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주야, 그날 아빠가 서울에 갔으면 네가 살았을까” [정치왜그래?]
아들 손길이 닿은 물건을 차마 치울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좋아하던 탁구도 그만뒀습니다. 이태원 참사 유족들이 함께 있는 카카오톡 대화방에 올라오는 글을 읽으며 하루를 보냅니다. 아버지는 다정했던 아들을 그리워하다 문득 생각했습니다. “우리 형주가 그냥 이 세상에서 지워진다는 것이 너무 슬펐어요. 그래서 좀 글이라도 올려서 우리 형주를, 우리 형주라는 사람이 있다라고 사람들이 기억해 주셨으면 해서…” 아버지는 아들을 생각하며 글을 적었습니다. 제목은 ‘아버지의 짧은 후회’입니다.
토요일이면 김장 고춧가루 준비해둔 걸 가지고 서울로 가야지, 아침에 기차 시간표를 봤죠. 오전에 가야 서울에 가서 우리 아들 형주랑 안식구를 만나고 용산에서 밤 9시12분이나 9시50분 차를 타고 익산에 올 수 있습니다.
서울에 갈 때마다 기차 시간이 정해져 있었습니다. 그날(이태원 참사 당일인 10월29일) 내가 서울에 갔더라면 우리 형주는 많은 시간을 나와 같이 행복했을 것입니다. 형주는 저녁 시간에는 나를 배웅하러 용산역으로 따라왔을 겁니다. 그랬다면 이태원에 갈 시간은 맞지 않아서 죽음을 면했을지도 모르는 상황이 됐을 지도 모른다고 후회해봅니다.
그날 ‘서울에 가고 싶음’은 나에게 아들을 구할 수 있는 절호의 시간이었는데, 탁구에 정신 팔려 친구의 청원을 거절하지 못하고 약속한 것이 후회스럽기만 하지요. 처음부터 탁구를 안 했으면 약속도 안 했을 것을. 그날은 늦기 전에 고춧가루를 갖다줘야겠다고 마음먹었었는데. 아아.. 그 찬스를 놓쳐 아들 형주를 영원히 볼 수 없는 곳으로 보내고 말았어요.
고 서형주. 1988년생. 10월29일 이태원 골목에서 숨진 158명 중 한 명입니다. 막내아들 형주씨는 누구보다 살가운 아들이었습니다. “음식도 무슨 음식을 먹으면 안 돼, 이런 거 먹으면 콜레스테롤 많아서 동맥경화도 오고 그런다면서 좋은 음식도 가르쳐주고. 스마트폰에 제가 뭘 못하면 ‘이건 이렇게 해’ 다 해결해 주고 그래서 오만 것까지 다 정이 들어있었어요 걔한테.” 10월30일, 일산의 한 대학병원에 아들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가면서 아버지는 ‘살아만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바람과 달리 아들은 병실이 아닌 영안실에 누워있었습니다. 아버지와 똑같이 사서 나눠 가진 양말을 신은 채였습니다.
■ 방송 : 시사IN 유튜브 〈정치왜그래?〉(매주 화요일 저녁 7시 / https://youtube.com/sisaineditor)
■ 진행 : 최한솔 PD
■ 대담 : 고 서형주씨 아버지
☏ 진행자 / 유가족협의회는 어떻게 합류하게 되셨나요.
☏ 아버지 / 지난번에 처음 유가족협의회 만들 때에 거기 저도 참석했어요. 딸아이가 유가족 카톡방이 있다고 알려주더라고요. 살릴 수 있었는데… 왜 그날(참사 당일)은 하
나같이 다 무대응으로 해가지고… 저녁 6시40분부터인가 계속 살려달라고 전화를 그렇게 했는데도 그 많은 시간을 다 무대응으로 해가지고… 우리 아들 딸들을 이렇게 죽게 만들어놔서 원통하다고, 그렇게 이야기를 했었어요.
☏ 진행자 / 아드님인 형주씨에게 편지를 쓰셨다고 하셨어요.
☏ 아버지 / 우리 형주가 친구도 별로 없고 그래서, 이 세상에서 지워진다는 것이 너무 슬펐어요. 그래서 좀 글이라도 써서 우리 형주를, 형주라는 사람이 있다고 사람들이 기억해 주셨으면 해서…
☏ 진행자 / 형주씨는 어떤 아들이었나요.
