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원하는 대로 쓰십시오. 저희가 내드리겠습니다.”

최원형 2022. 12. 30.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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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한국출판편집자상 받은 이승우 길 편집자
“호기심, 저자와의 지적·정신적 교류가 동력…
책은 ‘필요하니까, 좋아하니까’ 만드는 것”
제1회 한국출판편집자상 대상 수상자인 도서출판 길 이승우 기획실장이 지난 23일 오후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 사옥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지를 취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광주, 부산, 대구, 원주, 군산…. 인문사회과학 전문 출판사 도서출판 길(대표 박우정)의 이승우(54) 기획실장은 출장이 잦다. 한달에 서너번씩 기차를 타고, 어떤 날은 서울 시내에서만 하루에 세군데씩 ‘찍기’도 한다. 오로지 학자들을 만나 ‘책 얘기’를 하기 위해서다. 원고를 이미 받아둔 저자든, 책을 써보시라 권유하고픈 저자든, 지금 무엇을 연구하는지 듣고 싶은 저자든 가리지 않는다. 돌아오는 길엔 “들은 이야기를 복기하며 오만가지 생각을 다 하는데, 그 즐거움이 어마어마하다.” ‘오늘 만나본 ㄱ 선생과는 이런 책을 만들어볼까?’, ‘ㄴ 선생 이야기를 들었는데, 다음에 꼭 만나봐야겠다’, ‘아, 이 주제에 대해서는 또 누구를 찾아가보면 좋지?’…. 새로운 이야기라도 들은 날이면 가까운 사람에게 무작정 전화를 걸어 “오늘 무얼 공부하는 누구를 만났는데…” 흥분해 이야기를 쏟아내기도 한다.

묵직한 인문학술서들로 출판계·학계에서 ‘어떻게 이런 책들을 펴내는지 모르겠다’는 감탄 섞인 평가를 받는 길의 책들은, 이처럼 기획자이자 편집자인 이 실장의 주체 못 할 호기심을 주된 동력 삼아 만들어진다. 박우정 대표와 동료 편집자 천정은 차장이 그의 버팀목이자 ‘출판 동지’다. 지난 23일 <한겨레>와 만난 이 실장은 “지난 28년 동안 편집자로 일해오며 오직 내가 궁금하고, 내가 알고 싶은 것을 책으로 만들어왔다”고 말했다. “편집자들의 노고와 역할을 높이 평가하고 긍지와 자부심을 고양시키기 위해” 올해 처음 제정된 ‘한국출판편집자상’ 대상을 받은 그는 “자기 아이디어를 만들어내고 구현해내는 것”이 편집자의 핵심 정체성이라는 점을 무엇보다 강조했다.

청소년 시절 책과 담을 쌓았던 이 실장은 형이 대입 축하 선물로 준 박태순의 <국토와 민중>(한길사), <해방전후사의 인식>(한길사) 등을 읽고 책의 세계에 눈을 떴다. 이전까지 배웠던 역사와는 전혀 다른 역사를 접하며, 그런 길을 열어주는 책이란 존재가 대단하다고 느꼈다는 것. 다름 아닌 그 한길사에 무작정 입사 지원을 해 출판 인생을 시작한 것, 자나 깨나 책 얘기만 할 정도로 책에 대한 애착이 강한 김언호 대표로부터 “출판의 모든 것”을 배운 것 등은 큰 행운이었다. “책에 대한 아이디어만 있으면 전국 어디로든 무작정 ‘선생님들’ 만나러 다니는 것도 김언호 대표로부터 배운 것”이라 했다. 편집자에게 기획 부담이 별로 없던 그 시절, 그는 기획실에 배속되어 수많은 저자들을 상대하는 업무를 전담하기도 했다.

