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무슨 일이 있어야 아무 일도 없을까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대략 한 달 전에 허브차와 귤 아홉개와 책 한권을 담은 소포가 대전에 사는 요정으로부터 배달되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수돗물이 나오지 않는다/ 한 손에 낫을 들고/ 수원지인 골짜기를 살피러 간다." 야마오 산세이는 이렇게 생각한다.
"아마 이십년 가깝게 이 일을 해왔다는 생각을 한다/ 앞으로도/ 이런 일을 하며 죽어 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을 받는 관에는 역시 가랑잎이 끼어 있고 그는 그것을 빼낸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나는 숲으로 물러난다
야마오 산세이 지음, 최성현 옮김 l 상추쌈(2022)
대략 한 달 전에 허브차와 귤 아홉개와 책 한권을 담은 소포가 대전에 사는 요정으로부터 배달되었다. 귤부터 얼른 하나 까먹고 ‘귤 참 맛있다!’ 생각하면서 그대로 주저앉아 책을 읽었다. 일본의 야쿠시마 섬에 살던 야마오 산세이 선생의 <나는 숲으로 물러난다>라는 시집이었다. 나는 이 시집에서 내 평생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시를 적어도 다섯 편은 발견했다.
그중 한편인 ‘숲속의 집5’라는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아침에 일어나니 수돗물이 나오지 않는다/ 한 손에 낫을 들고/ 수원지인 골짜기를 살피러 간다.” 야마오 산세이는 이렇게 생각한다. 틀림없이 또 물을 받는 관에 가랑잎이 끼었겠지! 시는 이렇게 이어진다. “아마 이십년 가깝게 이 일을 해왔다는 생각을 한다/ 앞으로도/ 이런 일을 하며 죽어 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을 받는 관에는 역시 가랑잎이 끼어 있고 그는 그것을 빼낸다. 기분 좋은 5월의 물이 콸콸 흘러내리고 그는 내친김에 얼굴까지 시원하게 씻고 “풀고사리인지 메밀잣밤나무 것인지 알 수 없는 파르스름한 꽃가루”를 셔츠에 잔뜩 붙이고 이슬비를 맞으며 집으로 돌아온다. 집에서는 가족들이 빙그레 웃으면서 나란히 앉아 아침 식사를 하고 있다. 시는 이렇게 끝난다. “설거지대에서는 물이 소리를 내며 힘차게 쏟아져 나오고/ 그럼 나는 천천히 아침 차를 마실 수 있다/ 아무 일도 없고/ 아무 일도 있는 숲속의 집.” 삶과 자신의 일을 사랑하고, 서로에게 다정한 평범한 이야기인, 아무 일도 없던 하루에 대한 이 시가 마음 깊은 곳을 건드린다.
오늘은 한 해의 마지막 날이고 어쩔 수 없이 ‘시간의 흐름’에 대해서 생각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제 곧 덕담들, 이를테면 내년에는 소원성취하세요! 건강하세요! 오래 사세요! 행복하세요! 힘내세요! 웃을 일 많기를… 같은 인사들을 나눌 것이다. 따뜻한 말들이다. 그러나 모두 우리가 내년에 큰일 없이 살아 있으리라는 것을 염두에 둬야 할 수 있는 말들이다. 그러고 보면 세상에 많은 비통한 일이 있어도 ‘나는 아니야’ ‘설마 나에게…’라는 막연한 기대가 아직 살아 있는 생명들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일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올해는 ‘시간의 정지’라는 단어가 부쩍 생각이 난다. 아직 무슨 일인가 일어나기 전, 광주의 아파트가 붕괴되기 전, 쏟아지는 비로 반지하방의 문이 꿈쩍도 안 하기 전, 오봉역 화물열차가 청년노동자를 치기 전, 샌드위치 소스 기계가 청년노동자를 잡아당기기 전, 이태원의 좁은 골목길이 막히기 전, 그 전에 딱 시간이 멈추고 ‘아무 일도 없는 나의 집’이라고 말할 수도 있었던 그 많은 정지된 시간들을 상상하게 된다. 그리고 그 시간들 앞에서 질문을 한번 던져보고 싶다. 그 시간 안에 무슨 일이 있었어야 아무 일도 없을 수 있었을까? 누군가 무슨 일을 했었어야 혹은 하지 않았어야 아무 일 없이 다 같이 밥을 먹고 있었을까?
친구가 한 말이 생각난다. 기후위기의 재앙을 막으려고 누군가 죽어라 고기를 먹지 않고 죽어라 에너지를 절약한다면 그 조용한 노력을 우리는 알아보기나 할까?
나는 며칠 전부터 이런 문장을 썼다 지웠다 하고 있다. ‘당신이 누구인지 알고 싶은가. 당신이 누구에게, 무엇에 책임감을 느끼는지, 이건 내가 죽을 때까지 해야 하는 일이야! 라고 생각하는지 말해달라.’ 내년에는 ‘아무 일 없도록, 아무 일 있는 이야기’들이 많아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CBS>(시비에스) 피디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 ‘현실 진도준’의 무기는…전환사채·일감 몰아주기·초고속 승진
- 김봉현의 ‘두번째 도주’ 막 내려…잠옷 바람에 9층 베란다 탈출 시도
- “지구 상 모든 것은 게임이다. 패싱 게임”…펠레의 어록들
- ‘아크릴’로 만든 방음터널, 불에 녹아 떨어져도 계속 탄다
- 청와대 미술관 좌초 위기에 ‘윤석열차’가 왜 소환될까
- 가난·독재 앓던 브라질, 펠레는 축구 영웅 그 이상이었다
- 법원, ‘한동훈 자택 침입’ 혐의 더탐사 강진구 구속영장 기각
- “오늘도 안전하게 일하고 힘내” 마지막이 된 엄마의 메시지
- “러시아 돌아가면 죽음뿐”…유학생들 살 떨리는 난민 신청
- “이태원 생존자분들, 여기 당신을 위한 빈자리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