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머리는 냉철하게 가슴은 뜨겁게, 책과 더불어

최재봉 2022. 12. 30.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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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50여곳 기대작들 읽으며
현실 타개할 지혜와 용기 얻고자

생태와 소통, 젠더이슈 책들 꾸준
손택 평전, 장하준 음식 이야기도
그래픽 동혜원 hwd@hani.co.kr, 국립중앙박물관, 게티이미지뱅크

“매양 추위 속에/ 해는 가고 또 오는 거지만// 새해는 그런대로 따스하게 맞을 일이다.// 얼음장 밑에서도 고기가 숨쉬고/ 파릇한 미나리 싹이/ 봄날을 꿈꾸듯// 새해는 참고/ 꿈도 좀 가지고 맞을 일이다.”(김종길, ‘설날 아침에’ 앞부분)

시인의 당부대로 새해는 따스하게, 꿈도 가지고 맞이하고 싶지만 쉽지가 않다. 뉴스의 속성이 그런 것이라고는 해도, 2022년을 결산하는 국내외 주요 뉴스는 유난히 암울한 일들투성이다. 어리석은 인간들은 바야흐로 자멸과 공멸의 페달을 힘껏 밟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세상이 어지러울수록 기본을 챙기고 작은 실천에라도 나서야 하는 법. 자멸과 공멸의 미친 질주를 멈추려면 머리는 냉철하게 가슴은 뜨겁게 유지할 필요가 있다. 책을 만들고 읽는 일이 무엇보다 그에 도움이 된다. 해마다 최악의 불황 기록을 경신해 가는 가운데에서도 출판인들이 좋은 책을 정성껏 내고 눈 밝은 독자들이 그 책들을 찾아 읽는 행위는 박수를 받아 마땅하다. <한겨레>는 50여개 주요 출판사의 출간 예정작을 건네받아 정리했다. 문학과 학술 분야는 따로 소개한다.

먼저 시시각각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기후변화와 생태 위기에 경고를 보내는 책들이 여럿 준비 중이다. 김영사는 스웨덴의 젊은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가 기획하고 전 세계의 전문가 100여명이 쓴 <기후 책>을 선보인다. 이음은 브뤼노 라투르와 함께 <녹색 계급의 출현>을 쓴 사회학자 니콜라이 슐츠가 파리와 휴양지에서 직접 경험한 기후위기의 현실을 담은 <지구 거주 통증>(가제), 그리고 브라질 인류학자 에두아르두 비베이루스 지 카스트루가 철학자 데보라 다노스키와 함께 종말론과 인류세의 위기의식을 다룬 <세상의 종말>(가제)을 내놓는다. 팬데믹과 기후위기를 초래한 ‘자만하는 인간’의 기원을 추적한 <호모 휴브리스: 인류의 탄생과 파멸>(요하네스 크라우제, 토마스 트라페)은 책과함께에서 나온다. 나름북스는 자본주의 성장 이데올로기가 불평등을 증가시키고 생태계를 파괴하는 양상을 폭로하고 그 대안을 제안하는 <미래는 탈성장이다: 자본주의 너머 세계로의 안내>(가제)(마티아스 슈멜처, 아론 반신티안, 안드레아 베터)를 내놓으며, 교양인은 세계적 종교학자 카렌 암스트롱이 다양한 종교 전통 속에서 자연과 인간의 관계 회복 방안을 모색한 심층 생태학 책 <성스러운 자연>(가제)을 출간한다.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로 정보 양과 의사소통 창구는 많아졌지만, 그것이 타인에 대한 이해와 관용으로 이어지기는커녕 오히려 단절과 적대를 강화한다는 것은 쓰라린 역설이다. 21세기북스는 의사소통 과정의 언어 왜곡과 거짓말 및 혐오 표현을 다룬 번역서들을 집중적으로 펴낸다. <컬티시: 광신의 언어학>(어맨다 몬텔)은 사이비종교나 다단계사기, 자기계발 강의 등 특정 집단에서 추종자를 조작하고 형성하는 방식을 까발린다. <라이어스>(가제, 캐스 선스타인)는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거짓말일지라도 검열하거나 규제해서는 안 되고 바로잡는 것이 최선이라고 강조하며, <헤이트>(가제, 네이슨 스트로슨)는 혐오 표현을 규제하는 대신 대항 스피치(counter speech)로 맞서는 게 효과적이라는 주장을 펼친다. 이데올로기적 데이터 왜곡의 가능성을 경계하고 데이터 선택에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취지를 담은 데이터 저널리스트 틴 피셔의 책 <좌파의 데이터, 우파의 데이터: 우리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이유>는 부키에서 나온다.

