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당신의 나를 망칠 권리, 나에게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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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남자 없으면 안 돼?" 언젠가 친구가 말했다.
나도 다른 이에게 비슷한 말을 했었다.
꼬인 감정의 정체를 애써 외면해왔는데, 한 권의 책이 나를 기어코 직면하게 만든다.
책에는 '남자 못 잃는' 여성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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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은의 소란한 문장들]
남은 인생은요?
트라우마, 가족, 중독 그리고 몸에 관한 기록
성 지음, 호영 옮김 l 일다 l 1만7000원
“넌 남자 없으면 안 돼?” 언젠가 친구가 말했다. 나도 다른 이에게 비슷한 말을 했었다. ‘더러운 여자’라는 흔한 레퍼토리처럼, ‘사랑에 목매는 여자’는 수치심을 주는 말로 쓰인다. 그 말은 자책 버튼을 누른다. 나는 왜 주체적이지 못할까. 날 한심하게 보겠지? 예전에 내가 다른 애를 그렇게 봤던 것처럼.
미디어에서 완벽해 보이는 여성이 사랑을 갈구하는 모습이 그려질 때면 ‘또 이성애 중심 로맨스군. 여성을 사랑 받는 존재로 가두네. 유해해!’라는 반발심과 함께 ‘근데 일보다 사랑이 중요할 수도 있잖아?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아무것도 모르잖아?’ 양가감정이 든다.
꼬인 감정의 정체를 애써 외면해왔는데, 한 권의 책이 나를 기어코 직면하게 만든다. 한국계 미국 이민자, 트라우마와 중독을 안고 살아가는 예술가 성(sung)의 <남은 인생은요?>다. 책에는 ‘남자 못 잃는’ 여성이 나온다. 작가는 폭력으로 물든 가족과 사회, 자기 몸을 벗어나는 방식으로 파괴적인 사랑을 찾는다. 이 폭력에서 벗어나려고 저 폭력으로 이동한다. 그것은 살기 위한 노력으로도, 적극적으로 나를 망치기 위한 노력으로도 읽힌다. 인종/성/가족 폭력과 차별은 내가 선택할 수 없었어도, 나를 망칠 대상은 내가 선택하겠다는 기묘한 주체성으로도 읽힌다.
처음 작가의 여정을 따라갈 때, ‘왜 또 위험한 관계에 빠지는 거야! 멈춰!’ 화딱지가 나서 책을 덮으려다가 결국 다시 펼쳤다. 작가와 내가 얼마나 다른지 의구심이 들었고, 인정하기 싫지만 우리가 무척 닿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작가는 사랑을 “자신이 속아 넘어가도록 허락하는 것”이며, “고통 그 자체가 아닌, 고통에 자기를 열어두는 일”로 정의한다. “그건 하루를 향해 활짝, 벌거벗은 채 열려 있는 창문”이라고.
트라우마의 원인과 고통을 벗어날 방법으로 찾은 선택지도 사회적 맥락과 동떨어질 수 없기에 주체성이라는 말은 그 배경과 맥락을 삭제할 위험을 안고 있다. 당장 다른 자원이 없는 누군가에게 사랑(로맨스와 섹스)이 하루를 살 유일한 희망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는 영영 이해하지 못할 타자로 남을 거다. 나는 그를(어쩌면 내 한 조각을) 그렇게 내팽개치고 싶지 않았다.
책의 중간 중간에는 작가가 출판사에 보낸 편지가 담겨 있다. 성은 자신이 회복되었다고 느끼지 않는데, 책을 어떻게 마무리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고백한다. ‘아직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가 있고, 문제에 시달리고, 정신병에 걸렸는데 상담이나 약물치료 받을 돈도 없고 인생을 망친 인간일 뿐인데, 이런 가치도 깨달음도 없는 제 글이 책이 될 수 있을까요?’
나는 성의 두려움에 응답하고 싶다. 당신의 글을 통해 내가 외면했던 조각을 마주하게 되었다고, 당신의 ‘망한’ 이야기는 구석으로 밀려나는 질문을 우리 앞에 던진다고. 야망이나 돈을 쫓는 건 괜찮고, 사랑을 쫓는 건 구린 일인가? 무엇이 축복할 가치이고 비난할 가치인지를 누가 어떤 기준으로 나눌 수 있느냐고. 왜 당신에게 유일한 동아줄인 사랑은 폭력과 긴밀하게 얽힌 건지 질문할 기회를 줘서 고맙다고. 당신의 용기 있는 고백에 단단한 답장을 내놓지 못하지만, 당신을 타자로만 두지는 않겠다고 답하고 싶다.
홍승은/집필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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