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로지 맥주만 살아 남았다’... 올해 와르르 무너진 전 세계 술 관련株
올해 주류(酒類) 업계 투자자들이 예년보다 더 씁쓸한 한 해를 보내고 있다. 술 관련주는 증시가 흔들려도 꿋꿋하게 버티는 종목으로 꼽힌다. 그러나 올해는 변동성이 큰 장세를 이겨내지 못하고 속절없이 무너진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9월을 기점으로 미국 다우존스 산업평균 지수는 ‘베어마켓’에 들어섰다. 베어마켓은 주가 지수가 이전 고점보다 20% 이상 떨어진 약세장을 말한다. 한 해가 막바지에 이른 12월에도 여전히 전 세계 증시는 주춤거리고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끝나지 않고, 미 연방준비제도(연준)발 금리 인상 공포가 이어진 탓이다.
술 관련주는 매번 이런 약세장이 찾아올 때마다 빛을 발했다. 술 관련 종목들은 보통 사회적으로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상장 기업을 뜻하는 ’죄악주(罪惡株·sin stocks)’에 속한다. 담배, 카지노 관련주와 같이 묶인다.
이들 주식은 평소에는 좀처럼 드러나지 않다가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2011년 유로존 경제 위기처럼 경기 침체기에 효자 종목 역할을 했다.
투자은행 크레디트스위스가 대공황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가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1900~2019년까지 전체 주식 시장이 연평균 9.3% 상승할 동안, 영국 주류 회사 주식은 11.5% 성장했다.
프랭크 파보치 예일대 경영대학원 교수가 21개국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도 1970~2007년 사이 주류 관련 상장사는 연 평균 시장 전체보다 5.3%포인트 높은 수익률을 거뒀다.
술로 상장에 성공했다는 뜻은 그만큼 해당 기업 제품이 수익을 꾸준히 내는 과점(寡占) 종목이라는 의미다. 여기에 주류 회사들은 배당 성향도 높아 경기 침체기에도 안정적인 수익을 기대할 수 있다.
이전같은 저금리 상황에선 당장 수익이 많지 않아도 미래 성장성이 있는 기업 주가가 오르지만, 요즘처럼 금리가 급등하면 현금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는 배당주 매력이 높아진다.
하지만 올해는 다르다. 위기 때 유난히 달콤했던 술 관련 주식들은 올해 그 명성이 무색할 만큼 쓰디 쓴 성적을 기록했다. 국가와 상관없이 상장한 증권시장을 대표하는 지수 하락율보다 더 떨어진 종목이 부지기수다.
30일 미국과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일본, 중국, 우리나라 등 주요국 증시에 상장한 주류 관련 종목 30여개를 살펴본 결과 올해 디아지오(영국), 페르노리카(프랑스) 같은 글로벌 대형 주류 기업 주가는 상장한 증시 하락율보다 최대 10%포인트 이상 더 하락했다.
세계 최대 주류기업 디아지오는 주가는 올해 들어 10.6% 내렸다. 같은 기간 FTSE100 지수는 0.1% 빠지는 데 그쳤다. FTSE100 지수는 영국 런던증권거래소에 상장한 종목 가운데 시가총액 순서대로 100개 기업 주가를 지수화한 종합 주가 지수다.
디아지오는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여러 주류 브랜드를 취급한다. 블렌디드 스카치 위스키 브랜드 조니워커와 세계 1위 흑맥주 기네스, 보드카 스미노프가 디아지오 소유다.
프랑스 종합주류기업 페르노리카 역시 CAC40 지수보다 더 부진한 성적을 기록했다. CAC40 지수가 올해 9.8% 하락한 가운데, 페르노리카 하락율은 12%를 넘어섰다. 페르노리카는 스카치 위스키 발렌타인과 로얄살루트 등으로 유명하다.
세계 최대 자본시장 미국도 사정은 별 반 다르지 않다. 미국 종합주류기업 콘스텔레이션 브랜드는 올해 8.3% 하락했다. 다우존스 산업평균 지수 하락율(10.1%)과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콘스텔이션 브랜드는 맥주 브랜드 코로나와 와인 브랜드 로버트 몬다비 등을 거느린 거대 기업이다. 이 기업에 속한 슈레이더 셀러스가 만드는 와인은 저명한 와인전문매체 와인 스펙테이터가 선정한 ‘올해 최고의 와인’에 꼽혔지만, 주가 부양에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켄터키 위스키 잭 다니엘을 판매하는 브라운포맨도 올해 8.4% 내렸다. ‘약세장에서는 주류 관련 종목이 강세를 보인다’는 통념이 깨졌다는 반증이다.
