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각김밥 먹으며 버텨" 주류 벽 부순 '중꺾마'의 기적
"일본 편의점에서 삼각김밥을 먹고 일하며" 4년 동안 옷 한 벌로 버티며 한국 활동에 대한 꿈을 키우던 그는 올해 한국 MZ세대에 가장 주목받은 '일본인'(다나카 유키오)이 됐다. 2017년 SBS 코미디 프로그램 '웃음을 찾는 사람들' 폐지로 직장을 잃은 코미디언 김경욱이 유튜브에서 4년 넘게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심정으로 '부캐'를 키운 결과다. 가수 윤하는 데뷔 후 15년 넘게 놓지 않은 피아노 록으로 결국 올겨울 음원 시장을 강타했고, 중3 때 꾼 감독의 꿈을 접지 않고 지천명(50세)에 이룬 안태진은 영화 '올빼미'로 OTT의 득세로 관객 발길이 뜸해진 극장가에 다시 불을 지폈다.
주류의 벽을 허물고 대중문화 속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중꺾마)'이 빛난 순간들이다. 9%의 확률을 뚫고 기적처럼 16강에 진출한 한국 축구 대표팀이 2022 카타르 월드컵에서 보여준 것처럼 올 K콘텐츠 시장의 화두도 '중꺾마'였다. '중꺾마'의 주역들은 한류의 흐름까지 바꿨다.
'물 붓다 보면" 직장 잃은 코미디언들의 뚝심
그룹 소녀시대 멤버인 태연은 최근 방송된 tvN 예능 '놀라운 토요일'에서 양팔을 턱 밑에 'X'자로 붙인 뒤 양 손가락을 나비 날개처럼 활짝 펴 웃음을 줬다. 젊은 세대 사이 화제인 인사법으로 요즘 유튜브를 켜면 안 나오는 데 없는 다나카의 시그니처 포즈다. 다나카는 한국에 푹 빠진 일본 유흥가 출신 유튜브 스타. 이 캐릭터의 주인공인 ①김경욱은 아주 작은 애벌레로 오랫동안 살아도 언젠가는 허물을 벗고 날개를 활짝 펴고 자유롭게 나는 나비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담아 '중꺾마 인사법'을 만들었다.
김경욱은 그간 유튜브에서 '존버'(힘들게 버팀)했다. 샤기컷에 찢어진 청바지로 20세기 말을 휩쓴 Y2K 패션을 고수하는 다나카를 시작으로 딥페이크 기술로 테슬라 최고경영자인 일론 머스크 얼굴을 합성한 전남 영광 출신 '나 일론 머스크'를 거쳐 기행을 일삼는 '53세 김홍남'까지. 이 다양한 부캐를 그는 1~4년 동안 키우며 개인화의 성벽인 알고리즘을 뚫었다. "복고, 키치 등의 문화적 코드를 활용해 '웃찾사' 나몰라패밀리 때부터 힙합과 밤 문화를 소재로 주력한 '쌈마이(삼류) 정신'을 일관되게 밀어붙여 빛을 본 사례"(김교석 방송평론가)라는 평이다.
다나카는 주황색 닭벼슬 모양의 가발을 쓴 채 진한 스모키 화장을 하고 결혼식장에서 축가로 1980, 90년대를 풍미한 일본 유명 록그룹 엑스재팬의 히트곡 '엔드리스 레인'을 부른다. 김경욱은 일본 문화 코드를 B급 정서로 다나카에 압축했다. 다나카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유흥업에 뛰어들었지만 그간 거의 '지명'을 받지 못한 '미생'이다. 온라인엔 "다나카의 '지명'이 연예인의 삶이랑 매우 닮은 것 같다. 지명 못 받았다고 하는 얘기가 (지상파에서 무대를 잃은) 김경욱 본인 얘기 같아 마음이 아프다"(@eui****)라는 글이 올라왔다.
다나카는 본보에 "그간 믿음으로 버텼다"고 했다. "수입이 충분하지 않아 노가다 일 또까(막일이라든가)와 배다루(배달) 등의 부어브(부업)를 했습니다. 돈이 많이 없어서 콘비니(편의점)에서 삼각그 김바브(삼각 김밥)나 벤또(도시락)를 주로 먹으면서 밤므 나즈(밤낮) 구별 없이 일했습니다. 꾸준하게 물을 붓다 보면 언젠가 히카리(光·빛)가 저를 향해 내려올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렇게 유튜바(버)로 4년 동안 활동하면서 조금씩 한국에서 저를 좋아해 줬고, 그런 환(팬)들의 응원이 저를 버티게 해준 힘이었습니다". 그가 최근 한 달 새 '라면꼰대3' '밥묵자' '튀르키예즈 온 더 블럭' 등 유튜브 인기 예능 프로그램에 줄줄이 초대됐고 조회수가 300만 건을 훌쩍 넘었다.
소울리스좌, '나를 아끼며 버티는' K직장인
KBS2 '개그 콘서트' 폐지로 김경욱처럼 지상파에서 무대를 잃은 ②김민경은 2년여 전부터 운동에 몰두해 "태릉이 놓친 인재"란 소리를 듣더니 국가대표(실용사격)가 돼 올해 빛을 봤다. 온라인 예능 '시켜서 한다, 오늘부터 운동뚱'에서 김민경에게 사격을 비롯해 필라테스, 격투기, 축구 등 숱한 운동을 시킨 서현도 PD는 최근 본보와 만나 "늦더라도 꾸준히 그리고 천천히 해나가면 그것이 쌓여 나중에 다른 인생을 살 수 있지 않을까란 희망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기획 의도를 들려줬다.