제1회 한국출판편집자상 대상 수상자인 도서출판 길 이승우 기획실장이 23일 오후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 사옥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이렇게 8년 동안 일하면서 출판의 기본, 특히 다양한 학문 세계를 두루 다뤄야 하는 ‘인적 네트워크’의 중요성을 배울 수 있었다면, 한길사를 나와 2003년 신생 출판사 길의 기획실장을 맡게 된 것은 그 자신 출판 인생의 본격적인 출발점이었다. 이 실장은 “길에서 일하면서부터 한결 더 깊이 있는 편집자와 저자 사이의 정신의 교류를 찾아내고, 만끽할 수 있게 됐다”고 했다. 대표적으로 꼽는 것이 김상봉 전남대 교수와의 관계다. 인연 자체는 한길사 때부터 있었지만, 관계가 더욱 깊어지면서 둘이 함께하는 출판 역시 깊어져왔다는 것이다. “지금 가장 크게 관심을 두고 있는 중세 철학, 중세 사상, 음악 등의 분야는 원래 그리 눈여겨보지 않았던 영역이에요. 김상봉과의 25년 관계 속에서 칸트에서 데카르트로, 수아레스 등 중세 철학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그의 연구를 쫓다 보니 점차 나 스스로도 넓어져온 것이죠.” ‘발터 베냐민 선집’을 총괄하는 최성만 이화여대 교수나 ‘막스 베버 선집’을 내고 있는 김덕영 독일 카셀대 교수와의 인연 등도 마찬가지다.

“돈이 되느냐를 따져본 적이 한번도 없어요. 학술·인문 분야에서 책이란 건 몇부 팔릴지 따져서 만드는 게 아니라 그저 저자와 편집자가 의기투합해서 내는 겁니다. 필요하니까, 좋아하니까 내는 거예요.” 게오르크 지멜 전공자를 찾던 중 김덕영 교수를 최성만 교수 소개로 처음 만난 자리에서 이 실장은 대뜸 “<돈의 철학>, 번역합시다” 제안을 했다. 독일에서 귀국한 뒤 허술한 국내 학술출판 현실을 경험해본 김 교수는 ‘이 사람이 제정신인가’ 생각했다가, 이 실장의 한마디에 믿음을 갖게 됐다고 한다. “원하는 대로 쓰십시오, 저희가 내드리겠습니다.” 이처럼 단단하게 이어진 지적·정신적 교류는 점차 ‘저자와 편집자 사이’를 넘어 속마음을 터놓고 서로 보듬는 인간적인 관계로 발전했다고 이 실장은 말한다.

이승우 실장이 자신의 출판 인생에서 두번째 분기점으로 꼽는 것은 고전문헌학자 안재원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교수와의 만남이다. 키케로의 <수사학> 번역본을 내기 위해 처음 만난 안 교수는 이 실장에게 “‘필롤로지’(philology·문헌학)의 학문 방법론이 편집자에게도 얼마나 중요한지” 깨우쳐줬다고 한다. 텍스트를 하나하나 따지고 검증하는 문헌학의 엄정함은 출판편집자에게도 필수적인 태도란 인식으로부터, “편집자의 진정한 위상은 여기에 있다”는 확신까지 갖게 됐다는 것이다. 이처럼 텍스트에 충실하려는 태도는 깊이 공부하는 국내 학자들로 하여금 길에서 나온 책들을 더욱 신뢰하게 만드는 데에 중요한 밑거름이 됐다. <수사학>뿐 아니라 마키아벨리의 <군주론>(곽차섭 옮김), 크리스티안 볼프의 <중국인의 실천철학에 대한 연설>(이동희 옮김), 토마스 아퀴나스의 <존재자와 본질>(박승찬 옮김), 바뤼흐 스피노자의 <지성교정론>(김은주 옮김) 등 국내에 보기 드문 이탈리아어-한국어, 라틴어-한국어 대역본들을 펴내온 것도, 고전문헌학으로부터 영향받은 길의 엄정한 출판 철학에 입각한 시도다. 첫 만남에서 긴가민가하던 학자들이 길에서 낸 책들의 주요 대목들을 확인한 뒤엔 진지한 태도로 돌변했던 경험도 몇차례였다고.

