크, 2015년 태국에 T-50 계열 항공기 수출 계약을 따냈다. KAI는 중장기적으로 FA-50 수출 규모를 1000대까지 늘리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잠재적 고객도 많다. 현재 말레이시아 공군과 수출 협상을 진행 중이며, 콜롬비아도 FA-50 도입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미 12대를 도입해 운용 중인 필리핀도 추가 구매를 검토하고 있다. FA-50은 2017년 필리핀 마라위 전투에서 큰 활약을 펼쳐 필리핀군으로부터 ‘게임체인저(GAME CHANGER)’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지난 10월 19일 경상남도 창원시 현대로템 창원공장, 한화디펜스 창원1사업장에서 열린 K2 전차와 K9 자주포 출고식 현장./정재훤 기자

현대로템은 올해 폴란드와 4조5000억원 규모의 K2 전차 180대 수출 계약을 체결했다. K2 전차는 한국의 독자 기술로 개발돼 육군이 주력으로 활용하고 있는 전차로, 그간 수출 실적이 없었으나 현재 폴란드와 820대 규모의 K2 전차 2차 수출 협상을 진행하고 있다. 노르웨이도 자국 노후 전차의 대체품으로 K2 전차에 관심을 보이고 있어 시일 내 추가 수주 낭보가 나올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올해 국내 방산업체 중 가장 큰 규모의 수출을 달성한 한화에어로스페이스의 ‘레드백(Redback)’ 장갑차 역시 세계의 관심을 받고 있다. 레드백은 호주 육군의 장갑차 도입 사업에 참여하고 있고, 폴란드와 추가 수출 협상을 진행하고 있다.

LIG넥스원은 지난 1월 아랍에미리트(UAE)에 4조원 규모의 천궁2 지대공 미사일을 수출하기로 계약했는데, 최근 사우디아라비아가 천궁2 등에 관심을 보이고 있어 추가 수출을 기대하고 있다.

그래픽=이은현

수출 확대로 국내 방산업체들의 수주 잔고도 크게 불어나고 있다. 올해 3분기 기준 국내 주요 방산업체의 수주 잔고 합계는 76조2143억원으로, 지난해 3분기(58조324억원)보다 31.33% 증가했다.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SIPRI)에 따르면 지난 2017∼2021년 세계 방산 수출시장에서 한국 점유율은 2.8%(8위)였다. 다만 지난 5년(2017~2021년)간 점유율 성장세는 한국이 177%를 기록해 상위 25국 가운데 1위를 기록했다. 정부는 2027년까지 세계 방산 수출 점유율 5%를 돌파해 세계 4대 방산 수출국으로 도약하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세계 각국의 군비 지출도 늘어나고 있다. 방위 산업 시장 규모에 해당하는 세계 국방비 지출은 지난해 2조1130억달러(약 2776조원)를 기록하며 7년 연속 증가세를 보였다. 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 등으로 세계 방산 시장 규모는 앞으로 더 늘어나 한국 방위산업이 나설 자리도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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