페미니즘과 젠더 이슈를 담은 책들도 꾸준히 이어진다. <선량한 차별주의자>의 지은이 김지혜는 오랜 기간 한국사회를 장악해온 가족질서가 성소수자를 둘러싼 논쟁을 통해 어떻게 감지되고 재현되는지를 분석한 <가족각본>을 창비에서 낸다. 휴머니스트는 성범죄 가해자를 지원하는 법 시장의 실태를 파헤친 <시장으로 간 성폭력>(김보화)을 펴내며, 교양인은 검사 출신 법학자가 성폭력 사건에서 피해자의 주장을 무시하도록 구조화된 우리의 정신과 문화, 법체계를 분석하고 변화를 위한 방법을 모색하는 <불신당하는 말>(가제, 데버러 터크 하이머)을 내놓는다. 개마고원은 혐오문화의 종착지가 된 뉴스 댓글을 젠더 관점에서 분석한 <혐오사회의 얼굴, 댓글창>(가제, 정지혜)을 준비 중이며, 21세기북스는 <백래시>의 작가 수전 팔루디가 남성성의 신화를 해체하며 20대 남성들의 분노의 연원을 추적한 <스티프드>(가제)를 낼 예정이다. 같은 출판사에서 나오는 <자본의 성별>(가제, 셀린 베시에르)은 자본에도 성별이 있음을 밝히고 남성의 자본 점유로 인해 계급 사회가 재생산되는 방식을 분석한다. 사이보그 인류학의 권위자인 도나 해러웨이의 과학철학 및 페미니즘의 고전인 <유인원, 사이보그 그리고 여자>(가제)도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다. 역시 21세기북스의 책 <페미니스트 킬조이>(가제, 사라 아메드)는 모욕을 유발하는 농담을 웃어 넘기지 않고 그에 맞서려는 이들을 위한 실용 페미니스트 서바이벌 안내서다. 동아시아는 새롭게 선보이는 의치약 브랜드 히포크라테스를 통해 2003년 미국 대법원의 ‘소도미법’(동성애 금지법) 철폐에 결정적인 역할을 해서 유명해진 <생물학적 풍요, 동성애의 과학>(브루스 베기밀)을 펴낸다.

사회적 약자들에 주목하고 그들과 함께하려는 책들도 이어진다. <아픔이 길이 되려면>을 비롯한 책들에서 사회적 약자에 대한 공동체의 책임을 치열하게 질문해온 김승섭은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동아시아)에서 스스로에게 연구자의 책임, 공부의 역할을 묻는다. 푸른숲의 심리학 브랜드 심심에서는 암 환자와 암 경험자의 마음을 돌보는 정신과 전문의 이광민의 첫 책 <나는 암 환자의 정신과 의사입니다>를 선보인다. 같은 출판사에서 나오는 <인간 사용 설명서>(가제, 카밀라 팡)는 여덟살에 자폐증 진단을 받은 생화학박사가 도무지 알 수 없던 타인이라는 존재, 소통에 대해 과학을 통해 이해하는 과정을 담았고, 눌민의 <하이퍼월드: 고기능 자폐 당사자와 아바타를 통한 메타버스 삶>(이케가미)은 자폐를 장애로 보지 않고 신경다양성의 차원에서 자폐 당사자의 삶에 접근하는 책이다.

급변하는 현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역사와 지정학 분야 책들도 이어진다. 삼인출판사는 간토대지진 100주년에 맞추어 당시 일본 언론의 보도를 추적하며 학살의 진상을 파헤친 <관동대지진 ‘학살 부정’의 진상: 하버드대학 교수의 논거를 검증한다>(와타나베 노부유키>를 내놓는다. 서해문집은 동독 주민 인터뷰와 새로운 기록을 바탕으로 사라진 동독 이야기를 들려주는 <그 벽 너머: 우리가 몰랐던 동독 이야기>(카티야 호이어)를 준비하고 있다. 글항아리에서 나오는 <아시아인의 미국 만들기>(에리카 리)는 미국 내 아시아계 이민자들의 오랜 역사를 포괄적으로 담았다. <싸우는 신문, 한겨레의 12년>이라는 책을 낸 바 있는 아사히신문 국제관계 전문기자 이토 치히로는 <늠름한 아시아>(가제, 나름북스)에서 작지만 강한 아시아의 네 나라-한국, 베트남, 필리핀, 스리랑카-의 경쟁력을 분석한다. 메디치에서 나오는 <나토의 동진>(가제)은 국제 관계 전문가 메리 엘리스 서로티 교수의 3부작 중 대표작으로, <베를린장벽의 붕괴>와 <1989년>으로 이어질 예정이다. 생각의힘은 우크라이나 소녀 예바 스칼리예츠스카가 러시아의 침공 이후 적은 기록을 모은 <예바의 일기: 당신은 전쟁을 몰라요>(가제)를 출간한다.

수전 손택을 조명한 퓰리처상 수상작 <수전 손택: 생애와 업적>(벤저민 모서)은 글항아리에서 나온다. 피아니스트 백혜선의 <나는 좌절의 스페셜리스트입니다>(다산북스)와 식물분류학자 허태임의 <허태임 직업 이야기>(마음산책), 다큐멘터리 작가 김옥영의 <부서지는 가슴을 위하여>(문학과지성사)에서는 특별한 직업을 지닌 여성들의 삶과 일에 얽힌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경제학자 장하준 교수가 마늘부터 초콜릿까지 18가지 음식을 둘러싼 이야기와 관련된 경제 문제를 재미나게 풀어낸 <먹을 수 있는 경제학>(가제)은 부키에서 나오고, 형제복지원 사건을 다룬 기획 기사를 기반으로 한 <한겨레> 박유리 기자의 책 <사람이 되는 시간>은 시대의창에서 출간된다. 한겨레출판이 준비하는 <혐오와 광기에 관한 사전>(케이트 서머스케일>은 저장 강박, 단추 공포증, 철도 공포증 등 우리에게 낯설면서도 친숙한 공포증과 강박의 기원과 역사를 다룬 책이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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