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집’은 극사실주의 드라마였다…‘현실 진도준들’ 예지력 보면

이정훈 2022. 12. 30.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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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선 ‘이재용’ 등 헐값에 계열사 지분 매입해
‘정의선’ 등 일감 몰아주기로 주식가치 키우고
‘김동관’ 입사 12년 만에 부회장 등 빠른 승진
제이티비시 제공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이 지난 25일 막을 내렸다. 주인공 진도준은 전생에서 얻은 앞날을 내다보는 능력을 활용해 할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종잣돈을 바탕으로 막대한 부를 쌓을 수 있었다. 현실의 ‘재벌집 자녀’들은 어떨까? 상당수는 진도준이 ‘두번째 생’으로 얻은 미래 예측 능력에 못지 않은 신묘한 방법으로 수십억원을 수조원으로 불리는 재주를 부렸다. 드라마는 끝났지만, 현실 재벌집에서는 여전히 드라마 못지 않은 ‘마법’이 진행 중이다.

①전환사채(CB)·신주인수권부사채(BW)

재벌총수 일가가 부를 증식하는 데 가장 먼저 쓴 ‘신공’은 신주인수권부사채와 전환사채 등이었다. 총수 자녀들이 향후 새 주식을 살 수 있는 권한이나 주식으로 전환되는 채권을 낮은 가격으로 사들인 뒤 이를 이용해 계열사 지분을 확보하는 식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이서현 삼성복지재단 이사장이 삼성물산과 삼성에스디에스(SDS) 지분을 확보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이 회장을 비롯한 3남매는 1996년 10월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를 1주당 7700원에 사들였다. 이 회장은 48억3100만원을, 이부진·서현 자매는 각각 16억1천만원을 썼다. 이후에 이 전환사채는 주식으로 전환된 뒤 에버랜드가 제일모직과 합병하고 또 삼성물산과 합병하면서 삼성그룹의 지배구조 정점에 있는 삼성물산 지분으로 탈바꿈했다. 현재 이재용 회장의 삼성물산 지분 3388만주 가운데 3137만주(93%)와 이부진·서현 자매가 각각 보유한 1166만주 가운데 1046만주(90%)가 이 전환사채에서 비롯됐다. 이재용 회장이 보유한 주식 가치 총 4조487억원(27일 종가 11만9500원 기준) 중에서 이 전환사채에서 만들어진 몫은 3조7500억원에 이른다. 그동안의 배당금을 제외하더라도, 종잣돈 수십억원이 현재 수조원으로 늘어나게 된 것이다.

삼성에스디에스 지분도 비슷한 ‘신공’을 거쳤다. 이재용 회장 등은 1999년 발행된 삼성에스디에스 신주인수권부사채를 사들인 뒤 2002년 이를 행사해 삼성에스디에스 주식을 대량 보유했다. 여기에 이 회장은 47억원, 이부진·서현 자매는 각각 34억원을 들였다. 그 덕에 이 회장은 삼성에스디에스 250만주(옛 삼성네트웍스 지분 포함)를, 이부진·서현 자매는 각각 181만주를 갖게 됐다. 현재 가치는 이 회장은 3250억원(27일 종가 13만원 기준), 이부진·서현 자매는 각 2353억원에 달한다. 여기에 1996년 삼성에스디에스가 유상증자를 할 때 삼성물산·전기가 권리를 포기하면서 이 회장 3남매가 사들인 주식까지 합쳐 이재용 회장은 870만주, 이부진 사장과 이서현 이사장은 각각 301만주를 보유하게 된다.

그리고 20년 뒤인 2016년 이 회장은 159만주(주당 약 24만원)를 내다 팔아 약 3800억원을, 두 자매는 지난 3월 각각 150만주(주당 약 13만원)를 팔아 약 1900억원씩 현금을 마련했다. 이 회장은 당시 삼성엔지니어링 유상증자에, 두 자매는 상속세를 내는 데 쓴 것으로 알려졌다. 진도준이 닷컴 버블이나 9·11 사태 등을 미리 파악해 주식 대박을 터뜨렸다면, 현실의 삼성 일가는 신종증권을 사들이고 계열사 유상증자에 참여하면서 ‘초대박’을 친 것이다.

②일감 몰아주기와 회사기회 유용

2000년 이후엔 ‘일감 몰아주기’라는 새로운 신공이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 대주주인 현대글로비스가 대표 사례다. 2001년 정의선 회장은 30억원을 들여 아버지 정몽구 명예회장과 함께 현대글로비스를 100% 출자해 개인회사로 설립했다. 이후 현대글로비스는 현대차와 기아차로부터는 완성차 운송을, 현대제철과 현대모비스로부터는 철강 자재·부품 운송 등을 독점하다시피 맡아 급속히 성장했다. 현대글로비스의 매출(연결기준)은 2003년 5788억원에서 2010년 5조8340억원, 2022년 27조7천억(추정치)원까지 급증했다. 지난해 현대차 등 국내 현대차그룹 계열사와의 내부거래액만 4조1311억원으로 전체 매출(17조5727억원·별도 기준)의 24%에 이른다.