다만 이 와중에도 맥주 관련 종목만큼은 여전히 그 명맥을 유지했다. 올해 맥주 관련 기업들은 대체로 대표지수보다 나은 성적을 올렸다.
일부 맥주 관련 기업들은 전 세계 증시가 바닥을 향해 가는 와중에도 두 자리 수 상승률을 기록하며 분전했다.
오비맥주를 가진 세계최대 맥주 기업 앤하이저부시인베브는 올해 주가가 소폭(1.7%) 상승했다. 북미에서 두번째로 큰 맥주 브랜드 몰슨쿠어스도 올해 주가가 8% 이상 올랐다.
동북아시아권 증시에서도 맥주 관련 종목 강세는 이어졌다. 일본 맥주 시장 점유율 1위 기업 기린홀딩스는 올해 주가가 8% 올랐다. 같은 기간 닛케이평균은 11% 넘게 하락했다.
상하이 증시에 속한 칭따오 맥주는 중국 전역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골치를 썩는 가운데 10% 넘게 올랐다.
주류업계 전문가들은 ‘다른 주류에 비해 올해 맥주 소비가 유난히 급상승할 만한 요인이 많았다’고 평가했다.
29일 기린홀딩스가 내놓은 전 세계 맥주 소비량 통계에 따르면 2020년 코로나19가 전 세계적으로 퍼지기 시작하면서 맥주 소비량은 급감했다. 이 기간 홀로 혹은 집에서 술을 마시는 ‘혼술(혼자 마시는 술)’과 ‘홈술(집에서 마시는 술)’ 수요가 일부 늘긴 했다.
그러나 외출 제한과 휴업, 영업 단축으로 일선 음식점과 펍과 바에 납품하는 업소용 맥주 판매가 급감했다. 어느 나라든 맥주 시장 절반 이상은 업소용 맥주가 차지한다. 혼술과 홈술 수요로 이를 만회하기는 역부족이다.
일본의 경우 긴급사태를 선언했던 2020년 4~5월 사이 기린과 산토리, 아사히 등 맥주회사 업소용 맥주 매출은 90%가 줄었다.
맥주 수요는 지난해부터 점차 살아나기 시작했다. 지난해 전 세계 맥주 소비량은 약 1억8560만 킬로리터(kl)로 2020년보다 4% 증가했다. 특히 영국처럼 일찍 코로나 엔데믹(풍토병)화를 선언한 국가에서 맥주 소비량은 2020년부터 2021년 한 해 사이 12.7%가 늘었다.
올해 전 세계 맥주 소비량은 지난해보다 최소 8% 이상 늘어날 것으로 예측된다. 2년 연속 빠른 상승세가 점쳐진다. 카타르 월드컵처럼 맥주 소비를 부르는 세계인의 축제가 열렸던 점도 올해 맥주 소비량을 대폭 끌어 올렸을 것으로 보인다. 선행지표에 해당하는 주가에 내년 맥주 수요 증가분이 먼저 반영된 셈이다.
미국 경제매체 CNBC는 전문가를 인용해 “투자자 관심이 성장주에서 가치주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주류 관련주에 대한 이전보다 세밀한 분류(segmentation)가 이뤄지고 있다”고 했다.
아울러 “물가 상승(인플레이션)이 증시에 변동성을 키우는 요인으로 지목되고 있어 와인이나 위스키 같은 고급 주류 중심 포트폴리오를 가진 상장 기업들은 이전만한 성장 동력을 갖기 어렵다는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고 평가했다.
급격한 물가 상승으로 소비자 주머니 사정이 나빠지면 대형 주류기업이 보유한 고급 와인이나 스카치 위스키 같은 고가 주류 소비는 줄어들 가능성이 크다.
반면 맥주는 미국과 유럽에서 물가 여부와 상관없이 마시는 일종의 ‘필수 소비재’다.
우리나라 증시에 상장한 술 관련주들은 맥주, 소주, 전통주를 가릴 것 없이 별 다른 수혜를 입지 못했다. 유가증권 시장과 코스닥 시장이 그야말로 치욕스런 한 해를 보낸 탓이다.
올해 국내 유가증권시장 코스피 지수 등락률은 주요 20개국(G20)과 아시아 국가를 포함한 27개국 가운데 밑에서 세번째인 25위에 그쳤다.
하이트진로는 코스피 지수보다 9%포인트 덜 하락했지만, 작년에 비해 주가가 15%나 미끄러졌다. 무학과 보해양조, 국순당 역시 주가가 모두 두 자리 수 넘게 빠졌다.
죄악주로서 올해 딱히 선방했다고 보기 어려운 수치다. 제주맥주는 일본과 중국 맥주 기업들과 다르게 주가가 거의 반 토막이 날만큼 부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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