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청도설] 사라져야 할 ‘빌라왕’

우리 사회에선 특정 분야에서 뛰어난 능력을 갖추고 으뜸이 되는 사람에게 ‘○○왕’이라는 수식어를 재미 삼아 붙이곤 한다. 탄탄한 복근과 단단한 몸매를 가진 사람을 ‘근육왕’이라 부르고, 남보다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면서 밤낮으로 몰두해 성과를 올린 이에 대해서는 ‘노력왕’이라 찬사를 보낸다. 만약 어릴 때부터 남다른 기억력을 갖고 있었다면 그에게는 ‘암기왕’이라는 별명이 분명히 따라다녔을 터다.

그러나 ‘○○왕’은 때때로 손가락질을 받는 이들을 지칭하는 단어가 되기도 한다. ‘빌라왕’ ‘탈세왕’ ‘로비왕’ ‘마약왕’ ‘갑질왕’ ‘꼰대왕’ 등이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당연히 이런 호칭에는 상종하지 말아야 할 사람이라는 경멸의 뜻이 담겨 있다. 이 때문에 일부에서는 이들의 반사회적 행각을 비꼬는 것이기는 하지만 굳이 왕이라는 거창한 표현까지 갖다 붙일 이유가 있느냐는 지적이 나오기도 한다.

사회의 지탄을 받는 ‘○○왕’ 가운데 요즈음 가장 많이 거론되는 수식어는 ‘빌라왕’이다. 이들은 ‘무자본 갭투자’ 방식으로 다량의 주택을 구입해 시세차익을 노린다. 그래서 문제가 발생했을 때 임차인은 보증금을 떼일 수밖에 없어 큰 사회문제로 불거졌다. 최근 갑자기 숨져 많은 임차인을 고통에 빠뜨린 김 모 씨는 주택 1139채를 보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9월 경찰에 붙잡힌 일당은 주택 3400여 채를 갖고 전세사기 행각을 벌였다.

업계에서는 이런 대규모 ‘갭투자꾼’ 숫자가 상당할 것으로 추산한다. 사기 행각이 벌어지는 장소도 전국 어디든 가리지 않는다. 억울한 피해자들이 잇따르면서 정부는 범부처 합동으로 전세사기 근절에 나섰다. 국토교통부가 ‘전세피해지원센터’에 접수된 사례 가운데 피해자가 다수이거나 공모가 의심되는 건을 선별해 혐의를 포착하면 경찰청은 수사를 진행한다. 아울러 정부는 ‘피해자 보호·지원을 위한 기구’ 설치와 행정·재정 지원 근거도 이른 시일 내에 마련하기로 했다.

전세사기는 집 없는 서민을 과녁으로 하므로 아주 악질적인 범죄에 해당한다. 졸지에 보증금을 떼인 임차인들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충격을 받게 된다. 게다가 피해자 대부분이 부동산 거래 경험이 적은 20, 30대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들의 사기 행각이 우리 사회에 미치는 악영향은 더 크다.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힘을 합쳐 뿌리를 뽑아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될 수밖에 없다. ‘빌라왕’이나 ‘빌라의 신’ 등과 같은 말은 더 이상 우리 사회에서 통용되지 않아야 한다.

염창현 세종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