정 회장은 현대글로비스를 상장하기 전 노르웨이 해운업체 빌헬름센에게 일부 지분(850억원 어치)을 팔았고, 일감 몰아주기 규제를 피하려고 2015년(2009억원 어치)과 올해 일부 지분(7400억원 어치)을 매도해 1조원의 현금을 챙겼다. 현재는 749만9991주를 갖고 있다. 27일 종가는 17만4천원으로 취득원가 166.67원의 1000배 이상이다. 총 가치는 1조3천억원에 이른다.

정 회장이 일감 몰아주기로 부를 쌓은 곳은 광고업체인 이노션, 시스템통합업체(SI)인 현대오토에버, 건설업체인 현대엔지니어링 등 다양하다. 정 회장의 누이 정성이 이노션 고문과 정명이 현대커머셜 사장도 자신이 대주주인 이노션, 현대커머스 등을 일감 몰아주기로 키울 수 있었다.

다른 그룹들도 비슷한 신공을 구사했다. 삼성에선 삼성에스디에스, 삼성웰스토리(옛 에버랜드) 등을 꼽을 수 있다. 에스케이(SK)그룹은 최태원 회장의 지분이 많았던 에스케이씨앤씨(C&C·현재 에스케이와 합병)가, 엘지(LG)그룹에선 구형모 엘엑스(LX) 부사장이 소유한 옛 지흥(현 이케이·매각)이 사례다. 뿐만 아니라 지에스(GS)그룹 지에스아이티엠, 한화의 에이치솔루션(옛 한화에스앤씨·현재 한화에너지와 합병) 등 이미 이 방법은 보편화했다.

에스케이실트론처럼 회사기회 유용 사례도 있다. 에스케이가 엘지로부터 실트론을 인수할 때 최태원 회장도 지분 일부(29.4%)를 인수해 실트론이 성장하면서 나눈 수익을 직접 누릴 수 있었다. 지난해 공정거래위원회는 최 회장의 사익 편취로 보고 시정명령과 과징금 16억원을 부과했다. 여전히 법망을 피하거나 작은 과징금을 감수하며, 주요 그룹에서는 일감 몰아주기와 회사기회 유용이 진행 중이다.

프로그램 갈무리

③초고속 승진

드라마에서처럼 금수저들의 승진은 초고속이다. 한화 김동관(39) 부회장은 27살이던 2010년 1월 한화에 차장으로 입사해 2015년 1월 한화큐셀 임원으로 승진했다. 이후 2020년 9월 한화솔루션 대표이사(사장)가 됐고, 올해는 그룹 부회장까지 올랐다. 조원태(46) 한진그룹 회장도 27살이던 한진정보통신 차장으로 입사해 4년 만에 상무보로 임원이 됐다. 이후 2016년 부사장, 2017년 사장 승진 이후 2019년 회장을 물려받았다. 구광모(44) 엘지그룹 회장은 28살이던 2006년 엘지전자에 입사해 2014년 12월 상무로 승진한 뒤 2018년 회장으로 올라섰다.

재벌총수 일가의 초고속 승진은 경기 둔화 우려로 임원 승진이 적었던 올해도 여전했다. 엘지에서 계열분리된 엘엑스그룹 구본준 회장의 장남 구형모(35) 부사장은 지난 11월 승진 7개월 만에 한단계 더 승진했다. 이재현 씨제이(CJ)그룹 회장의 장남인 이선호(32) 씨제이제일제당 식품전략기획 담당 경영리더는 식품성장추진실장을 맡으며, 지난해 임원(리더)으로 승진한 데 이어 올해 한단계 더 올라섰다.

범죄를 저질러도 처벌은 관대하고, 관련 사규 적용마저 재벌집 자식들은 예외다. 이재용 회장은 이른바 ‘최순실 게이트’에 연루돼 징역 2년6개월형이 확정됐지만, 형을 마치기도 전에 가석방과 복권이 이뤄졌다. 그는 여전히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조작에 연루된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지만 지난 8월 ‘광복절 특사’를 받았다. 직원이나 운전기사에 대한 갑질 등의 문제가 제기된 한진 조원태 회장이나 조현민 사장은 회사 생활에 차질이 없거나 잠깐 휴식을 취한 뒤 금세 제자리로 돌아왔다. 횡령·배임 등으로 유죄 판결을 받는 이는 회사 임원에서 배제된다는 사내 규정이 예외로 적용되는 경우도 있다. 지난 5월 공시한 주요 기업의 지배구조보고서를 보면, ‘기업가치 훼손 또는 주주권익 침해에 책임이 있는 자의 임원 선임 방지 정책’을 시행하면서도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과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이재현 씨제이 회장 등에 대해 ‘뛰어난 경영능력’, ‘미래전략 수립’, ‘회사 손해 회복’ 등을 임원을 맡는 이유로 내세웠다.

‘현실 진도준’의 무기는…전환사채·일감 몰아주기·초고속 승진‘진도준들 마법’은 전환사채 등…종잣돈 수십억이 수조원 주식으로 드라마에서 진양철 회장의 딸 진화영은, 백화점 입점업체의 결제대금으로 주식투자 하려는 것을 막는 직원에게 벌컥 화를 낸다. “내가 순양백화점이고, 순양백화점이 나야!”라면서. 한국 재벌의 현실을 살펴보면 <재벌집 막내아들>은 극사실주의 드라마라고 봐도 틀리지 않다.

이정훈 기자 ljh9242@hani.co.kr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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