☏ 아버지 / 우리 형주는 대학 졸업하고 고향 김제로 내려와서 주로 생활을 같이 했었어요. 공무원 시험도 준비하다 여의치 않고 해서. 자기도 일이 뜻대로 안 되니까 고민도 많이 했죠. 엄마가 서울에서 식당을 해요. 그래서 서울로 가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래라, 서울 가서 잘하고 있어라 했죠. 제가 있는 김제로 내려올 때마다 아빠가 호두과자 좋아한다고 사오고, 필요한 거 있으면 사다주고 그랬어요. 얼마나 살가운지, 우리 식구들 모두한테 다 참 잘했어요. 그 애가 우리 막둥이입니다. 우리가 다 그 아이를 좋아해요. 그래서 걔 없으면 아마 우리 집이 생활이 안 될 정도로 걔가 우리 집 기둥이었죠. 갑자기 그 애가 하루아침에 없어져버리니까 우리 집안이 완전히 무너지는 것 같은 그런 기분이었죠. 지금도 그냥 날이 가면 갈수록 그 애 생각만 나요. 그 애가… 그 애 방이 내 옆에 있어가지고 소지품들이 너무 많이 있어서 볼 때마다 생각나고, 그 애 손길 안 닿은 곳이 하나도 없었어요, 우리 집안에. 없앨 수도 없고 그래서 그냥 날마다 슬퍼요.
☏ 진행자 / 참사 당일에 원래 아버지가 서울 오시기로 예정돼 있었다고요.
☏ 아버지 / 내가 이제 김장 고춧가루를, 우리 안식구가 고춧가루를 좀 보내달라고 그러길래 고춧가루를 여기서 다 빻아가지고 갖다 주려고 했죠. 내가 운수업을 하는데 주말이 시간이 좀 많아요. 그래서 그 날도 가려고 했었는데 우리 지인 하나가 탁구 게임을 한번 하자고 아침에 청원하더라고요. 그래서 ‘에이 오늘 못 가면 일요일 내일 가지’ 하고 그냥 약속을 했어요. 그게 자꾸 후회가 되는 거예요. 내가 그때 탁구를 안 하고 그냥 서울로 갔더라면 우리 아들하고 나하고 같이 거기서 돌아다니고 했으면 우리 아들 거기(이태원) 안 갔을 건데… 그것이 그렇게 후회가 되는 거예요. 내가 탁구를 해서 아들을 결국 죽게 만들었나 싶어서 그래서 슬프기만 해요. 요즘은 이제 운동도 안 해요. 이태원 사건 난 후로는 운동도 안 하고, 아무것도 일도 안 하고 그냥 집에 거의 있어요. 체중도 많이 빠지고, 이러다가 내가 얼마 못 살고 죽을 것 같은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 진행자 / 참사 당일 상황은 어떻게 알게 되셨나요.
☏ 아버지 / 10월30일 새벽이겠죠. 지인이 전화가 왔어요. 서울 사는 아들은 이태원 그런 데 안 가냐고 물어봐요 저한테. 그래서 ‘잘 모르겠는데 그런 데 안 갈 거야’ 했어요. 이태원이라는 데가 뭐 하는 데인지도 뭐 하는지도 지금도 잘 모르겠어요, 저는요. 그래도 전화 한번 해봐야지 하고, 그때가 아침 6시인가 됐었는데 전화를 해봤어요 우리 아들한테. 전화를 안 받아요. 두 번 세 번을 안 받아. 다른 때 같으면 한 번 하면 즉시 받을 건데 안 받더라고요. 그래서 우리 안식구한테 전화를 했더니 우리 안식구는 그날 밤부터 찾으러 돌아다녔는데 못 찾았대요. 안사람이 ‘마음 단단히 먹고 있으라’고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이제 우리 아들 죽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이제 울다가 서울로 이제 갔죠. 갔는데. 용산에 와서 용산구청으로 오라고 그래서 용산구청 가서 만났는데, 왔다갔다 해도 못 찾고 택시 타고 헤매고 계속 있으니까, 그때 누가 일산 대학병원에 있다고 (해서) 이제 거기를 가고 있는데 용산경찰서에서 전화가 왔어요. 아들 이름이 서형주냐고 그래서 그렇다고 했더니 사망했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래도 혹시나 ‘살아만 있으면 좋겠다…’ 이렇게 실낱같은 희망을 가지고 갔죠. 병원에 갔더니 영안실에 누워 있는 거 보고… 그걸 보니까 제가 입고 있던… 같이 양말도 똑같은 양말을 사서 나눠 신었거든요. 그래서 똑같은 양말이에요. 그래서 너무 마음이 아팠어요. 그리고 옷도 여기 시골 있을 때 저하고 거의 사이즈가 맞아서 걔옷 내옷 따로 있는 게 아니고 막 같이 입었어요 옷을. 그런데 가서 보니까 영안실에… 내 옷을 입고 죽어 있길래 이럴 수가 있나 싶어서… 지금도 그 생각하면… 말로는 할 수가 없어요.
☏ 진행자 / 아드님이 그날 누구랑 갔는지는 아세요?