올해 유튜브에서 최고 조회수를 기록한 콘텐츠의 주제도 '중꺾마'였다. ③놀이공원 아르바이트생(김한나·23)이 '영혼 없이' 속사포처럼 놀이기구 탑승 안내 방송을 쏟아내는 장면을 담은 2분 30초 분량의 짧은 영상은 28일 기준 조회수 2,590만 건을 넘어섰다. '소울리스좌'로 불리나, 진짜 영혼이 없는 게 아니라 최대한 '나를 아껴' 직장 생활을 견디고 버티는 삶의 태도에 대한 호응이었다.
15년 만에 다시 푼 '비밀번호 486'
④윤하도 올 하반기 K팝 시장을 뒤흔든 '중꺾마' 스타다. 멜론 지니 벅스 등 국내 9개 음원 플랫폼의 음원 소비량을 집계하는 써클차트에 따르면, 윤하는 3월 발표한 '사건의 지평선'으로 11월 6일부터 이달 17일까지 6주 동안 1위를 차지했다. 화려한 피아노 연주에 강렬한 록 음악을 더한 피아노록은 그의 전매특허. 활동 초기 히트곡인 '비밀번호 486'(2007)에 대한 추억을 지닌 팬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기 시작한 '사건의 지평선'은 공개 6개월여가 지나 음원 시장을 강타했다. "무엇인가 새로운 시도를 해야 하는 강박에서 벗어나 유행에 흔들리지 않고 '가장 윤하스러운 음악'에 '혜성' '오르트 구름' '살별' 등 그간 꾸준히 펼쳐 온 천체물리학적 사랑 얘기를 얹어 빛을 본 역주행"(김성환 음악평론가)이다.
'실패한 팬'의 꺾이지 않은 책임감
'중꺾마'로 중무장한 창작자들은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얼어붙은 극장가에 군불을 지폈다.
서너 편 제작을 추진하다 엎어진 뒤에도 영화 연출의 꿈을 놓지 않은 ⑤안태진 감독은 '올빼미'로 280만여 관객을, '날아라 허동구'(2007) 이후 15년 만에 다시 메가폰을 잡은 ⑥박규태 감독은 '육사오'로 198만여 관객을 각각 불러 모았다. 모두 여름, 겨울 극장 대목에 신인 감독 그리고 저예산 영화가 이룬 반전이었다. ⑦오세연 감독은 그의 오랜 '덕질'을 성찰한 '성덕'으로 독립영화 시장에 활기를 줬다. 범죄자가 돼 버린 스타(정준영)를 계기로 '실패한 팬'이 됐지만 그 팬들이 누군가에게 준 사랑이 범죄의 동력이 됐을지 모른다는 책임감에서 시작한 일은 스크린을 넘어 K콘텐츠 시장 일부 맹목적인 팬덤에 성찰의 계기를 제공했다.
올 '세상을 바꾼 콘텐츠'(한국문화콘텐츠비평협회)로 꼽힌 드라마 ⑧'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유인식 PD와 문지원 작가의 '중꺾마'로 빛을 봤다. 제작진은 "자신 없어" 여러 차례 출연 제안을 고사했던 박은빈을 1년 넘게 설득하고 또 설득해 섭외했고 그를 통해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더불어 사는 삶의 중요성을 환기했다.
"굴비(屈非)하세요" 또 다른 '중꺾마'
'중꺾마' 스토리를 다룬 드라마들은 올 연말 희망의 불씨를 곳곳에서 되살리고 있다.
"자기가 날 돌봐줬으면 좋겠어." 병원에서 말기 암 선고를 받은 아내 다정(김서형)의 이 말에 남편 ⑨창욱(한석규)은 요리를 시작했다. 왓챠 시리즈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에서 이혼을 앞둔 가장은 그렇게 다시 가정으로 돌아와 가족을 위해 굴비를 찐다. 글쓰기 강좌 수강생들이 뜻을 굽히지 말라는 뜻의 '굴비(屈非)하세요'란 문구를 적은 메모와 함께 준 선물이다. 어려운 상황에도 펜을 꺾지 말라고 받은 선물을 창욱은 세상을 떠날 준비를 하는 아내 그리고 남겨질 아들을 위해 굴비를 내놓는다. 지금 무엇보다 중요한 건 가족의 꺾이지 않는 마음. 창욱의 아들은 아버지에게 받은 굴비를 대학에 떨어진 친구에게 선물한다. 기성세대가 청년세대에게 건네는 응원처럼 읽힌다. 본보와 서면으로 만난 이호재 감독은 "동명 원작도 마찬가지이지만 드라마 전체적으로 흐르는 정서가 병마를 극복할 수 없더라도 삶의 기쁨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것"이라며 "'어쩌다 보니 가족 중에 한 명이 암 환자인 유쾌한 가족 드라마라고 스태프들에게 설명하고 촬영했다"고 연출 의도를 들려줬다.
지난해 하반기 신드롬을 일으킨 뒤 이달 시즌2로 돌아온 티빙의 ⑩'술꾼도시여자들'도 지연(한선화)의 암 투병에도 불구하고 소희(이선빈)와 지구(정은지)의 꺾이지 않는 우정을 강조하며 시청자를 다시 불러 모으고 있다.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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