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칼럼] ‘아버지의 해방일지’ 깊이 읽기

기자 2022. 12. 30.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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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4월15일이었다. 정지아 소설가와 깊은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다음 작품으로 ‘3일 동안의 아버지의 장례식’ 이야기를 쓰고 있다고 했다. 200장쯤 썼다가 다시 지우고, 또다시 쓰고를 네 번쯤 반복하고 있다고도 했다.

오창은 문학평론가·중앙대 교수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10년 넘게 궁리하고 애써 쓴 역작이다. 힘을 들이면 무거워지기 마련인데, 이 소설은 ‘경쾌한 깊이’로 발랄하게 빛난다. 전직 빨치산이자 뼛속까지 사회주의자였던 ‘고상욱’의 장례식이 소설의 중심 서사다. 대학 시간강사인 딸 ‘고아리’가 문상객들을 맞으면서 ‘몰랐던 아버지의 삶’을 하나하나 발견해나간다는 이야기다. 고상욱은 1948년에 입산한 구빨치산이고, 1952년에 위장 자수한 사회주의자였다. 1974년 즈음에 다시 투옥되어 6년여 동안 감옥살이를 한 이력도 있다. 견고한 이데올로기 중심주의자처럼 보였던, 딸 아리의 인생을 망쳤던 아버지의 행적은 하루하루 장례를 치를수록 다채로운 모습으로 바뀐다. 미스터리적 기법을 활용하면서도, 훈훈한 민중주의적 정서를 보듬은 소설의 서사가 몰입도를 높여준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깊이 읽기 위해 우선 시간에 집중해 보자. 이 소설은 3일 동안의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1948년부터 1952년, 1980년대 초중반, 그리고 21세기 초반의 시간이 공존한다. 고상욱은 곡성군당위원장이었고, 서툰 농부였다가, 구례읍내 고층아파트 관리인이기도 했다. 고아리는 어떠한가? 아빠와 엄마의 빨치산 시절 이야기를 듣는 역사의 수신자였다가, 고교 시절 ‘하염없이’ 부모를 원망하는 반항아로 변했고, 이제는 맏상제로서 아버지의 인연들을 감당해야 하는 처지에 있다. 소설 속 공간도 중요하다. ‘삼림조합 장례식장’이 중심 공간으로 설정되어 있지만, 이야기는 반내골과 구례읍내로 확장된다. 구례사람들이 고상욱을 추모하기 위해 모여들면서 각자가 마음속에 품고 있던 감사, 회한, 원망, 분노의 감정들이 뒤섞여 용광로처럼 들끓는다. 이 설정은 20세기 한국현대사가 여전히 조심스러워하는 ‘빨치산의 서사를 현재화’하기 위한 포석이다. 소설 속 다채로운 사건은 시간과 공간의 압축과 펼쳐짐이라는 설정 때문에 가능해진다.

지리산 자락 구례사람들의 다양한 사연들이 서사의 중심을 형성하고 있다는 사실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고상욱의 ‘삼오동창모임’과 구례읍내에서 맺어온 인연들은 정서적 공동체의 정감 어린 풍경 묘사로 이어진다. 장례식을 치르는 데 큰 힘을 보탰던 황 사장과 떡집 언니의 사연도 인상적이다. 그들은 빨치산 후손들이다. 소설 속 세세한 사건들도 눈길을 끈다. 큰집 길수 오빠가 육군사관학교에 합격하고도 연좌제로 삶의 궤적이 바뀐 이야기, 한국전쟁 발발 직전 스물셋의 순경이었다가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살아난 ‘그’의 이야기가 그 예이다. 그리고 작은아버지의 피폐한 삶도 안타까움을 더해준다. 전 생애를 바쳐 청년 시절의 선택에 대해 책임지려 했던 고상욱의 모습도 삶의 한 풍경이라면, ‘가마니처럼 엎드려’ 살아온 ‘길수 오빠나 작은아버지, 황 사장과 떡집 언니’의 삶도 소설의 색감을 다채롭게 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한다.

소설가 정지아는 “이데올로기적 상처를 그 이데올로기를 이해한 순간에 넘어섰다고 생각했는데, 살아보니까 아니더라고요. 이를테면 멀리서 바라보지 못한 거죠”라고 했다. 이해를 전제로 한 당위적 포용은 더 많은 상처를 불러올 수 있다. 오히려 불편한 마음을 감수하는 거리 두기가 더 나은 미래의 삶을 위해 꼭 거쳐야만 하는 과정일 수도 있다. 거리 두기의 감각이 살아날 때, ‘만남과 헤어짐, 그리고 보내기’의 과정은 보편성을 획득하게 된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작가와 대상의 거리 두기가 가능했기에 도달할 수 있었던 빛나는 문학적 성취다. 특별한 것처럼 보이는 개인의 삶도, 거리 두기를 통해 민중의 삶으로 보편화하면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뀐다. 멀리서 봐야, 그제야 보이기 시작하는 것들이 있다. 민중의 삶은 생각보다는 훨씬 다채롭고 풍부하다.

<아버지의 해방일지>에서 이데올로기적이고 정치적인 삶과는 거리를 둔, 민중의 삶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 모습은 ‘인간의 도리’로 압축할 수 있다. 소설 속 인물들, 특히 구례사람들의 삶은 ‘억압적 지배권력도 훼손하지 못한 인간의 도리’를 갈무리하고 있다. 그 ‘인간의 도리’는 이웃을 소중히 여기고 더불어 살아가려는 ‘하염없는’ 마음이자, ‘오죽하면’으로 압축되어 표현된 연민하고 공감하는 태도이다. 이 소설은 ‘민중의 해방일지’이기도 하기에, 더 사무치고, 애절하며, 그리고 아름답다.

오창은 문학평론가·중앙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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