15~16세기 아리스토텔레스 등 고전 출판에 몰두했던 이탈리아 출판인 알두스 마누티우스. 위키미디어 코먼스
주어캄프를 명출판사로 이끈 기획자 지크프리트 운젤트. ©크리스티안 횐, 주어캄프 누리집 갈무리

이승우 실장은 가장 존경하고 닮고 싶은 출판인으로 두 사람을 꼽는다. 15~16세기 르네상스 시기 고전학으로 유럽 전역의 지성계에 ‘출판 왕국’을 세웠던 알두스 마누티우스(1449~1515)와 아도르노, 베냐민 등 기라성 같은 저자들을 발굴해 신생 출판사였던 독일의 주어캄프를 전세계적인 명출판사로 일군 지크프리트 운젤트(1924~2002)다. 저자들과의 깊은 지적·정신적 교류에 대한 강조가 운젤트로부터 온 것이라면, ‘필요하니까, 좋아하니까 책을 낸다’는 신념은 마누티우스로부터 온 것이라 하겠다. 길은 마누티우스에 대한 연구서 <알두스 마누티우스>(마틴 로리 지음, 심정훈 옮김)를 펴내기도 했다. “제게 알두스는 ‘책 좋아하는 미친 선배’예요. 베네치아의 돈 많은 사람들 찾아가서 ‘앵벌이’ 하고 지식인들 모아서 ‘출판’이라는 새로운 모델을 만든 사람이죠. 의학서·법학서 아니면 돈이 안 되던 시절에, 책을 통해 고대 그리스·로마 문명화를 복원시킨다는 일념으로 아리스토텔레스 필사본들을 모으고 그리스어 활자까지 개발해가며 책을 냈어요. 평생 126권 정도 냈는데, 실상 ‘베스트셀러’가 된 것은 몇 안 됐지만, 모두가 인류 유산으로 남았어요. 감히 ‘21세기의 알두스’가 되어보는 게 저의 꿈입니다.” 그는 마누티우스가 이끌었던 알디네 출판사의 표장 속 돌고래와 닻 그림에 담긴 메시지, “천천히 서둘러라”(festina lente)를 자신의 원칙으로 새기고 있다고도 말했다.

알두스 마누티우스가 세운 알디네 출판사의 표장. 돌고래는 ‘빠름’을, 닻은 ‘천천히’를 상징한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이제는 부쩍 많아진 출판계 ‘후배’ 편집자들에게 “‘필요하니까, 좋아하니까’ 책을 내는 모델이 가능하다”는 것을 말해주고, 또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이 나라에는 전세계에 내놓을 만한 인문학술 출판사가 거의 없다. 그것의 필요성을 증명하고 또 실제로 만들어내는 것은 오직 편집자들에게 달렸는데, 그들에게 “사업적인 성공 모델이 아니라, 편집자로서 성공 모델”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싶다는 것이다. 이 실장은 동료 편집자들에게 “세가지 에이(A)”를 함께 새겨보자고 제안했다. 교육하고 계몽하는 책의 본질적 기능(aufklärung), 책이란 그릇에 담길 정신(aura), 사회에 대한 책의 구실(agenda) 등이다. “최고의 책을 내면, 반드시 알아보는 독자가 있습니다. 그것만이 출판에 있어 유일한 영업 방침이라고 생각합니다.”

중세 철학, 중세 역사, 중앙아시아·몽골을 중심으로 한 문명교류사 등에 열중해온 이 실장은 최근 <빨치산의 딸> 등 정지아 소설가의 영향을 계기로 한국 현대사에 새롭게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애초 책을 좋아하게 된 계기로 되돌아가고 있는 셈이다. “항상 새로운 호기심이 생겨나고, 그것을 또 책으로 해결합니다. 이것 말고 또 즐거운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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