☏ 아버지 / 혼자 갔어요. 원래 그런 축제 가서 노는 걸 좋아해요. 사진 찍기도 좋아하고, 같이 놀러를 잘 다니기도 했어요. 제가 서울 가면 꼭 용산역까지 바래다 주고 그랬어요. 플랫폼까지 쫓아 내려와서 손을 흔들어요. 집에 있으라고 해도 아빠 가는 거 봐야한다면서 따라와서 군것질도 같이 하고 그랬어요, 그 애가. 음식도 무슨 음식을 먹으면 안 돼, 이런 거 먹으면 콜레스테롤 많아서 동맥경화도 오고 그런다면서 좋은 음식도 가르쳐주고. 스마트폰에 제가 뭘 못하면 ‘이건 이렇게 해’ 다 해결해 주고 그래서 오만 것까지 다 정이 들어있었어요 걔한테. 그랬는데 그 애가 없으니까 내가 그냥 뭐 이제 사는 것도 자신이 없어졌어… 물어볼 것도 없고, 물어볼 사람도 없고. 요즘은 유가족 카톡방에 들어가서 누가 글 올리면 나는 그거 읽어보고 그걸로 잠시나마 위안을 하고 막 그래요. 하루 종일 그거 읽는 게 아마 시간의 전부라고도 봐요.
☏ 진행자 / 사고 경위 등은 따로 들으신 게 있나요?
☏ 아버지 / 전혀 없어요. 다행히도 휴대전화를 수거했어요. 우리 딸이 그걸 조회 해봤더니 10시10분까지도 살아 있었더라고요. 영상을 찍어서 거기다 저장을 해놨어요. 저장한 시간이 거기에 기록이 돼 있더만요. 진상을 정확히 밝혀야 할텐데… 그리고 우리는 어디 추모비라도 하나 만들고, 추모관이라도 만들어서 가끔 우리 유가족이라도 만나보고 그랬으면 내가 위안을 좀 받을 것 같아서 그런 것 좀 해주셨으면 좋겠고요. 국정조사 잠깐 뉴스 통해서 봤는데 그냥 변명만 하고 흐지부지 넘어갈 것 같아요. 별로 제가 들어봐도 속 시원한 얘기는 하나도 않더라고요. 그래서 과연 국정조사가 끝나도 어떻게 될지 걱정이에요.
☏ 진행자 / 관련 뉴스들 계속 챙겨 보고 계시는군요.
☏ 아버지/ 그러면요. 계속 보고 있어요. 그리고 내가 현장도 가봤어요. 이태원 해밀튼호텔 그 뒤에 골목도 가봤어요. 전부 다 가봤는데 골목 역시 좁긴 하더만요. 그 좁은 골목에 경찰 몇 명만 있었더라도… 골목 양끝에 몇 명만 있었으면 한 사람도 안 죽었을 것 같은데. 그렇게 많은 병력이 필요치도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왜 그걸 못했나 정말 아쉽더라고요. 충분히 막을 수 있는 그런 사고였는데 그걸 정부에서 못 막은 것 같아요.
☏ 진행자 / 서울 분향소에는 자주 오시나요.
☏ 아버지 / 여기서 시골에서 올라간다는 게 쉽지 않아요. 거기 가면 이제 하루를 다 써요. 그래도 시간이 있으면 서울이라도 가서 거기한테 힘을 좀 보태줘야 되겠다라는 생각이 들어서, 모임이 있다고 하면 서울로 올라가요. 여기 근처 전주에도 모임을 만든다고 그래서 전주에도 갔다 오고. 일상이나 일은 거의 접어버리고 그런 데만 다녀요. 사실 일도 더 하고 싶은 마음도 없고요.
☏ 진행자 / 국민들에게 당부하시고 싶은 말씀 있을까요?
☏ 아버지 / 우리 도와주시는 분들도 많이 계세요. 그래서 참 고맙죠. 다만 일부 신자유연대 이런 사람들은 엉뚱한 얘기하고 그런 사람도 있어요. 근데 어쩌겠어요. 속으로는 미워도 그냥 미운 사람으로 치부하고 마는 거죠. 나는 슬픈 이야기도 지인들이나 가까운 친구랑은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요. 같은 유가족들하고나 겨우 하는 거죠. 그래서 우리 아들 죽은 줄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요. 내가 말을 안 해서. 말을 하면 나한테 도움이 안 될 것 같아서요. 내가 말하면… 물어보고 그런 자체가 내가 또 슬퍼지고… 물론 이렇게 인터뷰하고 하면 아는 사람들은 알겠죠. 그런 사람은 어쩔 수 없고. 일부러 내가 우리 아들 죽었다고 이렇게 이야기는 절대 안 해요. 그렇지만 그냥 이대로 묻히기에는 우리 아들이 너무 불쌍해서… 그냥 이름이라도 좀 이렇게 남겨놔야 싶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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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일호 기자·최한솔 PD ilhosty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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